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4
그 모습을 본 아빠가 산뜻하게 웃으며 근처에 있던 펜을 하이엘 에탐의 이마 정중앙으로 내던졌다.
콰득.
하이엘 에탐에게 향하던 펜을 낚아챈 것은 옆에 앉아 있던 크루노 에탐이었다.
그 의외의 행동에 하이엘 에탐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 고마워. 크루노.”
하이엘 에탐을 흘긋 본 크루노 에탐은 앞이 뭉툭하게 구겨진 펜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유치한 짓은 하지 마라.”
“잔소리는.”
팔짱을 낀 에르노 에탐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우리 집은 어째서 모이면 항상 곱게 회의를 시작하는 법이 없군.”
한숨을 내쉰 차르니엘이 회의를 진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각자 진행 상황이나 보고해 보지.”
차르니엘이 말하며 나를 보았다. 내가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넬리아 자르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편이랑 좀 알아봤는데, 정말로 슬슬 그런 게 유통되려고 하더라고.”
“역시….”
“벌써 몇몇 작은 상단들은 제의받은 모양이던데. 이미 입에 대 본 놈들도 있었는데… 맛본다고 한두 모금 정도 마신 것뿐이라서 아직 문제가 생기진 않은 것 같아. 일단 ‘제상연’의 검증이 필요하니 계약을 조금만 미루면서 시간 좀 끌어 달라고 통보했어.”
넬리아 자르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제상연이 뭐지?’
내가 살짝 고개를 틀어 아빠를 보자 그가 자연스럽게 내게 상체를 숙여 귀를 가져다 댔다.
“아빠, 제상연이 뭐예요?”
“제국 상인 연합회. 제국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무조건 가입비를 내고 가입해야 하는 곳이다.”
“……막냉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 제상연이 굉장히 악덕 기업처럼 들리는데?”
넬리아 자르단이 황당한 듯 목소리를 높이자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강제로 회비를 걷는다는 부분에선 확실히 그렇지.”
“가주님, 막냉이 말은 듣지 마. 제상연은 상인들의 싸움이나 불미스러운 일을 중재하고 교역 중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대신 처리해 주는 곳이야. 매달 회비는 보험 명목으로 받는 거지.”
넬리아 자르단이 억울하다는 듯 냉큼 토로했다. 차르니엘이 이번에는 하이엘을 보았다.
“일전에 말했던 건?”
“알아보곤 있는데……, 아직 대답을 받지 못했어.”
“아직도 네 그물망에 안 걸렸다는 거냐? 개망나니가 그렇게까지 실력이 좋진 않았는데….”
“응……. 이런 일이 잘 없어…. 아예 인상착의가 달라졌거나 누가 숨겨 주고 있는 거라면 조금 어려울지도……, 몰라.”
하이엘 에탐의 말에 조금 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인 차르니엘 에탐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가주님께선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
차르니엘 에탐을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전부 하타르가 들어오는 루트를 틀어막아 버리면 되겠나?”
“음….”
“사실 그게 가장 깔끔하겠지, 황성에 보고를 올려서 황제의 협조를 구하면 금세 끝날 테고.”
차르니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말한 것이 가장 깔끔하긴 하다.
‘하지만, 결국 주동자를 잡지 않으면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
내가 아는 미래는 이번에 하타르가 터질 것이라는 미래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어설프게 해결한 이후에 상대측에서 몰래 다시 하타르 같은 다른 위험한 무언가를 풀려고 한다면 그땐 내가 도와줄 수 없다.
내가 아는 미래에는 한계가 있고 활자를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전에 확실히 잡아 두는 편이 좋았다.
“하타르는 그대로 풀 거예요.”
“……뭐라고?”
차르니엘이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모두가 내게 설명을 요하는 표정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상연으로 들어오는 하타르를 전부 매입한 뒤에 가짜 하타르를 만들어서 뒤바꿔 파는 거예요.”
“……가짜 하타르를?”
넬리아 자르단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게 할 이유가 있나?”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크루노 에탐이 물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게 해서, 주동자를…… 잡자는 거야?”
가장 먼저 내 저의를 깨달은 것은 하이엘 에탐이었다. 머리가 정말 좋은 모양이다.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군, 생각했던 일이 성공한다면 꼬리는 길어지기 마련이니.”
