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6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겨우 나 때문에 그들이 그랬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성력을 채워 줘야 하는 때를 놓쳐서 루실리온이 초반엔 네 옆에 엄청나게 붙어 있었을걸.”
“…….”
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 걸까?
“에르노 에탐은 고대 문헌을 기반으로 드래곤 레어까지 찾으러 다녔었고.”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 에탐 가주는 신전에 쳐들어갔고 루실리온은 신전에 있는 성물이란 성물은 다 가져왔나 봐.”
내가 주먹을 꽉 쥐자 샤르네와 릴리안이 양쪽에서 내 손을 하나씩 붙잡았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금방 클 거야.”
에노쉬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쪼끄만 반죽이라고 너무 풀 죽어 있지 말라는 거야. 반죽도 언젠가는 부풀어서 커다래지겠지.”
에노쉬의 퉁명스러운 말에 나는 서툴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콜린 공작과 에르노 에탐이 크게 싸운 적도 있었지.”
“싸워…?”
“응, 입양권을 두고 말이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노쉬가 씩 웃었다.
“궁금해?”
“응.”
“궁금하면….”
에노쉬가 짓궂게 웃었다.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려워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에도 같이 다과 먹자.”
“…어?”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네 얼굴 보려고 줄을 선 사람이 한두 놈이 아니야.”
내가 의아한 낯을 하자 에노쉬가 정말 모르냐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숨기려고 최대한 숨겼는데, 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이 어디로 새어 나갔나 봐.”
“…….”
“그간은 네가 깨어나지 않아서 좀 줄어들긴 했었는데….”
아마 지금은 난리 났을 거라며 덧붙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아빠가 마중까지 나오고 데리러 오겠다고 했던 건가?
“콜린 공작님이랑 아빠는 왜?”
“아…, 널 호적에 넣으려고 하는데, 콜린 공작이 방해했거든. ‘당신 같은 미친 인간에게 그 애를 맡길 수 없습니다. 나중에 에이린이 선택할 문제입니다.’라면서.”
에노쉬는 소파에 나른하게 늘어지며 말했다.
내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릴리안을 보자 릴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샤르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짓을 했어?”
“음…, 너 쓰러지고 난 3년간 암살 길드의 최우수 고객이 에탐 전 공작이었다지, 아마.”
“…아빠가?”
“응. 풍문엔 암살 길드가 지난 3년간 에탐에게 번 돈으로만 섬을 샀다더라.”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그럴 돈이 있으면 나나 주지!
내가 입을 떡 벌리자 에노쉬가 찻잔을 가볍게 기울였다.
“근데 어떻게 아빠가 성공했어?”
“아, 그거….”
에노쉬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자 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다시 봐도 빼빼 말랐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진 모습이 침대 위에서 죽어 가던 그 에노쉬라고는 믿기질 않았다.
“아바마마가 말을 철회했어.”
“폐하가?”
“응.”
“왜?”
“암살자가 아바마마께도 오기 시작했거든.”
그거 범죄 아니야? 반역 아니냐고.
내가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리자 에노쉬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상체를 숙여 허리를 바싹 굽혔다.
“물론 무기는 들고 오지 않았는데….”
“…응?”
암살자라며?
“칼 대신 상소문을 들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잘 때도 일어날 때도 씻을 때도 불쑥불쑥 들어와서 좀 살려 달라고 빌었대.”
갑자기 빌어?
나는 도저히 이 이야기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응, 화풀이를 에탐가의 그림자에게 다 한 모양이더라고.”
“아….”
황제한테 보낸 암살자는 그쪽 암살자구나.
암살 길드가 아니라, 에탐 가문 내에도 그림자가 있었지.
“아바마마께서 그맘때쯤 불면증까지 오셨었지.”
“……아하.”
“그래서 결국 아바마마께서 포기하셨지.”
제 아버지가 당한 이야기가 퍽 즐거운 듯 말하는 내내 에노쉬의 표정은 밝았다.
‘뭐, 웃으니까 보기 좋네.’
역시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낫지.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에노쉬를 생각하면 지금 이런 변화는 꿈만 같았다.
“전하, 슬슬 폐하께 보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러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짧지만, 만나서 반가웠어. 반죽.”
