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8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너요.”
“네?”
“아녜요, 어쨌든 들어줄 마음 있어요?”
나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자금줄은 그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주제라 입에 올린 것뿐이다.
아빠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다른 귀족들에게 기부금을 내라 말라 왈가왈부할 만큼 사교계에 열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협박이라면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마 자금줄을 끊어 달라는 부탁을 하려면 아빠의 막내 누나인 아크레아 사파일에게 부탁해야 옳을 것이다.
아빠한테 들은 결과 사교계는 그녀가 꽉 잡고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대단한 집안이네.’
차르니엘 에탐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라고 했고 아크레아 사파일은 사교계의 여왕이랬다.
넬리아 자르단은 상업 쪽을 꽉 쥐고 있고 하이엘 에탐은 드래곤의 능력 중에서도 동물과 곤충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각성해서 정보를 모으는 데 특출하다고 들었다.
아빠는, 뭐 인성만 실종된 천재고…….
크루노 에탐은 잘 모르겠다. 스스로를 억누른다고 했으니 뭔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수인을 거리에 풀어 둘 수는….”
“응, 그래서 대신관님의 걱정이 없도록 남대륙으로 보낼 거예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것이 있는데……. 게다가 저는 갈 곳 없는 그들에게 속죄할 기회와 일자리를 준 것뿐입니다.”
대신관의 개소리를 듣는 것도 조금 피곤해졌다. 슬슬 크루노 에탐에게 갈 시간이기도 했고.
나는 방긋 웃었다.
“그래서, 80% 끊어요? 전 오늘 집에 돌아가면 바로 아빠한테 말할 건데…….”
사실 내가 가주라는 걸 밝히면 이 협박에 조금 더 신빙성이 더해지겠지만, 아직 아빠랑 할아버지는 공식적으로 밝힐 마음이 없어 보였다.
“……하.”
수인들이 신전 살림의 전반을 맡고 있을 테니 쉽게 포기할 수 없으리란 것은 알고 있다.
‘아빠가 왔으면 쉽게 해결되긴 했겠지만….’
사실 나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나도 대신관님한테 그냥 부탁하고 싶진 않아요. 아빠가 공짜로 뭘 부탁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랬어요.”
물론 그런 적은 없다.
“하지만, 수인이 없어도 다른 신관분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후원금을 지금보다 50% 더 늘려 줄게요.”
“네?”
“물론 그 돈은 대신관님 혼자서 가질 수 있도록 비자금으로 조성해 줄게요.”
내 말에 그가 입을 벌렸다.
“거기에 아빠가 가주인 동안은 계속 그렇게 해 달라고 할게요. 물론, 계약서를 작성해도 좋아요.”
대신관의 눈이 도록도록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탐욕스러운 이중 턱이 흔들거렸다.
아마 아빠가 얼마나 가주직을 오래 맡을지를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빠는 대단하니까 할아버지만큼은 가주를 하지 않을까?”
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대신관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크흠!”
그는 몇 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지요, 영애의 마음이 갸륵하여 신께서도 결국 두 손을 드셨습니다. 그들은 신의 축복을 받아 속죄할 순 없겠으나, 따스한 영애의 품에서 분명히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나.
좔좔 흘러나오는 말이 그야말로 청산유수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나는 이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오늘은 이미 작정하고 법률 자문받아서 계약서를 작성한 참이었다.
“자, 내가 약속할 내용이에요. 부족한 거 없는지 확인해 봐요.”
이미 에탐 가문의 직인까지 찍힌 계약서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신이 나서 계약서를 건성건성 살폈다. 그러곤 이상한 점을 확인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봐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계약서였다. 법률 자문가에게 공증까지 받아 가면서 한 거니까 말이다.
나는 계약서에 사인을 해서 내밀었다. 그리고 다른 계약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 얼른 사인해 주세요. 대신관님이 시간을 끌어서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아빠가 쫓아올 테니까요.”
대신관을 독촉하자 그는 빠르게 계약서를 몇 줄을 읽더니 어마어마한 금액의 숫자를 보곤 히죽거리며 이내 가볍게 사인을 했다.
이오나가 그걸 냉큼 받아 챙겼다. 나도 볼일이 끝났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대신관님을 찾아오는 일도 없겠네요. 근데 삼촌은 자주 만나러 와도 되죠?”
“네, 물론입니다. 크루노 추기경도 가족을 만날 권리가 있으니 말입니다. 앞으론 고행도 좀 덜하도록 권해 보겠습니다.”
