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7
“어…, 네.”
귀한 얼굴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뭐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말이다.
“황자는 만났느냐?”
“네.”
“어떻더냐?”
“좋았어요.”
내 짧은 대답에 황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나를 유심히 보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로 인해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건 아느냐? 그 미친개를 막기엔 황실의 기사단으로도 부족하더구나.”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네가 내 아들을 살렸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어디 말해 보거라.”
“원하는 거요?”
지금은 딱히 없는데.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몇 차례 문지르며 다리를 구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그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럼 나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거라.”
“음, 그러면 황성에 자주 놀러 와도 돼요?”
“황성에?”
“네, 에노쉬… 아니, 황자님이랑 릴리 언니 보려고요.”
황실에 들어오는 것은 황족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나가기 전에 시종장에게 통행증을 받아 가거라.”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줬던 노시종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빙긋 웃었다.
‘시종장이었어…?’
황실 시종장이라면 상당한 계급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 조금 신기했다.
황제의 말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에 있던 여인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나. 나는 에노쉬의 엄마 되는 사람이란다.”
역시 황후였구나.
아름다운 루비빛 눈동자를 품은 그녀는 남색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무척 단아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눈매도 다정했으며 옛날 에노쉬랑 비슷하게 피부가 창백했다.
“에노쉬를 살려 주어서 고맙구나. 나는 그다지 힘이 없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네!”
“후후, 옛날부터 타인에겐 쥐뿔도 관심이 없었던 에탐 공자가 왜 그대를 그렇게 싸고돌았는지 알 것 같구나.”
“네?”
“반항기 심하고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그대가 있어 에탐 공자가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는 모양이야.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말이지.”
좋은 부모는 열 살짜리에게 수십억과 가주직을 넘겨주진 않는답니다.
다시 생각해도 부담스러웠다.
“콜린 공작이 그렇게 에탐 공자에게 그대를 맡기는 걸 반대했던 이유도 알 것 같고.”
그녀는 무척 다정한 얼굴로 웃으며 편안하게 말했다. 에르노 에탐과 콜린 공작을 편안하게 말하는 게 조금 놀라웠다.
내 의아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으니 알고 있지. 폐하께서도 비슷한 시기에 다니셨었고.”
아,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그렇지 않으면 암살자를 밤에 보냈는데도 봐줄 리가 없겠지?
“네가 가주가 되었다고 들었다.”
“아, 네…….”
“그놈은 예전부터 아주 미친 짓만 골라 했다. 정상적인 사람이 저런 미친 짓을 하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미친 짓만 해댔지.”
황후의 말을 듣던 황제가 끼어들었다.
“네에….”
근데 왜 아빠를 욕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까면 까는데, 남에게 까이니 조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번 일은 내가 본 미친 짓 중에서도 끝판왕이구나.”
물론, 이 말에는 동감한다.
세상에 어느 공작 가문이 열 살짜리에게 가주직을 넘겨주겠는가.
그것도 제 아버지에게 사기까지 쳐 가면서.
“그래도…, 이번 선물은 네가 가주가 되어서 줄 수 있게 됐구나.”
“선물이요?”
“그래, 제국 남쪽에 있는 영지를 네게 주마. 토지가 가장 비옥하고 휴양하기도 좋은 데다가 다양한 과일이 특산품인 영지지.”
황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시종장이 뭔가를 챙겨서 가지고 나왔다.
돌돌 말린 고급스러운 양피지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시종장이 내게 양피지와 직인을 내밀었다.
“어…, 가,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대의 아비가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조만간 쳐들어갈까 봐 그냥 내가 내어 주기로 한 거다.”
“아…….”
도대체 아빠의 이미지는 세간엔 어떻게 비치고 있는 걸까?
내가 어색하게 웃자 황제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이런 순한 게 그놈에게 갔는지 모를 일이군. 아니, 차라리 너처럼 말랑한 것 정도가 붙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네?”
내 반문에 황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혼잣말이다.”
“네에.”
