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2
“너는 이 어미가 죽어 가는데 그게 말이라고 하누? 내 참 인생 헛살았다 싶다.”
“어머니께서 벌이신 일입니다. 아니면, 부디 그대로 사라지시든가요.”
에르노 에탐은 에이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인지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웃고 있는데 그게 더 섬찟했다. 선대 공작 부인이 허탈하게 숨을 뱉었다. 그 얼굴에서 공포는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
“응?”
“그럼 제가 감옥도 없앨게요.”
“오, 우리 따님이 아예 기사단에게 쫓기겠구나. 이번엔 나라를 없애 주려고?”
에르노 에탐의 말에 에이린이 입술을 툭 내밀었다.
나라를 없애는 건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다.
“하지만….”
“따님, 누군가 죽이고 싶다면 내게 말하렴. 네가 이런 일을 할 필욘 없단다.”
에르노 에탐의 말에 에이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아이는 혼이 난 것처럼 한껏 침울해져선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상황이 그를 난감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죄송해요.”
금빛 마력이 모습을 감추고 이내 반투명해졌던 선대 공작 부인의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따님, 고맙구나.”
“네.”
에이린은 대답하며 선대 공작 부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뺨을 부풀리곤 고개를 홱 돌렸다.
“아가, 내가 미안하단…….”
“흥.”
“아가?”
그녀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아이를 보았다.
에이린이 단단하게 화가 나선 에르노 에탐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던 탓이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선대 공작 부인은 장난기나 가벼움을 버리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단다, 에이린. 내가 너무 어린애 같은 짓을 했구나. 네 반응이 귀여워서 선을 넘는 짓궂은 짓을 했다. 너랑 에르노는 내가 보기엔 충분히 가족이란다.”
눈을 가늘게 뜬 에이린이 선대 공작 부인을 보았다.
“나는 데반느라고 한단다.”
“…….”
에이린이 에르노 에탐의 가슴팍에 이마를 파묻은 채 아무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내가 대체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던 행동에 수치심이 물밀듯 밀려왔다. 무슨 아이 같은 행동인지 모르겠다.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에이린의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이린.”
“네.”
“이만 가서 쉴까?”
에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노 에탐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한동안 접근하지 마십시오.”
그가 말을 덧붙이곤 에이린을 안은 채 냉큼 사라졌다.
“그러게, 들를 거면 곱게 들를 것이지 오자마자 지X은 대체 왜 그리 지X랄이야?! 애 하나 울리고 쫓아내고 잘하는 짓이오! 아주.”
“나 잘못한 건 알겠는데, 넌 뭘 잘했다고 입을 놀려? 미르엘 에탐.”
“뭐, 뭐…! 뭐가 어떻다고 그렇소!”
“멍청하게 제 아들한테 뒤통수 맞아선 가주직도 뺏긴 주제에 조용히 하지.”
데반느의 뼈아픈 지적에 미르엘 에탐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 * *
선대 공작 부인과의 소란이 있고 난 후 아빠의 품에서 밥을 다 먹고 아빠가 읽어 주는 동화책까지 다 듣고 나니 사위가 캄캄했다.
영 잠이 오지 않아서 아빠의 토닥거림을 받으며 자는 척을 했던 참이었다.
아빠는 내가 자는 줄 알고 나갔지만, 사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잠에 한 번 들어 보겠다고 눈을 꼭 감고 양을 세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이구나, 에이린.”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창문 아래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은빛 갑옷의 사내를 보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장님?”
“그래,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괜찮아진 모양이군.”
“…네, 아. 죄송해요. 연락도 제대로 못 드리고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는데 제대로 말을 전하지도 못했다.
“리하르트가 널 만나지 못해서 거의 눈이 돌아 있더구나.”
“……아.”
그러고 보니 리하르트와도 매일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가 중간에 뚝 끊겼겠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성장기라고 잠이 들어서 문제였다.
딱히 고의는 아니었으나 정신을 차리곤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어서 다시 연락하지도 못했다.
‘난 멍청한 걸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이 몇인지 모르겠다.
“이제 약속을 지켜 줄 수 있겠나?”
