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4
“아빠, 나는 언제쯤 자랄까요?”
밤이 되어 잠이 들기 직전, 나는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물었다. 얼른 키가 크고 싶었다.
몸이 작으니 마음도 작아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드래곤은 애정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다는데 확실히 이상하긴 하구나.”
에르노 에탐이 의아하게 말했다.
헉,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나는 급히 반문했다.
“뭐가요?”
“내가 널 이렇게 생각하는데 자라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아, 네.
너무나도 당당한 말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나는 히히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좋았다. 몸에 닿는 온기도 좋고 팔베개를 해 준 것도 좋다.
“얼른 자라면 좋겠어요.”
“그럴 거야.”
그가 단언하듯 말했다.
에르노 에탐의 말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잘 자렴.”
“아빠도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훌쩍 키가 커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잠들었다.
그랬는데….
헉!
‘정말 커졌잖아.’
몽롱한 낯으로 눈을 뜨자 침대 근처 거울에 불쑥 커진 내가 보였다.
‘팔다리가 쑤셔….’
누가 밤새 고무줄처럼 팔다리를 쭉쭉 늘여 놓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불쑥 큰 키는 이제야 좀 열 살짜리처럼 보였다.
나는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봤다.
“역시 귀엽다.”
아무리 봐도 솜털이니 반죽이니 이해할 수 없는 별명들이다.
한층 짙어진 황금빛 눈동자는 아름답기는 한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아서 살짝 기이하게도 보였다.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슬슬 한 가지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느껴졌던 탓이다.
‘아무래도 내 능력은 ‘생각’이나 ‘염원’인 거 같은데.’
에노쉬와 지하 옥션장에 잡혔을 때도, 아버지가 아팠을 때도 나는 언제나처럼 속으로 생각하며 소원했다.
누군가 도와주기를, 아빠가 더는 아프지 않기를, 에노쉬가 건강해지기를.
자기 전에도 마찬가지로 얼른 성장하길 바랐다.
그 결과 내가 바라던 것이 이뤄졌다.
‘드래곤에 대해서 알아봐야 하는 걸까?’
겨우 상상만으로 소원이 이뤄진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실험해 볼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소원을 빌지?
‘목이 마르니까 물이 생겼으면 좋겠어.’
실제로도 갈증이 조금 났다. 내가 그렇게 소원을 비는 순간 쏴아아아,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에 커다란 물줄기가 솟아났다.
후두둑.
“어…?”
그리고 하늘로 솟아오른 물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해 방을 흠뻑 적셨다.
이건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만 비였지, 이윽고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래, 물이 곱게 덩어리처럼 생긴 게 아니다.
무슨 지하수라도 터진 것처럼 그냥 바닥에서부터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 이게 뭐야?!”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은 이미 흠뻑 젖은 후였다.
“자, 잠깐. 그만! 그만!”
내가 허둥지둥 손을 들었다.
“그, 그만 내려!”
그 순간, 솟아나던 물줄기가 그대로 뚝 멈췄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것이다.
찰박, 찰박.
카펫을 흠뻑 적시다 못해 웅덩이가 졌다. 발이 닿는 곳마다 축축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가씨!”
내 소란을 들었는지 로랑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가 물난리가 난 방에 입을 떡 벌렸다.
“미, 미안해. 이거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세상에, 아가씨. 어디 안 다치셨어요? 아프신 곳은요?”
로랑이 제 치맛자락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았다.
“흠뻑 젖으셨잖아요, 감기 걸리겠어요. 일단 다른 방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 편이 좋겠어요.”
비에 젖은 생쥐 같은 꼴인데도 그녀는 서슴없이 내게 닿아 왔다. 방 안의 꼴에 말문이 막혔을 텐데 묻지도 않는다.
그 새삼스러운 행동에 조금 놀라서 멍하니 있자 그녀는 연신 걱정스러운 낯으로 옆방의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나를 넣어 주었다.
“사고, 쳤는데 화 안 내네…?”
“화요? 화를 왜 내겠어요. 원래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다양한 걸 경험해 보고 싶어 하잖아요. 아가씨도 그냥 그랬던 거죠?”
“…응.”
그냥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네, 뒷수습은 어른들이 할 거예요. 아가씨는 그냥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라 주시면 됩니다.”
로랑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표정 하지 마세요. 속상해요.”
“…응, 알겠어.”
“어? 근데 아가씨 좀… 자라셨네요?”
“일어나니까 이랬어.”
로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태 안고 오면서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한데.
