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1
“난! 아크레아 사파일! 막내 바로 위의 누나야.”
성큼성큼 걸어온 아크레아 사파일이 내게 손을 쭉 내밀었다.
악수라도 해 달라는 모양새에 내가 엉거주춤 손을 내밀자 그녀가 냉큼 내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윽…, 생각보다 더 좋잖아.”
한참이나 내 손을 잡고 있던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에르노 에탐의 매서운 눈초리에 결국 자리로 돌아갔다.
“저 미친놈은 눈 치켜뜨는 게 어떻게 변하지도 않았어?”
“너도 뇌가 빈 게 여전하네.”
“누님이라고 제대로 호칭해!”
“멍청한 것만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성격이라서.”
에르노 에탐이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얼굴로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크레아 사파일이 삿대질을 하며 에르노 에탐을 노려보다가 이를 갈며 손을 내렸다.
“어, 아, 안녕…. 가주님. 난 하이엘 에탐이란다…. 차남이고 셋째야….”
“안녕하세요….”
굉장히 유약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품에는 검붉은 가죽 표지로 된 책을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몸도 호리호리했고 피부도 새하얬다. 그와 대비되게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옅은 물빛 눈동자와 검은색 머리카락이 무척 잘 어울렸다.
‘저 사람이 아빠보다 나이가 많다고…?’
동안도 이런 동안이 따로 없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둥그렇게 말려고 했다.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자 보고 있던 넬리아 자르단이 웃었다.
“아서라, 쟤야말로 우리 중엔 제일 몹쓸 놈이다. 한 번 열 받으면 뵈는 거 없어. 예전에 네 친부 때려잡았던 게…….”
“넬리아.”
에르노 에탐이 넬리아 자르단의 말을 끊었다. 넬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아, 네 뒤에 있는 양.아.빠 말고 그 개망나니 말이야.”
에르노 에탐이 내 귀를 가만히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러더니 뭐라고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넬리아의 손등에 힘줄이 툭 솟았다.
잔뜩 사나워진 얼굴로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귀를 그렇게 세게 막은 것 같지도 않은데….’
마법이라도 쓴 걸까?
‘궁금해.’
궁금한데 안 들려.
내가 끙끙 앓고 있으니 이내 귀가 뚫리며 귀를 덮었던 손이 멀어졌다.
“허참, 진짜….”
넬리아 자르단이 헛웃음을 삼켰다.
“어쨌든 쟤 열 받으면 가게 두어 개는 그냥 부수니까 상대하지 마라.”
“누니이임…!”
하이엘 에탐이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울먹거리는 얼굴이 퍽 귀엽다.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았다.
“뭐, 자기소개는 대략 끝났고…. 아, 너 아직 안 했니? 크루노.”
크루노?
귀에 익은 이름에 고개를 들자 한쪽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곱슬기가 느껴지는 새까만 단발에 탁하고 어둑한 푸른색 눈동자의 남자였다.
정확히는 깊은 심해에 닿은 듯한 아주 짙은 남색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들이 생기가 있는 눈이라면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탁하고 생기가 없는 시선이었다.
그야말로 무감정한 시선이었다.
새까만 옷을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남자는 새하얀 성직자를 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성경책처럼 보이는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크루노 에탐이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느리게 입을 열었다. 사막에 굴러다니는 모래알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였다.
버석버석한 나뭇잎을 밟으면 저런 바싹 마른 느낌이 드는 걸까?
‘저 사람, 나 싫어하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나는 알겠다. 그의 시선에서 나에 대한 경멸이 느껴졌다.
“아, 저 음침한 자식은 열외로 둬도 돼. 청소년기 들고부턴 계속 저 상태였어.”
“아….”
“결혼도 안 하고 신전에 들어가더니 지금은 추기경이야. 아마 이번 모임도 오기 싫은 거 억지로 왔겠지. 에탐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그런 거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차르니엘 에탐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옆에는 섬뜩할 정도로 잘 벼려진 커다란 대검이 놓여 있었다.
“그래, 할 일이 없어서 우릴 불러 모은 건 아닐 테고…. 역시 안건은 새 가주님 때문인가?”
