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0
아, 망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사실 나로서는 루실리온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주려는 의도였다.
왜냐하면 굳이 연기도 하지 않고 괜히 대신관에게 더 휘둘릴 필요도 없이 대신관 직위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
“…….”
“…….”
분위기가 싸하다.
크루노 에탐도 자신이 해고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주인님의 애완동물로 살려고 했는데요…….”
“내가 너 먹여 살려야 해……?”
“안 되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신선해서.
보통 로맨스 판타지에 나오는 남자 주·조연이라고 하면 다들 자신이 여주인공을 먹여 살리지 못해서 안달이 아닌가.
루실리온도 여주인공의 어장 속에 있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샤르네에게 뭐든 해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으니까.
‘아, 내가 여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이해가 됐다.
‘이제 슬슬 여주인공이랑 역하렘 남주 후보들이 만날 때가 됐는데.’
여주인공이 지금 열세 살이니까 앞으로 2년 정도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음, 일단 튀자.’
일은 벌여 놨으니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에탐 가문으로 돌아가서 에탐 가문의 법률 전문가에게 서류를 넘기고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하면 대신관의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해 주겠지.
“루시.”
“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었어. 나 잘 다녀왔어.”
루실리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설핏 둥그렇게 휘어졌다.
“네, 무사히 성장하셔서 정말 기뻐요.”
루실리온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님.”
“응?”
“주인님과 만나기 전에 전 대신관과 내기했었어요.”
“내기?”
아, 그때 그 골목길에서 해 줬던 말인 모양이다.
“네, 길거리에 거지처럼 있다가 누군가 저를 데리고 가면 제 승리, 그렇지 않으면 패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승리하면 자유가 되는 거였고 패배하면 순종적으로 신관 후보생으로돌아오는 거였어요.”
아, 그래서 속의 루실리온은 순종적으로 굴었던 걸까? 누구도 그를 구해 주지 않아서.
“여기서 벗어난 이유가 뭔지 아세요?”
“아니?”
“……대신관이 되기 싫어서였어요.”
루실리온이 벽을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절망스러운 어조에는 옅은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오.”
그런 커다란 의도가 있었을 줄이야. 나는 권력이 필요한 줄 알았지.
내가 도르륵 눈동자를 굴리자 그가 웃었다.
“그래도 절 위해 움직여 주신 거죠?”
“으응….”
정확히는 샤르네와 널 위해서지.
양심상 여주인공의 어장까지 방해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흠흠, 절대 그 찐한 17금의 그렇고 그런 게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미친놈들이 많이 나오는 소설이다 보니 집착들도 대단하고 수위도 대단…… 크흠.
“그러면 됐어요, 할게요. 대신관. 주인님께서 주신 선물이니까.”
루실리온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루시.”
“네?”
“이제 너도 대신관인데 이제 주인님 소리는 관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한낱 귀족 영애에게 대신관이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이 썩 좋게 보일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냥 에이린?”
“그러면 다른 사람이랑 똑같잖아요.”
“그렇지…?”
보통은 이런 평범한 관계를 추구하니까.
“그건 싫어요.”
“왜?”
“주인님한텐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요.”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루실리온이 말을 덧붙였다.
“잊지 마세요, 주인님. 제가 제일 먼저 주인님의 특별함을 알아봤어요.”
루실리온이 내 손등을 잡고 다시 입을 맞추려는 때였다. 내 몸이 허공으로 덜렁 들렸다.
루실리온의 입술이 허공을 방황하다가 천천히 허공에 들어 올려진 나를 향했다.
“셋째 삼촌?”
“어린 것들이 잘하는 짓이군. 정도를 지켜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크루노 에탐의 시선은 루실리온에게 향한 채였다.
“크루노 추기경께서 언제부터 그렇게 조카 사랑이 지극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루실리온은 살짝 굽혔던 몸을 다시 펴며 말했다.
“허튼소리 말고 당장 해고를 취소하고…….”
“싫네요, 저는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라서.”
사르르 휘어진 눈동자를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음, 살짝 피곤해졌어.
“삼촌 우리도 집에 가자.”
“네 방자함을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응응.”
크루노 에탐의 살벌한 말에 나는 도리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대롱대롱 매달리는 쪽을 선택했다.
역시 힐링에는 귀여운 아기와 동물이 최고지.
‘돌아가면 애완동물을 알아봐야겠다.’
크루노 에탐이 내 뒷덜미를 잡고 떼어 내려고 했지만 나는 이제 무념무상하게 고목나무 매미처럼 잘 달라붙어 있을 수 있었다.
크루노 에탐은 생각보다…….
‘근력은 좀 약하네.’
아니다, 많이 약했다.
나는 힘을 쓰느라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뺨과 귓불을 보며 생각했다.
“가자, 삼촌.”
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하품과 함께 말했다. 그는 몇 번이고 나를 떼어 내려다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나와 함께 마차를 타게 됐다.
