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9
에서 죽은 크루노 에탐의 회상으로 떡밥처럼 나온 것이었는데 떠올리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활자로 된 세계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 있었다.
오로지 한 사람의 행복과 지대한 성공을 위해서, 활자 안에선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상처받고 괴로워하다가 마약에 중독되어 끌리듯, 여주인공의 손길에 허덕이다가 또한 여주인공을 돋보이려고, 혹은 그 주변 인물의 잔혹성을 강조하기 위해 죽는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건 당연한가?
활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걸 무시해 왔다.
당연한 일이잖아?
소설 속에는 주인공이 있었고 주인공 이외에 모든 것은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여주인공을 위해서 아무리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도 결국은 여주인공이 행복해지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주인공 버프란 그런 것이다.
수백의 화살 비가 쏟아져도 병사들이 오로지 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지고 독가스가 주변을 채워도 여주인공은 운 좋게 살아남는.
“닥치고 나가라. 한 번만 더 그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널 가주로서 인정하지 않겠다.”
“아까운 삶, 그냥 이렇게 썩혀 버릴 거면 나한테 줘요.”
“……뭐?”
“내가 삼촌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내가 보기엔 삼촌한텐 힐링이 필요해.”
이불에 돌돌돌 말아서 침대에 넣어 주고 귀여운 동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달콤한 간식을 입에 쏙쏙 넣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가 자학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적임자는 있는데….’
내가 갈 수는 없는 곳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오로지 크루노 에탐만이 갈 수 있는 곳일 거다.
사실 외전에서 2부 예고한답시고 나온 장면이라서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만나게 해 줘요, 루시.”
“미치겠군, 이걸 좀 데리고 갈 마음은 없나?”
크루노 에탐은 뻔뻔하게 버티고 있는 나를 포기하고 이오나와 아담을 보았다.
두 사람은 각자 제 손을 뒤로 맞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의 표본과도 같았다.
“신관 후보생은 나갈 수 없다.”
“신은 존재하지 않아요, 삼촌.”
“…….”
그는 이제 내 불경한 말에도 기함조차 하지 않았다. 도리어 질린 표정을 할 뿐이었다.
“삼촌도 알고 있잖아요, 설령 존재한다고 한들 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걸요.”
내가 수십, 수백 번 기도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삼촌도 아마 수십, 수백 번은 더 기도하고 나보다 더 꺾였겠지.
“아무리 신관 후보생들을 청렴하고 결백하게, 어떤 더러움 없이 신앙심 높은 자로 키운다고 한들…….”
“닥쳐라.”
“죽은 안즈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삼촌의 죄는 사라지지 않아요.”
“닥치라고 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성서를 거칠게 내던졌다.
새하얀 옷을 입은 크루노 에탐의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어둠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이 위협적이다.
“와, 성서 던졌다.”
나는 성서 앞에 주저앉아 입가를 허물며 헤실헤실 웃었다.
“추기경 실격이네요, 셋째 삼촌.”
“허…….”
크루노 에탐은 ‘뭔 이런 놈이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이나 보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가 망나니 사이코 딸이 아니랄까 봐…….”
어쩐지 아빠와 동급 취급을 받은 것 같아서 살짝 뿌듯해졌다. 내 표정을 봤는지 그가 질린 표정을 했다.
“그딴 회의에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의 입술 사이로 기어코 지독한 후회가 담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 식은 핫초코를 홀짝홀짝 마시며 웃었다. 기분이 아주아주 좋았다.
그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그리고 앞으론 신전에 오지 마라.”
“올 건데요.”
“네 방문은 앞으로 금지할 거다.”
그가 대답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내 도착한 곳은 미로처럼 어지러운 신전 안에서도 한층 깊은 곳에 있는 장소였다.
“여기에 있다.”
“…세상에, 애를 여기에 가둔 거예요?”
나는 공기도 통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단단한 철문을 보며 말했다.
게다가 투명한 장막까지 쳐져 있어서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가둔 게 아니다, 놈이 스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 거지.”
“…네?”
“원래는 그러지 않았는데, 밖에 나갔다 온 뒤론 반항심이 출중해졌지.”
크루노 에탐이 나를 흘기며 말했다.
“그는 신전에서 가져간 성물과 성석의 수만큼 채워 놓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석을 가지고 스스로를 감금했고.”