“그래, 이것들아. 어째 아비한테 인사를 하러 오는 놈들이 없냐. 진짜 자식 농사라곤 대차게 실패해선…….”
“어머니께 그 말 전해 드리면 아마 도끼 들고 뛰어오실 겁니다.”
차르니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미르엘 에탐이 눈을 사납게 치켜뜨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래. 소문은 나도 들었다만, 새 가주님이 드래곤이라는 게 정말이냐?”
“그래.”
“믿기질 않는군, 초대가 드래곤의 피를 먹은 것으로 에탐 가문에도 드래곤의 피가 흐르게 됐지만, 실제로 드래곤이 태어난 적이 없잖아?”
“드래곤이 직계도 아니고 그 개망나니 핏줄에서 태어났다는 게 난 더 신기한데.”
그건 나도 신기해.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 신기한 시선으로 이들이 나를 보았다.
“아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니?”
넬리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고자 한다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친자 검사는 해 봤나?”
“아직.”
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쓰러지고 기절하고 이번에는 긴 잠까지 잤으니 딱히 하진 못했지.
“개망나니는?”
“누가 숨겨 주고 있는 것 같아. 흔적이 뚝 끊기더니 사라졌다.”
“그거참, 난감하네.”
차르니엘은 턱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즉. 여기 우리 각성하신 어린 가주님을 지켜야 한다, 이거지?”
“그래.”
“방계라 한들 혈육인지를 확인하지 않고 비호를 받게 할 수는 없을 텐데.”
건조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크루노 에탐이었다.
“그를 붙잡아 와서 친자 검사를 먼저 하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우리 셋째 형님께선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
에르노 에탐의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심기가 대단히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론을 말한 것뿐이다.”
“내 앞에서 언제 정론이 필요했나?”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차르니엘 형님.”
“그건 그렇지.”
차르니엘이 크루노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이들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병을 움직이려면 근거가 필요하니까 말이야.”
그의 굵직한 손가락이 느리게 탁자 위를 쓸었다.
“하지만, 그 개망나니가 실종 상태이니, 당장 확인할 순 없지. 찾을 수 있겠나, 하이엘?”
차르니엘이 물었다. 바짝 목을 움츠린 하이엘이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
“당장은 이 정도로 됐나, 크루노?”
크루노 에탐이 건조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르니엘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뭐, 드래곤인 어린 가주님을 모시게 된 것은 처음이지만…, 잘 부탁하겠습니다.”
차르니엘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엉거주춤 손을 내밀자 몸이 불쑥 뒤로 당겨졌다.
“에이린, 저런 더러운 것엔 손대면 안 된다.”
내가 당황해 차르니엘과 아빠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내밀었던 손을 내리고 웃었다.
아빠가 하지 말라는데 하지 말아야지.
“……내가 더럽나?”
“뭐, 우락부락한 걸 보면 아무래도 애들이 좋아할 상은 아니지.”
“말이 심하군, 우리 애들은 나 좋아한다.”
“그야, 걔네는 우락부락한 오빠 얼굴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렇겠지?”
아크레아 사파일이 말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차르니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티격태격하며 싸우던 시선들이 동시에 내게 몰렸다. 그들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문을 망치지만 말라고.”
“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도 잘 봐 두는 게 좋을 거야. 우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도와주는 가신이나 방계들이니까 말이야.”
차르니엘의 말에 나는 천천히 주변을 보았다.
원탁에 앉은 이들을 제외하고도 가주를 보러 온 사람은 많이 있었다.
눈에 익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원탁 주변으로 늘어선 이들을 나는 천천히 눈에 담았다.
누군지 알 재간은 없었지만 말이다.
‘눈도장만 찍어 두라는 거겠지.’
정말 내가 가주가 된 모양이었다.
구렁이 담 넘듯 순식간에 말이다.
‘이참에 일단 ‘하타르’에 대해서 말을 해 둘까?’
이만한 인원이 모이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니까.
“슬슬 그럼 파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떤가? 오랜만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서.”
“아, 나도 의상실 예약해 뒀어.”
“나도 서점…….”
차르니엘과 아크레아, 그리고 하이엘이 연이어 말했다.
곧 자리가 파하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고민 끝에 살짝 손을 들었다.
“저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사람들이 내 부름에 우뚝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