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0
“…….”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밝히는 건데?
내가 폭삭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보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각인은, 진짜 혈육을 이기지 못한다던데…, 아가씨께선 진짜 부모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야겠어요.”
그 의도를 모르겠는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다시 순박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까진 준비해 놓길 바라요.”
“유의미한 성과를 기대할게요.”
내 말에 그가 싱긋 웃으며 문을 열었다.
쿠당탕탕-!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야야…….”
바닥을 대차게 구른 그가 뒷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이건 정말 아파 보였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뒷머리를 꾹 눌렀다.
‘진짜 다친 거 아니야?’
나는 손수건에 근처에 있던 찬물을 쏟아붓고 그대로 달려가 그의 머리통에 손수건을 착 붙였다.
축축한 손수건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아가씨?”
“혹 났을까 봐….”
말해 놓고도 멍청한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손수건을 안 짜서 물이 줄줄 흘러 그의 옷을 다 적셨다.
“미안.”
“흠….”
힐 로즈먼트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당신을 납치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겠네요.”
호의를 베푼 나를 돌려 까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머리를 보니 조금 부은 것도 같다.
“손수건 가져가. 그리고 일부러 넘어지는 건 그만둬, 아프잖아.”
굳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힐 로즈먼트는 내가 준 축축한 손수건을 손에 쥐고 날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약속한 물건이나 제대로 준비해 주세요.”
멀어지는 그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다들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지 모르겠네.’
힐 로즈먼트도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다.
‘언젠가 모두의 품에 고양이를 한 마리씩 안겨줘야지.’
고양이는 최강의 힐링 동물이니까 말이다.
혀를 끌끌 차며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린.”
“아빠.”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선생님 배웅했어요. 아빠는요?”
“널 데리러 왔단다.”
에르노 에탐이 웃으며 허리를 굽혀 나를 들어 안았다. 내가 익숙하게 품에 안기자 그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어디 가는데요?”
“회의, 네가 가주가 됐으니 소개해 줄 사람이 많아서 말이다.”
“그거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진짜다.”
“폐하께서 주신 영지도 있잖아요.”
그것만 관리해도 머리가 아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 그쪽도 관리인을 뽑을 예정이다. 오늘 소개받은 후 네가 뽑아도 좋고.”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옆에서 도와줄 테니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말거라.”
갑자기 에탐 가문을 줘 놓고 뭘 부담 가지지 말래?!
에탐 가문이 어떤 가문이던가.
제국의 기둥을 짊어지고 있는 가문 중 하나가 아니던가.
없는 것은 인성뿐이라고 할 만큼 자금, 권력, 명예 모든 것을 가진 가문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갑자기 대기업 회장이 된 거잖아.’
열 살짜리 회장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연일 신문 헤드라인에 보도됐을 거야.
“근데 왜 저 준 거예요? 가주직이요. 제가 드래곤인 거 모를 때도 주려고 했다면서요.”
일전에 에르노 에탐이 내게 원래 줄 예정이었다는 말을 했었다.
“네가….”
그가 느긋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가주직이라도 주면 집을 나갈 생각을 안 하지 않을까 싶어서.”
“……네?”
“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네가 우리를 진짜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단다.”
“우리요…?”
마치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그래, 칼란과 실리안에게도 물어봤었지.”
“다른 가족들도 있잖아요. 아버지 형제라든가….”
에르노 에탐이 가소롭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그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다른 가족을 무시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패배자들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는 법이지.”
에르노 에탐이 말했다.
확실히, 아빠가 막내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유력한 후계자라 본 저택에서 살고 있는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좀 얄밉기도 했다.
‘근데 그걸 받아서 날 줬다는 거지….’
아마 아빠는 에탐 가문 사상 최단기간 가주직을 맡은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분들의 자식들도….”
“가주였던 내가 널 후계자로 삼고 물려줬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가 뻔뻔하게 말했다.
그렇지, 후계자를 정하는 건 확실히 가주의 독단적인 권한이었지.
‘할아버지 불쌍해….’
그렇게 사고만 치던 아빠가 드디어 물려받겠다고 해서 가주직을 넘겨줬더니 홀라당 내게 넘겨 버렸으니.
‘나를 볼 때마다 뭔가 못마땅한 눈을 하는 것도 이해는 해.’
나 같아도 내가 곱게 보이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어딜 간다는 거지?
아빠의 품에 안겨 도착한 곳은 회의실이었다. 일전에 왔던 곳보다 훨씬 크다.