100cm도 채 되지 못했던 다섯 살이 못해도 체감상 30cm는 더 컸을 텐데 말이다.
“아가씨.”
로랑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응?”
“하, 벌써부터 혼담이 들어오면 어떡하죠? 저는 아가씨 못 보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허리춤에 작은 키링이 달랑거렸다.
‘저건… 드래곤…인가?’
아닌가?
아주 작은 날개가 달린 작은 도마뱀이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드래곤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 인형 뭐야?”
“네? 아앗, 이건…. 그, 그냥 인형이에요.”
“나 닮았네?”
내 말에 로랑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솔직히 종종 비슷한 물건들이 보일 때마다 신경이 쓰였던 참이다.
“로랑이 만들었어?”
“아, 아니요….”
“그럼?”
“그게……. 으앙,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금방 다른 시녀 불러드릴게요!”
로랑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내 우는 시늉을 하며 순식간에 욕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새 시녀가 들어왔다.
‘대체 뭐람….’
시녀들도 갑자기 커진 나를 보며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래도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이 있었는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내 목욕을 도와줬다.
몸을 씻고 밖으로 나가자 침대에 앉아 있던 에르노 에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퐁퐁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방이 물바다가 됐다고 들었다.”
그렇게 말하며 내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시녀를 한번 보자 눈치 빠른 시녀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몸은 괜찮니? 춥진 않고?”
“네…. 죄송해요, 엉망으로 만들어서.”
“괜찮다, 그게 문제는 아니니까.”
에르노 에탐이 나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냥…, 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능력?”
“생각하면, 다 이뤄져서…. 정말 그런가 해서…. 갈증이 나니까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한 것뿐인데…….”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대리석 바닥에서 물이 솟아났다.
제어되지 않은 물이 쉬지 않고 쏟아져 방은 물바다가 됐고 비싼 장식이나 집기, 침대도 전부 쓸 수 없게 됐을 것이다.
“그래, 일단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에르노 에탐이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제어가 안 되는 모양이구나.”
“…잘 모르겠어요.”
“마법을 쓸 때의 기본은 상상이란다.”
“상상이요?”
“그래, 바람으로 칼을 만들고 싶다면 얼마나 날카롭게 벼리고 싶은지, 무엇을 자르고 싶은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으면 좋겠는지를 네 생각보다도 조금 더 정확하게 생각해야 해.”
나는 물을 마시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어떤 형태의 물을 마시고 싶단 생각을 하진 않았다.
‘물잔에 담긴 물을 생각했어야 한다는 걸까?’
한번 다시 시험해 보고 싶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번 해 보겠느냐?”
“하지만….”
“잘못된다면 이번엔 내가 막아 주마.”
그러고 보니 에르노 에탐은 뛰어난 마법사였다.
다만 그보단 사이코적인 기질과 검을 쓰는 모습이 더 두드러져서 잊고 있었다.
“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에 물잔에 담긴 물을 떠올렸다.
‘물 한 잔만……, 나는 물 한 잔만 마시고 싶어.’
“에이린.”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혹시 뭔가를 잘못했나 싶어서 목을 움츠릴 때였다.
“눈을 떠 보렴.”
커다란 손이 등을 도닥거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는 허공에 둥둥 뜬 물잔이 있었다.
“와…!”
내가 손을 뻗자 물잔이 가까워졌다. 꼴깍꼴깍 마시자 정말 시원한 물이었다.
“내 따님은… 아무래도 천재인 모양이야.”
“네?”
“상상을 바로 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그가 기특하다는 듯 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 칭찬에 입가가 헤실헤실 풀어졌다.
괜히 콧대가 쭉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고작 하룻밤 새에 이렇게 자라 버렸구나.”
그가 나를 높이 안아 올리며 말했다.
“곤란하게 됐어.”
“…왜요?”
“벌써부터 날파리가 꼬일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그가 웃었다.
“따님.”
“네.”
“아빠랑 평생 살까?”
에르노 에탐이 제법 진지하게 물어왔다.
“어…, 아뇨.”
“…….”
그는 내 대답에 충격을 받은 듯 잠시 굳어 있었다.
“싫어?”
“…어, 네…….”
“왜지?”
“…연애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으니까요……?”
뚝, 어딘가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지만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래?”
“네…, 그래도 아빠가 제일 좋아요.”
내 말에 에르노 에탐의 굳었던 낯이 살짝 풀어졌다.
“그래, 세상에 굳이 남자가 존재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그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