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7
기껏 이 먼 세계까지 와서 생긴 가족인데 누구 하나 잃고 싶지 않았다.
뭣보다 크루노 에탐을 보고 있으니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렸던 내 모습이.
“그렇잖아요.”
“허튼소리.”
크루노 에탐이 나를 떼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떼어 놓고…….
“…안 떨어지나?”
“응.”
그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는 생각보다 그의 목에서 잘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크루노 에탐은 생각보다 근력이 있었다. 내가 떨어지질 않자 그는 결국 팔을 들어 내 엉덩이를 받쳐 주었다.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아니, 괜찮네. 자네에게 제법 귀여운 조카가 있었군. 행복하겠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 죄는 늘 그대의 곁에 있음을 잊지 말게. 자네는 타인을 밟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네.”
대신관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고행은 제대로 끝내지 못했으니 며칠 뒤에 다시 하도록 하지.”
“예.”
대신관은 내게 시선을 돌려 웃었다.
“추기경의 조카께서도 신전을 꾸준히 다니실 마음은 없으신지요? 태생을 바꿀 순 없으나 더러운 몸과 마음은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무례한 말에 아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대신관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없는데.”
“그럼 부디 추기경에게는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그가 타락해 버리면 곤란하니까 말입니다.”
“응, 싫은데.”
“…….”
내가 어린애처럼 대답하자 대신관의 눈에 얼핏 짜증이 서렸다.
“에탐 가문은 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게 좋겠습니다.”
“응, 아닌데.”
“예의의 기본조차 몰라서야….”
“그것도 아닌데? 네가 예의를 갖추지 않으니까 내가 예의를 갖추지 않는 건데.”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공작의 작위는 대신관과 비슷하거나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신관은 명백히 나를 무시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가주인 것을 모르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특하고 더러운 존재가 우리를 홀리려고 드는군. 정신 제대로 차리게, 크루노 추기경.”
“……예.”
그는 나를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좀 떨어져라.”
“싫어요.”
“좀…!”
크루노 에탐이 나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그래도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걸 떼어 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삼촌, 아프지 마요.”
“…….”
“내 탓이 아닌 걸 내 탓이라고 돌리는 순간, 세상이 불행해져요. 숨을 쉬는 것조차 죄스러워져서…… 사실 그렇지 않은데, 정말 그런 것 같아져요.”
내가 그랬다.
태어난 것이 아주 큰 죄악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뇌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에르노 에탐은, 아니 아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도 사랑해 준다고 했다. 이유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건 내가 진짜 부모님에게 바랐으나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던 말이다.
“……너, 종알종알 시끄럽다, 당장 돌아가라.”
“내가 장담하는데, 삼촌이 가족들에게 힘들다고 하면 모두 차를 내오면서 삼촌 얘기를 들어 줄걸요.”
그의 눈이 설핏 찌푸려졌다. 그가 누굴 떠올렸는지 알겠다.
아하, 한 사람 빼고.
“아빠 빼고요.”
덧붙이자 그의 표정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아빠가 가족들에게 무슨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마세요.”
나는 그의 목에 매달린 채 눈을 감았다.
‘삼촌의 몸이 다 나았으면 좋겠어.’
염원하자, 그것은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온몸에 울긋불긋하던 상처가 사라지고 오래된 상흔마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크루노 에탐의 눈이 커졌다. 그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대신관을 보았다.
“삼촌이 싫어하니까 오늘은 가고 내일 올게요.”
“너…….”
“아, 또 상처 나면 다시 치료할 거니까.”
내가 그렇게 선고하며 활짝 웃자 크루노 에탐이 악동이라도 마주한 낯으로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대신관 아저씨.”
“……뭐라고?”
“삼촌 또 때리면…….”
나는 히죽 웃었다.
에탐 가문이 크루노 에탐 때문에 신전에 제법 거액의 기부금을 주고 있는 사실은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다.
“앞으로 기부 안 해.”
“추기경의 조카께서는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군요! 겨우 아이 하나 때문에 에탐 가문이 기부금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응, 할 건데.”
신전의 기부금의 반 정도를 에탐 가문에서 책임지고 있었다.
사실 에탐 가문에게는 명성 외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거액의 신전 기부를 왜 이렇게 하고 있느냐?
척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미르엘 에탐이 제 아들을 위해서 내어 주는 것이다. 외따로 신전에서 스스로를 밟아 죽이고 있을 자식을 위해서.
“허, 대체 네가 뭐기에….”
“나? 멋진 아빠를 둔 딸인데.”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대신관의 얼굴이 팍 굳어졌다.