아빠가 안으로 들어가자 웅성거리던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커다란 원탁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내가 당황해서 아빠의 옷자락을 꽉 붙잡자 그가 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 원탁의 가장 중심에 나를 앉히고 옆자리에 서자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며 앉아 있던 어른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원의 주인이신 가주님을 뵙습니다”
모두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전 가주인 에르노 에탐과 전전 가주가 된 미르엘 공작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눈동자만 굴리자 미르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고 하면 된다.”
“고, 고개를 들고 앉아 주세요…….”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내가 간신히 말하자 그들은 잘 훈련된 기사처럼 고개를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나를 보았다.
‘…뭘, 하라는 거야.’
나는 누구 앞에 서는 거 딱 질색이란 말이야.
옛날부터 조별 과제에서 자료 조사와 PPT 정리를 전부 맡았을지언정 발표는 곧 죽어도 피하고 싶었던 나다.
누군가의 앞에 서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전부 내가 뭔가를 말하면 들려오는 것은 침묵이거나 킥킥거리는 비웃음뿐이었으니까.
나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인생을 되는대로 살던 망나니 막내가 갑자기 딸을 입양했다고 해서 꽤 놀랐는데, 이거 참 귀여운 조카가 아닌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빠 옆에 있는 할아버지만큼이나 덩치가 있는 호쾌하게 생긴 남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가 아빠랑 똑 닮았다. 다만 그는 밖에서 오래 생활했는지 피부가 살짝 탄 듯 어두웠다.
그는 고개 숙여 인사했던 때와는 다르게 제법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빠가 살짝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선이 굵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 근데 조카라고?
“나는 차르니엘 에탐이라고 한다. 이놈들의 첫째로, 장남이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웃으며 자기소개를 해 왔다.
‘그럼 이 사람들이 전부….’
에탐의 직계나 방계라는 뜻이야?
[에탐 가문이 그대가 눈을 뜬 것을 계기로 본가로 직계와 방계 할 것 없이 전부 소환했어.]일전에 황제 아저씨가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다 불러 모았던 모양이다.
‘아빠가 날 위해서….’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이번에는 차르니엘의 맞은편에 있는 한 주먹 하게 생긴 여자가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야, 막내 주제에 귀염성이라곤 조금도 없어선. 저 혼자 일 다 끝내고 뒤늦게 사교계 소문으로나 듣게 하다니….”
부채를 탁, 접으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그 모습이 당당한 여장부라고 해도 이상할 곳이 없어 보였다.
“아, 난 넬리아 자르단이란다. 조카야. 장녀고 둘째야.”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그녀가 설핏 웃었다. 얼핏얼핏 보이는 팔엔 자잘한 근육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부채도 나무 같은 것이 아니라 묵직해 보이는 쇠로 된 부채로 보였다.
‘뭐야, 무서워.’
마치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듯 그녀는 부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손으로 가지고 놀았다.
“아, 뭐래! 이거 나만 이상해? 넬 언니, 아무리 그래도 겨우 열 살짜리 아이에게 덥석 가주직을 맡기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무슨 한미한 가문도 아니고 무려 에탐 가문의 가주잖아!”
넬리아 자르단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탁자를 확 치며 일어났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탐스러운 여자였다. 외모만 따지자면 솔직히 아빠 다음가는 미녀였다.
역시 아빠가 최고다.
새초롬하게 생긴 여자는 부채를 들고 있긴 했지만, 일반 부채였다.
‘…이 사람도 도마뱀이 취향인가?’
부채에 도마뱀 그림이 있는 것도 같다.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바싹 긴장해서 입을 꾹 다물자 한층 더 눈매가 매서워졌다.
“으음…. 뭐, 확실히 그건 좀 그렇지.”
“그렇지?! 아직 애라고? 좀 더 뛰어놀고 나돌아다니면서 쑥쑥 성장해야 할 애잖아! 애초에 아직 키도 제대로 못 컸다면서?”
“…….”
아픈 곳이 찔렸다.
키는 곧 큰다고 했는데….
내가 시무룩한 낯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자 나를 본 새초롬한 여자가 움칫 어깨를 떨었다.
“에잇, 너! 우리 영지에서 나는 우유랑 치즈를 보내 줄 테니 많이 먹도록 해! 얼른 쑥쑥 커야 경영을 하든 정치를 하든 하지! 최고급으로만 보낼 테니까 다 먹도록 해!”
여자가 부채를 쫙 펼쳤다.
그걸 보는 에르노 에탐의 표정이 구겨졌다. 넬리아 자르단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크레아? 그렇게 퉁명스럽게 굴 거면 일단 그 애들 장난감 같은 부채는 치워 버리는 게 어떻니.”
부채에는 내가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거울에서 본 내 어릴 적 도마뱀 모습이 말이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