“네, 대신관님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시네요.”
내가 활짝 웃었다.
대신관으로선 계약서를 받아냈으니 앞으로 크루노 에탐에게 집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돈이면 해결될 일이 정신적 고통으로 크루노 에탐에게 쌓였다는 것이 황당한 일이었다.
일단 생각했던 목적 두 개는 달성했다.
“가주님, 이 계약서를 작성해도 되는 걸까요?”
“응, 그거 잘 읽어 봐.”
이오나에게 대답해 주며 대신관의 집무실을 나온 나는 총총총 걸어 크루노 에탐의 집무실로 향했다.
한참을 서류를 읽어 보던 이오나가 탄성을 흘렸다.
“이건….”
“역시 나쁜 사람은 뒤통수를 맞아야 즐겁잖아.”
아마 에르노 에탐이라면 이보다 더한 수를 썼겠지만, 난 그 정도까진 자신이 없었다.
크루노 에탐의 집무실로 가는 길에 만난 많은 신관들이 나를 볼 때마다 엉거주춤 인사를 건네 왔다.
내가 며칠째 신전을 휘젓고 있으니 신관들과 성기사들도 내가 익숙해졌는지 나를 방해하거나 막지 않았다.
내가 크루노 에탐의 집무실에 서서 활짝 웃자 신관들이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서 반짝반짝한 금화를 두 개를 꺼내 각각 하나씩 내밀자 두 신관이 못 이긴 척 문을 열어 주었다.
크루노 에탐이 문을 열지 못하게 했을 텐데 열어 주게 된다면 아마 이후에 혼이 날 테니 나를 눈감아 준 대가를 미리 준 것이다.
“삼초오오온!”
내 부름이 퍽 익숙하고 질리는 듯 크루노 에탐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한계까지 치솟은 짜증을 내리누르며 느리게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는 뻔뻔하게 그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담과 이오나가 내 뒤에 섰다.
“수업은 대체 어쩌고 매일 오는 거지? 너는 지금 작위를 물려받은 주제에 가문을 내팽개칠 셈인가?”
“아뇨, 나 열심히 하고 있어요.”
“대체 뭘….”
“맨날 여기 오기 전에 대신관님이랑 면담하는걸요.”
그렇게 오늘은 수인 해방과 크루노 에탐의 해방을 얻어 냈다.
“…네가 내게서 뭘 읽어 냈는진 모르겠으나, 내게 신경 쓰지 마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크루노 에탐은 오늘도 차갑게 말했다.
요즘 나는 수업이고 뭐고 일단 다 뒤로 제쳐 둔 채 매일매일 그의 집무실을 침입하고 있었으니 못마땅할 법도 했다.
그렇다고 여기 와서 뭔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크루노 에탐이 일하는 걸 구경하다가 간식을 오독오독 먹다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이긴 했다.
“……루시 보고 싶다.”
물론 한 번씩 어필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만날 수 없다고 했을 텐데.”
“삼촌은 신전이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 안 해요?”
“무슨 소리지?”
“삼촌은 정말 신관이 하고 싶어요? 신관이 모두 깨끗하고 청렴한 건 아니잖아요.”
도리어 어떤 면에선 크루노 에탐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면모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려 대신관이 돈에 미친 사람이 아니었던가. 크루노 에탐이 바보가 아닌 이상 대신관의 나쁜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대신관 아저씨가 수인을 비롯한 타 종족들을 해방해 주겠대요.”
“……뭐?”
“지금보다 50% 정도 후원금을 더 늘려 준다니까 그렇게 해 준대요.”
크루노 에탐은 나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삼촌이 믿고 따르는 사람은 겨우 그 정도예요. 삼촌의 시간이 아까워지는 사람.”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신관 후보생은 만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
철벽도 이렇게 깐깐한 철벽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불만스럽게 뺨을 부풀렸다.
“싫어요.”
“넌 정말….”
“사실 밝은 거 싫어하잖아요.”
크루노 에탐의 본질은 어둠.
그가 각성한 드래곤의 능력은, 끝없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서 크루노 에탐은 스스로의 능력을 봉인하고 신전에 입교했다.
그의 힘은 본래 마물을 다루고 마물을 길들이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광폭화가 찾아왔다.
크루노 에탐에겐 불운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소녀를 눈앞에서 잃고 말았으니까.
그때, 크루노 에탐은 겨우 열셋이었다.
“삼촌은 스스로를 벌하고 고통스럽게 하려고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안즈를 위해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루노 에탐이 서슬 퍼런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