그렇게 말한 크루노 에탐은 황금빛으로 된 결계에 둘러싸인 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강력한지 몇몇 고위급 신관과 추기경이 신력을 썼어도 문을 뚫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말에 잠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루실리온이 이렇게 된 건 나 때문이라는 거잖아?
“만나도 소용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 어차피 이 안에서 나오지 않을 거다.”
그는 바른 자세로 선 채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쉽게 물러날 내가 아니지만.
“루-실-리-온-!!”
배에 힘을 꽉 주고 한껏 목소리를 높이자 크루노 에탐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전에서는 정숙해야 하는 거 모르나? 그리고 그렇게 불러 봐야 안에선…….”
파지직-
문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아이스크림처럼 주르륵 녹아내렸다.
“…….”
“주인님.”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언제 단단히 닫혀 있었냐는 듯 아주 쉽게 열리는 문에 나도 당황하고 크루노 에탐도 당황했다.
“깨어나셨군요.”
훤칠한 남정네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훌쩍 커 버린 루실리온을 보며 그야말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의 성장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만, 루실리온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의 외모였다.
아름다운 백은발이 흔들거렸다. 휘어지는 눈동자엔 오로지 반가움만이 그득했다.
그는 곧장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제 뺨을 가볍게 비비적거렸다.
“아, 안녕…. 루시.”
“네, 주인님.”
지금 루실리온이 열네 살이었던가?
5년이 지났으니 아마 그 정도가 되었을 거다. 외모에도 죄가 있다면 루실리온은 분명 사형이다.
‘남자까지 홀린 죄야.’
정말 한껏 물오른 외모는 이미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성년이 되면 아마 더 화사해지지 않을까?
“무사히 성장하셔서 다행입니다, 보고 싶었어요.”
“…응, 일은 다 했어?”
“일? 아아, 예전에 다 끝냈습니다. 귀찮아서 그냥 나가지 않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식사는?”
밥그릇 하나 지나갈 틈새가 없어 보이던데 대체 밥은 어떻게 먹은 건지 모르겠다.
딱히 마른 것처럼 보이진 않긴 하는데….
“아, 신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배고픔은 없습니다.”
“…….”
사기를 제법 훌륭하게 치는걸?
뒤쪽으로 널브러져 있는 간식과 과일들이 보였다. 내가 떨떠름하게 루실리온을 보다가 뺨을 긁적였다.
“루시.”
“네?”
“여기에 사인 좀 해 주라.”
루실리온은 내가 내미는 서류와 펜을 받아들곤 글자를 하나도 읽지 않고 그대로 사인을 했다.
‘정말 조심성이 없네.’
그러나 지금은 조심성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여기도, 그리고 여기랑 여기도.”
“네!”
화사하게 웃으며 그는 내가 준 서류에 유려한 사인을 마쳤다.
나는 그것을 흡족하게 보다가 이오나에게 넘겼다. 크루노 에탐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흠흠, 축하해! 루실리온!”
“네?”
“오늘부터 네가 신전의 대신관이야!”
“……네?”
“……뭐라고?”
내가 양팔을 벌리며 톤을 높여 말하자 루실리온도 크루노 에탐도 표정이 이상해졌다.
두 사람은 단번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반문했다.
“그리고 오늘부로 삼촌은 추기경 해고야. 사유는 음… 뭐가 좋으려나.”
나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는 척하다가 손뼉을 짝 쳤다.
“이오나, 빈칸에 성서를 던져서 신을 모독했다고 적어 줘.”
“네, 아가씨.”
이오나는 펜을 움직여 사각사각 빈칸에 글을 적었다. 서류가 깔끔하게 정리됐다.
“주, 주인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루실리온이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며 물었다.
“응, 내가 대신관에게 너한테 모든 걸 양위한다고 적은 서류에 사인하게 했거든.”
“예?”
“그러게 글씨를 잘 봤어야지.”
대신관이 사인도 하고 신전의 도장까지 찍었으니 무를 순 없을 거다.
“그리고 네가 사인한 것 중의 하나는 새 대신관으로서 셋째 삼촌을 해고한다는 내용이었어.”
어차피 인생은 다 수직관계로 흘러가는 것 아니던가.
새 대신관이 추기경을 쫓아낸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루실리온도 나중에 피 흘릴 일도 없고 좋지.
나름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루실리온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전… 곧 신관 후보를 사퇴할 예정이었는데요…….”
루실리온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내게 사직서처럼 생긴 것을 내밀어 보였다.
그는 이직 준비 다 마쳤는데 강제로 회사 계약이 연장된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