많은 사람에게 널리 퍼뜨리기 위해 범인이 움직일수록 흔적은 더 남을 수밖에 없다.
“범인을 잡자는 거야? 굳이 이런 요란스러운 방법으로?”
아크레아 사파일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범인은 지금 위험을 감수하고 제국 전체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제국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건데……. 단순한 사기꾼이라기엔 불안해서요..”
“타국의 소행일 수도 있다는 거구나.”
넬리아 자르단의 말에 원탁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미르엘 에탐과 데반느 에탐은 그저 원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지켜만 볼 요량인지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서예요.”
사실 타국이 확실하지만 이걸 확신처럼 말할 순 없으니 말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진 모르겠군.”
“맞아, 하지만 막내 조카님. 가짜 하타르는 어떻게 만들려고?”
“음…….”
그녀가 쇠 부채 끝으로 원탁을 느리게 긁으며 물었다.
나는 씩 웃었다. 그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다.
나는 드래곤이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도마뱀 같아서 아직도 믿기진 않지만.
내가 드래곤이라는 건, 즉…….
‘상상하면 된다는 거지!’
나는 냉큼 머릿속으로 염원했다.
‘하타르의 재료를 알고 싶어.’
그 순간이었다.
내 몸에서 금빛의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 같더니 이내 내 앞에 있던 펜이 멋대로 움직여 종이 위에 글씨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이에는 식물도감에서나 봤던 약초나 독초의 이름과 함께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혔다.
열 가지가 넘는 재료를 보며 내가 조금 질린 표정을 하고 있자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툭 얹어졌다.
“에이린.”
“네?”
“무리하지 말거라.”
“네…….”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아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드래곤의 능력인가?”
“지금 뭘 한 거야?”
“그냥 마력이 조금 흘러나온 것 같은데…….”
“왜……, 에르노가, 끼고도는지 알 것 같네…….”
순서대로 차르니엘, 아크레아, 넬리아, 그리고 마지막에 하이엘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크루노 에탐은 인상을 찌푸린 채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강제로 해고하게 만들어서 그런가?’
예전보다 적대감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조만간 시장에 나가야겠다.’
크루노 에탐의 힐링을 위하여.
게다가 어쩐지 나는 크루노 에탐이 썩 싫지 않았다. 저렇게 퉁명스럽게 구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게 재료라는 거지?”
성큼 다가온 칼란 에탐이 종이를 들어 내용을 살폈다.
“하타르를 좀 구해다 주면 내가 만들어 볼게. 최대한 흡사하게, 하지만 중독성은 없이. 맞지?”
“응, 정말 음료수처럼.”
내 말을 들은 칼란 에탐이 씩 웃었다.
“이런 건 내 특기지. 일주일, 아니… 나흘이면 충분해.”
“부탁해도 돼?”
“당연한 소리는 하지도 마, 내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칼란 에탐이 내 뺨을 쭉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오랜만에 할 일이 생겼다며 생기가 도는 모습에 나는 뜨끈해진 양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진짜 남매 같아.’
물론 진짜 남매이긴 하지만, 내가 꿈꿨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헤실, 입가를 풀어 헤치며 웃자 칼란 에탐이 진지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에이린.”
“응?”
“내 주머니에서 평생 살지 않을래? 안락하게 꾸며 줄…… 악!”
칼란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왜 때려요!”
“헛소리 말고 할 일이 있다면 이만 가거라.”
“아버지는 맨날 에이린 안고 다니면서 나는 가끔 대화도 못 나누게 하고…….”
칼란 에탐이 꿍얼거리며 툴툴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불만스럽게 보이는지 몰랐다.
내가 바라보자 칼란 에탐은 입술을 툭 내밀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지 않나.”
“뭐가요.”
“에이린은 내 딸이니까.”
그는 무척 자랑스러운 일을 말하는 것처럼 아주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와, 누군 자식 아닌가.”
칼란 에탐이 심통 난 목소리로 말하자 아빠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아니랬나? 너희 역시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
화악, 낯간지러운 그 말에 칼란 에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처럼 당황한 칼란 에탐이 손을 허공에 휘젓더니 그야말로 허우적거리며 몸을 돌렸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리고 딸은 아니지.”
“……예?”
“아들과 딸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구나.”
산뜻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에 칼란 에탐의 감동받은 얼굴이 산산이 조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