나는 그의 표정에 만족감을 느끼며 아담과 이오나를 데리고 총총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날부터 내 지독한 신전 방문이 시작됐지만.
* * *
“대신관님, 안뇽!”
얄궂게도 내가 상큼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자 대신관의 얼굴이 대놓고 찌푸려졌다.
“어? 얼굴 지금 찌푸린 거예요? 나 안 반가워요?”
“…하하, 제가요? 설마 그렇겠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에탐 영애.”
“네에, 스모어 쿠키랑 파라흐산 핫초코는 준비해 뒀어요?”
으득, 어디서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자 대신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사하게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물론입니다.”
‘능구렁이네.’
하긴, 그러니 돈에 미친 놈이 대신관을 하고 있지.
그는 지금 무척 애가 닳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탐 가문에서 정말로 후원금을 끊겠다고 통보했거든.
정확히는 내 얘기를 전부 들은 아빠가 끊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에서도 대신관은 썩 좋은 존재로 나오지 않았다.
본래 돈에 미쳤던 인간이 어쩌다가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게 돼서 대신관의 자리까지 올랐다.
대신관은 귀족들에게 사생아나, 불편한 아이들을 떠넘기는 곳으로 신전을 제공했다.
그들을 신관으로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후원금을 받았다.
크루노 에탐이 죽고 나서 그가 크루노 에탐을 뭐로 여기고 있었는지 나왔지.
그에게 에탐은 커다란 돈줄이었다.
대신관은 미르엘 공작이 신전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후원하는 이유를 눈치챈 인간이었다.
미르엘 공작은 일찍이 집을 나간 크루노 에탐을 신경 쓰고 있었다.
맨날 입으로만 툴툴거리고 뒤에선 걱정하는 성격이 어디에 가진 않았단 얘기다.
자식을 걱정하는 그 마음을 이용해 현재 대신관은 크루노 에탐을 더욱 신전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그의 죄책감을 자극했고 가스라이팅을 했으며, 그가 신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도록 조종했다.
실제로 루실리온의 손에 크루노 에탐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크루노 에탐이 얼마나 큰손인데 그렇게 죽이냔 말이다! 그건 제일 큰 돈줄이었다고! 어떻게든 붙어 있게 했어야지……!]대신관은 그 뒤에 루실리온에게 죽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전역에 반란의 불씨가 피워졌다.
“입맛에는 좀 맞으시는지…?”
“음, 아니. 맛없네요. 너무 달아.”
나는 그가 기껏 준비한 쿠키를 대충 내던지며 말했다. 귀한 쿠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
대신관이 주먹을 꽉 쥐었다.
“크루노 추기경은 신실한 마음이 지나쳐 스스로 신전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대신관인 제가 감히 어떻게 신을 향한 그 절대적인 충성을 접고 신전을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대신관은 거의 울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두 손을 모아 잡고 가식적이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그저 웃었다,
“응, 대신관님 말이 맞아요. 확실히 그렇지. 그러니까 삼촌은 여기 있어도 될 것 같아요.”
어차피 머지않아 루실리온이 대신관 자리를 차지하면 괜찮아질 얘기니까.
“그럼……!”
그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대신 다른 걸 부탁하고 싶은데.”
“다른 거라면…?”
“여기 있는 수인들 다 해방해 줄래요? 아, 수인들 가족이랑 몇 안 되긴 하지만 엘프들도.”
나는 의 내용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는 수인을 비롯해서 더러운 수인과 내통한 가족들도 정화가 필요하다는 등의 여러 이유를 덧붙이면서 무임금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갈취했다.
수인들은 강제로 신전 소속이 되었고, 그들의 가족은 신전에 인질이 있으니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대신관은 수인 한 명으로 몇 명의 무료 노동력을 얻게 된 것이다.
“뭐…? 그게 무슨…….”
“응, 그것만 해 주면 돼요. 참고로 계약서에 사인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주시고.”
크루노 에탐이야 조금씩 회유하면 그만이지만, 수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남대륙으로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겠지.
어제 아빠한테 그 얘기를 했었다.
[…그래서 수인을 해방하고 남대륙으로 보내 주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요? 돈이나… 지원 같은 거…….] [따님, 그게 하고 싶니?] [네.] [그럼 하면 된단다.] […하지만.] [가문은 네 거야. 네게 권한이 있단다. 네가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면, 하면 된다.]아빠는 내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크루노 에탐이 죽지도 않고 수인들이 불행하지도 않은, 그런 미래가 보고 싶었다.
“싫으면…….”
나는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빠가 신전의 자금줄을 80%는 끊을 수 있다고 했지….”
거짓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