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2
쏟아지는 시선들이 조금 버거웠다. 금수들 사이에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왜 황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탐 가문은 직계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방계 역시 만만찮은 무력과 힘을 가지고 있어 무시할 수 없네.] [그들이 화가 나면, 아마 작은 나라 하나가 쑥대밭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정말 이 사람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눈빛은 사람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은 욕심이 많아서 에탐 가문도 탐욕이 있다는 설정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손에 쥔 것들만 봐도 그들이 대충 무슨 욕심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았다.
불확실한 건 넬리아 자르단과 아빠 정도였다.
“왜 불러놓고 말을 안 해?”
인내심이 가장 없는 아크레아 사파일이 먼저 불만을 토했다.
“아….”
다른 생각하느라 잠깐 깜빡했다. 내가 불렀지, 참.
“그….”
내가 입을 열자 모두가 내게 집중했다. 수십 쌍의 시선이 닿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킥킥, 쟤 봐. 벌벌 떨면서 말하네, 뭐라는 거야? 들리는 사람~?] [쟤가 하는 말은 왜 다 개구라 같은지 모르겠어.] [차미소!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제대로 발표 못 해? 뭘 하는 거야! 너는 과제 평가 0점이야, 0점!]내가 말한다고 해서 결국 아무도 믿지 않으면 어쩌지?
사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소설과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갈지도 모르잖아.
괜히 설레발을 치는 게 아닐까?
그냥 다음 수업 때 힐 로즈먼트에게 증거를 받고 그 뒤에 정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새하얗게 번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고개를 막 저으려는 때였다.
무릎 위에 올라가 있는 내 벌벌 떨리는 손등을 누군가가 커다란 손으로 덮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의 온기에 눈이 절로 커졌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자 아빠가 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손등을 느리게 토닥거리는 손길에 천천히 진정됐다.
‘괜찮아.’
이제 나는 그 집에 있지도 않고 그 세계에 있지도 않으니까.
나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처음은 단순히 무슨 말을 해도 비웃거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툭툭 끊기게 돼 가족 대화에 끼지 못하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가족 간의 대화에 끼지 않게 됐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무시당할 테니까.
어느 날, 발표 도중에 실수로 말을 더듬었다. 남동생들이 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내고 있을 때였다.
어쩌면 작은 불행이었다. 그런 소문을 들은 학생 중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학생이 나와 같은 반이었던 불행.
그 아이가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내가 실수로 더듬었던 말을 괴상하게 따라 하며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남동생들의 악의적인 소문과 함께 부풀려진 작은 악의는 순식간에 학교 전체를 뒤덮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모두가 비웃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생활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래도 발표는 무리였다.
대학교에 가서도 달라진 건 없었고.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빠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든든해졌다.
내가 말하지 않고 새하얗게 질려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비웃지 않는다.
그저 걱정스럽고 진지한 낯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다.
‘여긴 학교가 아니야.’
하물며 대한민국도 아니고 저주스러운 남동생이 있지도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물처럼 투명하게 생겼는데 단맛이 나는 음료가 있으면 절대로 마시지 마세요.”
“물처럼 투명한, 단맛이 나는 음료?”
“네.”
“그게 뭐야, 그런 음료가 있었나? 나는 들어본 적 없는 음룐데, 어디서 봤니?”
넬리아 자르단이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아직은 양지로 드러날 때는 아니니까요….’
처음엔 아주 밑바닥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하층민을 공략해 자연스럽게 중독자를 늘려 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서민들의 음료로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유명해지면 결국 귀족들 사이에도 퍼지겠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땐 이미 나라의 반은 기능을 멈추고 말 것이다.
물론 이번엔 황제가 눈 뜨고 당하고만 있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에탐 가문 내에선 피해자가 최소한인 게 좋으니까.’
원작에선 이 사건으로 에탐 가문이 황성에 등을 돌리지만, 그건 에노쉬가 죽었을 때 얘기고.
이번 사태를 제대로 막으면 아마 반귀족파도, 제국을 넘보는 나라도 한 번에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시장에 나오진 않았어요.”
“그럼?”
“그냥… 곧 그럴 거예요.”
넬리아 자르단이 쇠로 된 부채로 제 턱 밑을 가볍게 긁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드래곤의 혜안이니?”
“네.”
일단 그런 걸로 해 두자.