내 곁을 서성거리던 루실리온이 부득불 마차를 타는 곳까지 나와 나를 배웅했다.
“사람 보내 줄게, 루실리온.”
“아, 괜찮아요.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루실리온이 커다란 천주머니를 내 품에 밀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이건 성석이에요, 조만간 더 보낼게요.”
“이걸 왜?”
이제 해츨링이 되어서 필요 없는 게 아니었나?
“주인님은 평범하지 않아서 단순히 음식물만 섭취하면 허기가 계속 질 테니 이것도 같이 드셔 보세요.”
“응….”
나는 육각형 모양의 길쭉한 수정처럼 생긴 반투명한 성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은 제가 깔끔히 정리해 둘게요.”
“어?”
“주인님께서 계약서를 주신 덕분에 절차상의 문제는 아마 없을 거예요.”
그는 종이에 입을 쪽 맞추며 말했다. 야스러운 눈빛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다음에 봐.”
“네, 신전만 정리하고 곧 찾아뵐게요.”
“그만 떠들고 피곤하니까 가지.”
크루노 에탐은 그사이 10년은 폭삭 늙은 표정으로 마차 문을 손수 닫았다.
어지간히 듣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품에 안긴 성석 더미를 내려다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근데 이건 어떻게 먹는 거지?’
성석을 먹는 방법은 에도 나와 있지 않았기에 아주 난감해졌다.
꼬르르륵-
성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미칠듯한 허기가 몰려왔다.
순간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자 크루노 에탐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해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어…, 가족?”
“뭐라고……?”
“아니에요.”
내뱉어 놓고 부끄러워져서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나도 할아버지 있고 아빠도 있고 삼촌도 있다!’
그렇게 어딘가에 불쑥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꾹 눌렀다. 이 나이에 영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넌,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겠군.”
먼 산을 바라보듯 닫힌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크루노 에탐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면… 할머니요?”
“그래, 아버지와 대판 싸우시고 가출 중이시지.”
“가출…?”
“정확히는 5년째 이혼소송 중이다.”
할머니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어떤 분이신데요?”
“담대하시고 똑 부러지시는 분이지.”
오, 이 시대의 장군감 여인인 걸까?
“말을 안 들으면 일단 검집부터 치켜드시고 부부싸움이라도 나는 날엔 집 안의 집기가 남아나는 게 없었지.”
조금… 거치신 분인 모양이네. 이런 가문에 들어왔으면 조금 엄할 수도 있지.
“짓궂은 남자애들 셋이 매달려도 끄떡없으셨고….”
근육…, 도 좀 있으신가 보네. 할머니가 정정하시면 좋지.
“사교계에선 누구도 덤비지 못했다. 심기가 조금만 불편해도 음담패설을 섞은 온갖 욕설이 튀어나왔거든.”
욕은 그렇다 치고 썩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나…? 잘 듣고 있으니 칭찬과는 거리가 제법 멀게 들렸다.
“그리고….”
또 있어?!
“귀여움순으로 사람을 차별했다.”
“으잉……?”
그렇게 말하는 크루노 에탐의 눈이 얼마나 짜게 식었는지 몰랐다.
“너는 귀여우니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다.”
“…….”
들으면 들을수록 만나 뵙고 싶은 분이시네.
“어머니를 만나고 싶나?”
“조금요?”
“만날 수 있을 거다.”
“네에….”
“곧 소식을 들을 테니 득달같이 달려오실 거다.”
무슨 소식을 말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자 크루노 에탐의 입가에 드물게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아버지의 멱살을 잡으러.”
“오…….”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게….”
대화 도중에 저택에 도착했다.
크루노 에탐이 마뜩잖은 표정을 하면서도 나를 안아 마차에서 내렸다.
쩅그랑-!
콰앙-!
쿠웅-!
쿠구구구-!
쾅!
그 순간, 차마 소리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굉음과 함께 비명과 먼지가 저택을 휩쓸며 거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났다.
부서진 창문과 무너진 건물 틈 사이로 굉음만큼이나 커다란 사자후가 뿜어져 나왔다.
“이 늙어 미친 새끼가! 대가리에 칼빵이 났으면 관으로나 들어갈 것이지 뭐가 어쩌고저째? X이 안 서니 대가리도 안 굴러가디? 왜, 아주 손주 하나 더 놔서 신생아에게 물려주질 그러누? 아주 쌍으로 지X들을 하는구나. 이놈아, 너는 안하무인으로 살더니 아주 뇌에 바람구멍이 생겨서는 생각이란 게 되질 않던? 되바라진 새끼! 단체로 아주 약을 처먹어선 아주 집안 꼴을 재밌게도 만들어 두었구나. 왜? 어미가 없으니 이제 우습든?”
“……아동학대거든.”
그렇게 말하는 크루노 에탐의 낯은 평소보다 한층 더 창백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