끝까지 말이 곱지 않은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노년의 시종이 내게 빙긋 웃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나도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자 연륜 있어 보이는 시종이 싱긋 웃어 보였다.
“다음에 봐, 에노쉬, 릴리 언니!”
“나는 폐하를 만나진 못해서 여기에 있다가 갈게. 에이린.”
샤르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는 사이 세 사람도 친해진 모양이다.
“응.”
몸을 돌려 시종을 따라 나가려는 때였다.
“야, …에이린 에탐.”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럽게 풀네임을 부르나 싶었다.
“…….”
에노쉬에게선 잠시 말이 없었다. 또 여느 때의 장난인가 싶어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했다.
“…살려 줘서 고맙다.”
내가 놀라서 다시 몸을 돌렸지만, 그는 이미 다른 곳을 보며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붉어진 귓불이 그의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응, 건강해져서 기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곤 냉큼 방을 벗어났다.
어쩐지, 감사 인사를 들었을 뿐인데 목이 홧홧했다.
곱씹을수록 그런 기분이라 나는 종종걸음으로 시종을 따라가다가 그만 걸음을 뚝 멈추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아, 네.”
살짝 고개를 돌리자 호위 기사 질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쫓아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2황자 전하께선 오랜 시간 저 말을 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노시종이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는 내 붉어진 얼굴의 이유를 알고 있는 듯 그렇게 말했다.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매달 성물을 구해서 보내시고 아가씨가 깨어났는지를 꾸준히 물어보셨습니다.”
“…그랬어요?”
“네, 아가씨께서 자기 때문에 화가 났으면 어쩌나, 당신의 5년이 사라져서 어쩌나, 살려 준 걸 후회된다고 말하면 어쩌나 고민이 아주 많으셨습니다.”
“…….”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폭군 황자 에노쉬가 아니던가.
오만불손하고 자신 이외엔 무엇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소년.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아서 스스로의 삶을 더 이어 가는 것조차 거의 포기했던 사람.
“그러니까 아마 오늘 만남을 가장 학수고대했던 사람은 황자 전하이실 겁니다.”
“…….”
“저는 2황자 전하가 어릴 때부터 봤습니다, 그분은 저런 표정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지요. 늘 우울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사방에서 죽는다는 얘기밖에 하지 않으니 철도 일찍 드셨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노쉬에 대한 소설 속 묘사는 지금도 기억이 났다.
처연하다느니 병약하다느니 머지않아 죽을 거라느니 황가의 저주를 안고 태어났다느니, 사방을 떠도는 죽음과 관련된 말을 듣고 소년은 자라났다.
“이번에도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연락을 드린 겁니다.”
“그랬구나.”
어쩌지.
얘기를 들으니 한층 민망해졌다.
어떤 표정을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자 뒤따라오던 질과 눈이 마주쳤다.
질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또 민망해서 냉큼 시선을 피해 버렸다.
도착한 곳은 황제가 직접 귀빈을 접대하는 응접실인 모양이었다.
문부터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시종이 날 내려 주고 노크를 한 뒤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무척 단아한 여인이 함께였다.
그녀는 나를 보곤 빙긋 웃어 보였지만, 황제는 어쩐지 대단한 골칫거리를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선연할 정도로 대비되는 표정에 내가 머뭇거리자 황제가 고개를 까딱였다.
“편히 앉아라.”
아, 인사하는 거 깜빡했다.
“제국의 광영이신 태양을 뵙….”
“됐다, 됐으니 앉거라.”
황제는 뭔가 귀찮다는 듯 손을 가볍게 털어 내며 말했다.
‘너무 엉거주춤했나?’
사실 예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딱히 없었다.
힐 로즈먼트와 수업할 때도 예법은 꾸준히 해 나가야 하는 거라 천천히 해도 된다고 했었던 터라….
근데 내가 잠들었지.
“네에….”
내가 총총총 걸어가 생각보다 높은 소파에 끙끙대며 올라가 앉아 몸을 돌리자 황제가 나를 신기한 것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폐하?”
“…그 상도도 위아래도 없는 놈이 왜 끼고도는진 알 것 같군.”
황제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 드디어 그 귀한 얼굴을 다시 보는구나.”
어딘가 무척이나 지친 낯으로 황제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