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5
“어휴, 내가 이 딸바보 아버지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칼란 에탐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회의실을 벗어나려는 때였다.
“칼란.”
“네네.”
칼란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무리하지 마라.”
“…….”
덧붙이는 목소리에 칼란 에탐이 눈을 크게 떴다가 설핏 몸을 돌려 아빠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누군데요.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끄떡없어요.”
“도와줄게, 형.”
“좋지.”
칼란 에탐과 실리안 에탐이 회의실에서 나갔다.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아빠를 보았다.
‘좀, 달라진 것 같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너도 철이 들기는 드는구나.”
가만히 상황을 보던 미르엘 에탐이 말했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 놈들 철들 때 네놈은 뭘 하나 했더니, 딸자식을 두어서야 제대로 앞을 보게 됐나.”
그렇게 말하는 미르엘 에탐은 굳건하게 살아왔던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세월에 지친 것만 같았다.
“이제 내가 이 회의에 참여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제일 걱정스러운 놈이 정신을 차렸으니 말이다.”
미르엘 에탐이 말했다.
그는 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슥슥 쓰다듬더니 피식 웃었다.
“내 시대는 지났으니 이제 네놈들이 필사적으로 꾸려 가야 할 때겠지. 나는 뒷방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지내련다.”
“갑자기 늙어 뒤지는 소리를 하고 앉았소? 뒷방 늙은이가 되기엔 당신은 너무 유명해.”
“우리 어린 가주님께서 새로 받은 남쪽 영지에 내려가 그걸 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할머니의 타박에도 할아버지는 어쩐지 개운해 보이는 낯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어떻소, 가주님.”
정말로 에탐 가문에서 은퇴하고 물러나겠다는 그 말에 나는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어차피 영지를 돌볼 사람을 뽑을 예정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얘기라고 미르엘 에탐이 말했다.
‘기껏 가족이 됐는데 떠난다고…?’
굳이 왜 떠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가요, 할아버지?”
“본래라면 예전에 작위를 이양해야 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놈들이 없어서 말이다.”
그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말은 그렇지만 눈에는 애정이 듬뿍 보였다.
“근데 드디어 이 망할 놈의 자식들이 전부 정신을 차렸으니 이제 미련은 없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마땅하다는 듯 미르엘 에탐을 흘겨보던 데반느 에탐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은 차후에 받으러 가마.”
미르엘 에탐은 둘러앉은 자식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검과 힘에 미쳐서 전쟁터를 나뒹굴던 놈이나, 돈에 미쳐 어린 나이에 상단에 숨어 들어갔던 놈이나…….”
차르니엘과 넬리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어릴 때부터 아주 콧대와 자존심만 하늘을 찔러선 지는 걸 싫어했던 놈이나, 남자와 눈맞아서 도피 생활이나 한답시고 결국 부모보다 먼저 떠난 못난 놈이나…….”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에 아크레아와 샤르네의 눈이 커졌다.
“어릴 때부터 사교는커녕 방에서 곤충이랑 놀며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놈이나, 제 부모 가슴에 칼 꽂는 줄은 모르고 신전에 들어가 못난 꼴을 당하던 놈이나…….”
하이엘 에탐이 몸을 한껏 움츠리고 크루노 에탐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숨 쉬는 것이 패륜이었던 이 몹쓸 놈이나…….”
그 말에는 에르노 에탐이 코웃음을 쳤다.
“뭐 하나 마음에 차는 놈들이 없었지만, 네놈들이 이 거대한 집안에 태어나 각자 고민이 많았던 건 알고 있다.”
미르엘 에탐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는 무척이나 개운한 낯으로 원탁을 한 차례 훑었다.
“그래도 각자 잘 이겨내고 장성했다. 잘 자라 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미르엘 에탐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에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운 모양인지 표정이 각양각색이다.
“이렇게 모아 두고 보니 꽤 그럴싸하구나. 평생 단 한 번만 말할 생각이었다만…….”
미르엘 에탐이 퍽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내가 이래 봬도 네놈들을 꽤 사랑했다. 누구 하나 더하고 덜한 놈은 없었다. 너희가 자라면서 무슨 생각을 했든, 그건 알아두거라.”
“…….”
사위가 누군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소름 돋게 조용해졌다. 미르엘 에탐도 퍽 민망했던 듯 큼, 크흠 하며 이상한 헛기침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럼, 이만.”