“드래곤에게는 혜안이 있다더니, 그대가 그 벌레가 깃드는 병을 미리 감지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군.”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멋대로 오해를 해 주니 그렇다고 해 두자.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짧게 숨을 뱉었다.
“그대의 주변엔 앞으로 폭풍이 일 거야.”
피곤하게만 보였던 황제가 돌연 표정을 굳힌 채 말문을 열었다.
“에르노 에탐을 비롯한 에탐 가문이 그대를 필사적으로 지키겠지만, 그럼에도 호시탐탐 그대를 노리는 손길이 사방에 있을 거다.”
“…….”
“그대는 앞으로 인간의 추한 민낯을 보게 될 거고 탐욕이 서린 호의를 받게 될 테지.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단호했으며 또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마주 보았다.
“에탐 가문이 아직 어린 그대를 가주로 세운 건 아마 그래서일 확률이 높지. 에탐의 가주를 건드린다는 것은 즉, 그 괴물들과 전쟁을 벌이고 싶다는 뜻이 될 테니까.”
나는 그를 보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각오하라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소설에서만 봐도 드래곤은 늘 폭풍의 중심에 있지.’
황제가 설핏 웃었다.
“그대는 앞으로 모르는 게 죄가 될 거야. 그러니 많이 배우게. 힘의 흐름을 알고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네.”
“에탐 가문이 그대가 눈을 뜬 것을 계기로 본가로 직계와 방계 할 것 없이 전부 소환했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의 방이랑 본 저택에서 나가지 않아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에탐 가문은 직계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방계 역시 만만찮은 무력과 힘을 가지고 있어 무시할 수 없네.”
그랬던가?
하긴, 나중에 정쟁물로 변했을 때, 여주인공과 함께 싸우는 이들이 에탐 가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반역은 이제 일어나지 않겠네.’
2황자가 살았고 황제는 미치지 않았으니 스토리가 이상한 곳으로 흐를 일도 없어졌다.
“그들이 화가 나면, 아마 작은 나라 하나가 쑥대밭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그 정도란 말이야?
사실 주먹 한 번으로 테이블을 부수는 미르엘 공작을 보면 그다지 신빙성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는데….’
사실 칼란이나 실리안도 몸을 쓰는 걸 잘 보지 못했고 말이다.
“뭐, 잔소리는 여기까지만 하지. 나는 기왕이면 그대와 아주 오래 잘 지내고 싶으니 말이야.”
방금까지와는 달리 가볍게 웃는 황제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부탁이요?”
“그래, 부디 악룡이 되지는 말아 주게.”
악룡?
내가 의아한 낯을 했지만 황제는 설핏 웃을 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슬슬 방해꾼이 오겠군.”
“방해꾼이요?”
“그래, 그대의 아비 말이야. 황성으로 들어온 것 같다.”
“아하….”
아빠가 온다는 소식에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왜 기분이 이렇게 좋은지 모를 일이다.
“각인해서 그런지 말만 들어도 아비가 좋은 모양이야.”
“네?”
“에르노 에탐이 네 각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5년을 네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단다.”
각인은 또 뭐고 달라붙어 있었다는 건 또 뭐지?
“뭐든 금방 싫증 내는 놈이 놀라울 일이지.”
쾅―
문이 열리고 에르노 에탐이 들어왔다. 정말 거칠 것 없이 제멋대로인 방문이었다.
“자네는 여전히 예의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황제의 말에 에르노 에탐이 힐긋 그를 보곤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위대한 제국의 광영이신 태양을 뵙습니다.”
에르노 에탐의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왜 비꼬는 것처럼 들릴까?”
“뭐 귀엔 뭐만 들린다고 하더군요.”
“…그대는 황족 모독죄로 죽었으면 이미 오백 번도 더 죽었을 걸세.”
“안 죽고 살아 있군요.”
“…….”
황제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아빠는 자연스럽게 들어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잘 놀았니? 따님.”
“네.”
“다행이구나, 그럼 이만 돌아가자.”
아빠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는 체통도 벗어던지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