“네, 죄송해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급히 펜과 종이에 뭔가를 써서 내밀었다.
마을의 이름과 찾아가야 하는 수도원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용되던 알비온의 딸의 이름이었다.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늦어서 죄송해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면목이 없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였다.
“괜찮다, 네 상황은 들었으니까.”
“수도는 어쩐 일로 왔어요?”
“뒤늦게 어린 조카들이 각자 가문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왔었다.”
“……조카요?”
알비온이 조카가 있었나?
소설에서 그런 내용은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의아한 낯으로 그를 보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내 아버지는 본래 귀족이다. 시찰을 나왔던 아버지가 마을에서 제일가는 어머니와 밀회를 즐겼다더구나. 흔한 이야기지, 당연히 버려졌다.”
“아……, 어느 가문인데요?”
“로즈먼트.”
엥, 내가 이름을 잘못 들었나?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들자 알비온은 벽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즈먼트요?”
“그래, 내 아버지는 오래전 죽고 하나뿐이던 이복형제도 이미 불의의 사고로 죽었더구나.”
그거 아마도 댁네 조카가 저지른 일인데요…….
“귀족가와는 완전히 연을 끊고 지냈었다 보니… 아이들만 남았었다는 걸 눈치챈 건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의 진실에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확실히 닮았네….’
눈 색이랑 머리카락 색은 거의 흡사할 정도로 똑같았다. 다만 이 우직하고 올곧은 성격의 남자와 그 이중인격 힐 로즈먼트를 동일선상에 두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꽤 반듯하게 커서 다행이지. 내가 도와줄 일도 없어 보여서 널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
그렇게 말하는 알비온은 어딘가 무척 지친 낯이었다.
힐 로즈먼트가 무슨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고아원은요…?”
“늘 똑같다. 독립한 아이들도 새로 들어온 아이들도 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벽에서 등을 뗐다.
“근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어떻게 들어왔냐고? 글쎄, 들어온 건지 들어오게 해 준 건지 모르겠구나.”
“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 목에 암기가 날아들 것 같단 얘기다.”
알비온이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오래 머물렀군. 이만 가 보마, 잘 지내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래.”
“언제 떠날 거예요?”
“오늘 바로.”
그는 내가 적어 준 메모지를 팔랑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순식간에 창문 너머로 뛰어내려 모습을 감췄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본 나는 무릎을 끌어안곤 생각에 잠겼다. 알비온은 수심이 무척 깊어 보였다.
이유는 알 만했다.
아마, 힐 로즈먼트를 보고 죄책감을 느꼈을 확률이 높았다.
어린아이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니 제때 돌봐 주지 못한 자신을 탓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존감이 심각히 낮아서 거의 우울증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힐 로즈먼트가 그 성격에 얼마나 죄책감을 자극했을 거야.’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대하듯 굴었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그 둘이 삼촌과 조카 지간이라니….’
역시 믿기질 않았다. 꼬물꼬물 이불 속에 파고들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테렘.”
“네.”
작게 부르자 누군가가 위에서 툭 떨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정말 나타나잖아?’
조금 놀랐다.
일거수일투족을 호위한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까 썼던 펜으로 종이에 또 무언가를 써서 그에게 내밀었다.
“이 주소로 가면 어떤 창고가 있어. 거기에서, 알을 하나 가져와 줄 수 있어?”
“……알, 말입니까?”
“응.”
“알겠습니다. 거리를 보면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듯합니다.”
부복한 남자는 내게서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아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네.’
내가 가주가 되어서 못마땅할 법도 한데, 신기한 일이었다. 테렘 중 한 명이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며 잠을 설치다가 새벽이 다 되어 갈 때쯤 드디어 잠이 들었다.
* * *
“에이린 에탐! 당장 내 해고를 취소하라고 하지 못하나?”
“으악, 몰라요!”
크루노 에탐의 목소리에 겁먹은 나는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아, 몰라! 삼촌 백수야, 백수라고. 그냥 백수 해!”
나는 부득불 신전에 가려고 하는 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멋지게 백수가 된 크루노 에탐의 힐링 타임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