그러고는 곧 쭈뼛거리며 몸을 돌리곤 그대로 후다닥 회의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목덜미까지 붉힌 채 사라진 미르엘 에탐의 뒤를 시선으로 좇았다.
데반느 에탐도 퍽 의외라는 듯 미르엘 에탐의 등을 바라보다가 이내 제 자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침묵하던 그녀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에르노 이놈을 좋아했지. 아무래도 제일 귀여웠으니까.”
데반느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찌푸려진 아빠의 미간을 보아하니 심기가 불편한 것이 분명했다.
“드레스도 입히고 동물 머리띠도 씌워 놓으면 제일 잘 어울렸으니까.”
“…….”
뭐야, 나 끔찍한 얘기 듣고 있는 것 같아.
아니나 다를까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로운 흑역사가 끄집어내진 것처럼.
“뭐, 이런 귀염성 없는 놈으로 자랄 줄은 몰랐다만…….”
데반느가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고 한들, 내가 네놈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녀가 연이어 말했다.
“특히 크림, 너.”
크…림……?
당황하는 나와는 다르게 대번에 얼굴을 구긴 사람이 있었다.
‘크루노 삼촌……?’
잊고 싶은 과거의 흑역사가 꺼내진 사람처럼 원탁에 앉은 사람들의 낯이 모두 거무죽죽해졌다.
크루노 에탐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열었다.
“그따위 별명으로 좀…….”
“자학하면서 방황하는 건 이제 끝냈느냐?”
“…….”
“부모가 내어 준 제 핏줄이 싫다고 신전에 들어가서 스스로를 학대하니 좋더냐?”
크루노 에탐이 드물게도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어떻게 알았나 싶으냐?”
“…….”
“밖으로 나가면, 부모가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느냐. 네 아비가 왜 신전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 없고?”
크루노 에탐은 조용했다.
뭐라고 입을 열어 반응하진 않았지만 미간을 찌푸린 것이 데반느 에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막내 조카 하나 지키겠다고 옹기종기 모여든 꼴이 나쁘진 않구나.”
“어머니도 참….”
차르니엘 에탐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체리, 내가 말하고 있질 않니?”
와, 다들 왜 할머니를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아. 차르니엘 에탐의 별명이 체리라니 나는 턱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네놈들 귀여움 외의 부분으로 차별한 적은 없다.”
데반느가 말했다.
“드래곤의 능력을 각성한 놈도 그렇지 못한 놈도 모난 놈도 부족한 놈도 차별하지 않았다.”
데반느의 말에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에탐의 직계라도 특수 능력을 각성하는 경우는 드문 모양이네.’
나는 얌전히 부모의 진심을 듣는 에탐들을 보았다. 어쩐지 내가 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다.
그들도 마찬가지인지 멋쩍어 보이면서도 하나같이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네놈들 싫다는 건 시키지도 않았고 하고 싶다는 건 정답게 지원해 주진 않았어도 방해하진 않았지.”
하고자 하는 것을 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면, 내가 네놈들에게만 드레스를 사 주지 않은 걸로 심기 불편했던 적이 있느냐? 이제라도 사 줘?”
에탐들의 고개가 단번에 좌우로 움직였다. 남자들은 새하얗게 질렸고 여자들도 뭔가를 떠올린 듯 질린 낯이었다.
에르노 에탐의 등에서는 대답 대신 마력이 넘실거렸다.
대체 무슨 드레스를 입혔었길래 꾸미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크레아 사파일도 새하얗게 질리는 걸까?
오직 나와 샤르네만이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진 않았다. 네놈들 모두에게 공평했지.”
사위는 고요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땍땍거리는 듯하면서도 나직했다.
“그러니 앞으론 자식 노릇 좀 하거라. 어떻게 어미가 칩거하는 동안 찾아오는 놈들이 하나도 없어?”
그녀가 끌끌 혀를 차면서 몸을 돌려 회의실 문으로 향했다.
“네놈들이 껌뻑 죽을 새 가주도 생겼겠다, 어디 열심히 꾸려 나가 보거라.”
“…껌뻑 죽다니.”
“뽀동뽀동 귀여운 것이 조만간 가문 다 홀리게 생겼구만, 뭘……. 봐라, 난 벌써 샀다.”
그녀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날개가 달린 작은 드래곤 해츨링이었다.
정확히는 은빛 비늘에 아주 흐릿하게 핑크빛이 돌고 있는 진짜 같은 인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