“그렇군, 흠…. 정보 들은 거 있어, 하이엘?”
그녀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창백한 낯의 하이엘 에탐이 책을 끌어안은 채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건가?”
“지금 돌고는 있는데, 아직 많이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곧 시장에 돌 거라는 말이지?”
넬리아 자르단이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내가 책임지고 유통을 막아 보지.”
“네?”
“그녀는 제국 최고 상단인 자르단 상단의 상단주란다.”
내가 의아해하자 에르노 에탐이 머리 위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아, 어쩐지 화려하진 않은데 값비싸 보이는 금속 장신구나 보석류가 많이 보인다고 했더니….
넬리아 자르단의 ‘탐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오만하게 웃으며 부채를 탁 펼쳤다.
‘근데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추궁 같은 것을 당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네요…?”
“응? 뭘 물어야 해?”
“이유라든가….”
넬리아 자르단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이나 웃더니 결국은 눈 밑을 손수건으로 콕콕 눌러 닦기까지 했다.
“…넬리아 누님.”
에르노 에탐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아니, 귀엽잖아. 세상에. 이런 가주님이 세상에 어디에 있었어.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님도 독선 그 자체였잖아. 이유 안 물어봤다고 이렇게 울상일 필요가 있느냐고.”
넬리아가 나를 보더니 다시 얼굴을 박고 웃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무서워졌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린, 에탐 가문 가주의 명령은 직계나 방계에겐 절대적이지. 그리고… 아버지는 의문이라도 품으면 크리스털 재떨이를 돌려주었다.”
차르니엘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상체를 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미르엘 공작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차르니엘을 노려봤다.
“괘씸한 패륜 놈들, 입 안 다무느냐?”
“알겠습니다.”
차르니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우리 가주님이 이렇게 불안해하시는데 물어봐야지. 그 음료가 뭔데 그러니?”
“중독성이 있는 약이에요.”
“중독성이 있는…?”
“네, 처음엔 맛있는 음료 같아요. 값도 저렴하고 생각날 때마다 사서 먹어도 되는 정도예요.”
내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오로지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생소한 기분이었다.
“은은한 중독성이 있어서 나중에는 버릇처럼 먹게 될 거고 그렇게 유명해지면 귀족 사용인들에게까지 퍼지죠.”
내 말을 듣던 넬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낀 미르엘 공작도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면 귀족 사교계에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에요.”
“그렇겠구나.”
아빠가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목소리를 들으니 한층 더 안심이 됐다.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정말 꿈같아.’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만 이뤄져서, 아니 바라던 것 이상으로만 이뤄져서 솔직히 두려울 정도였다.
“사실 처음엔 그냥 음료 같고 먹지 않아도 단순히 조금 생각이 나는 정도라서 의심하기 힘들어요.”
내 말에 차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 흔했던 음료가 점점 품귀 현상이 일어나면서 가격이 치솟을 거예요. 거기서 문제가 생겨요.”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겠군.”
“네. 먹지 못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금단 증세가 심해져서 발작도 일어나고 그래요.”
음료가 저렴할 때는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냥 마시면 됐지만, 그게 틀어막히는 순간 난감해지는 것이다.
미리 정보를 듣고 사재기를 해 두거나 웃돈을 주고 구매하는 것은 예삿일이고 음료가 남은 사람과 남지 않은 사람이 대립해서 폭동이 일어나거나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인들 사이로 도는 건 내가 어떻게 틀어막을 순 있겠어. 뒤쪽이라면 조금 난감할 것도 같지만.”
넬리아 자르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은 힐 로즈먼트가 있으니 충분했다.
“그러니까 음식을 하거나 물이나 음료를 마실 때 제가 말한 것과 같으면 버려 주세요.”
“알겠다.”
차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각별히 주의하도록. 이 건에 관해선 조금 더 알아보고 대비한 뒤 다시 한번 회의를 여는 게 좋겠어.”
차르니엘의 말에 미르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해산하지.”
마지막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원의 축복이 있으시길.”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바짝 긴장해서 말하자 어딘가에서 “귀여워.”라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인파가 순식간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크루노 에탐이 가장 늦게 나를 흘겨보곤 몸을 돌렸다.
그 서늘한 눈빛을 보는 순간 떠올랐다.
크루노 에탐이 누구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