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6
“헉, 그건……!”
아크레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트’가 내놓은 5개 한정판이었던 에이린 해츨링 버전 인형! 나도 못 산 건데 어머니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요?!”
“연륜이 있으면 사지 못할 게 무에 있겠누.”
“……예?”
저게 뭐라고?
내 해츨링 버전? 나도 보지 못했는데. 그때 거울을 보지 못했었다.
근데 아크레아 사파일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새하얗게 질려선 슬쩍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데반느에게 닿아 있었다. 정확히는 데반느가 들고 있는 인형에 말이다.
‘…저건 나도 가지고 싶은데.’
멀리서만 봐도 퀄리티가 대단했다. 내가 눈을 반짝 빛내는 걸 봤는지 에르노 에탐이 웃었다.
“가지고 싶니?”
“네? 가질 수 있어요?”
“그럼, 당장 가져오마.”
그러면서 아빠가 막 검을 뽑으며 일어나려고 했다. 내가 화들짝 놀라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설마 할머니 거 뺏으려고요……?”
“그럼?”
“할머닌데요…?”
“따님. 아빠가 설마 어머니를 죽이기라도 하겠니. 그건 패륜이란다.”
그가 국어책을 읽듯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나는 아빠가 좋지만 사실 당신 인생이 패륜이잖아, 이 망할 아빠야. 과하다고!
“팔다리는 두 개씩이니 하나씩은 없어도 될 거다.”
“허참, 저 싹수 누런 것. 손녀야.”
“네?”
“저눔아 어릴 적 사진이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오거라. 내 아주 종류별, 연도별로 잘 모아 놨으니.”
아빠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뽑고 해사하게 웃었다.
만면에 활짝 핀 꽃 같은 미소와는 다르게 기세가 살벌했다. 그러자 데반느가 지팡이를 꺼내며 웃었다.
“어디 어미 한번 베어 볼 테냐.”
“하지 마세요, 아빠.”
화목한 가정이 파탄 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데반느가 얄미운 말을 하기는 했지만, 사과도 받았으니 이미 끝난 일이다.
“금방 다녀오마.”
이미 흉흉한 기세의 아빠가 내 머리를 슥 쓰다듬고 옆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싸우면… 아빠랑 할머니 둘 다 2주 동안 안 볼 거예요.”
내가 볼을 퉁퉁하게 부풀리며 말한 순간이었다.
이미 휘두르고 있던 그의 검이 가볍게 원을 그리며 다시 검집에 쏙 박혔고 데반느의 지팡이는 그녀의 손에 더는 없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구나.”
“쯔즛, 내가 자식새끼를 잘못 키웠지.”
그녀가 혀를 끌끌 차며 몸을 돌렸다.
“아가, 다음에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놓을 테니 꼭 오거라. 이놈들 사진도 전부 있으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원탁을 싹 훑었다. 아연실색한 그 표정들을 보고도 그녀는 유유자적 회의실을 나갔다.
“그게 사진으로 남아 있을 줄은….”
“이 건에 대한 대책은 나중에 세우는 걸로 하고 일단… 하타르 건은 이렇게 마무리하면 되는 건가?”
차르니엘이 나를 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차적으론 일단 하타르와 흡사한 가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 다음은…….
‘범인이 자주 보이는 곳이 도박장이라고 했지…….’
내용을 가만히 떠올려 봐도 도박장에 관련된 내용은 많이 없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지.”
엥, 다음 안건도 있었어?
“슬슬 우리 가주님에 대해 언제 밝힐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
차르니엘의 말에 아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굳이 밝혀야 하나?”
“그래야 쓸데없이 덤비는 놈들이 없을 테니까. 이번 가주님은 특수한 케이스니까 말이야.”
차르니엘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넬리아 자르단이 입을 열었다.
“이쪽은 전문가가 따로 있잖아, 레아. 어떻게 생각하니?”
“……어? 뭐가?”
“뭐긴…, 대화 안 들었어? 설마 아직도 어머니께서 가지고 있던 인형 따위를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따위라니! 그게 얼마나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나는 무려 이틀이나 줄을 섰는데도 구하지 못했었다고!”
아니, 내 인형이 그렇게 인기가 많아? 근데 내 인형이 왜 바깥에서 팔리고 있는 건데……?
나한테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회의 중이잖니…?”
넬리아 자르단의 쇠 부채가 콱, 원탁 위에 처박혔다. 아크레아 사파일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아크레아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내 생각엔 연회에 두세 번 정도 얼굴 비치게 한 뒤에 밝히는 게 어떨까 싶은데.”
“연회에?”
“응, 일단 조카님이 실존하는지 아닌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고……, 뭣보다 이제 조카님이 가주니까.”
아크레아 사파일이 말했다.
눈도장 몇 번 찍고 내보내자는 의견인 듯했다.
“이번에 열리는 황성 연회에 동반 참석하는 게 제일 좋겠지.”
“그래, 그게 좋겠군.”
차르니엘 에탐이 나를 보았다. 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개망나니 일도 좀 해결해야지. 가주라는 얘기가 나오면 반드시 혈통 문제도 거론될 거야.”
“……그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그래, 굳이 들어서 좋을 건 아니니까.”
아크레아 사파일과 아빠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제법 길었던 회의가 끝이 났다.
* * *
“그것보단 이 화사한 쪽이 더 나아!”
“무슨 소리야? 화려하기만 하면 여자애들이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넬리아 언니보단 내가 훨씬 더 사교계에 눈이 밝아! 이 화사한 쪽이 백배 더 낫다니까?”
“어머, 레아. 넌 지금 상인의 눈을 무시하는 거니? 이쪽이 반드시 대박 날 거야.”
“웃기지 마, 그거 언니네 상단에서 판매하는 옷감이잖아!”
“그럼 그건 네가 운영하는 부티크에서 파는 디자인의 드레스가 아니고?”
넬리아와 아크레아가 싸우고 있다. 각자 양손에 드레스를 든 채로.
내가 굳어져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차르니엘을 바라보자 그가 내 시선을 느낀 듯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제 여동생들을 보았다.
“으음, 차라리 이쪽 병아리색은 어떻지? 우리 막내 조카에게 더 잘 어울리지 않겠나?”
나는 차르니엘이 가리킨 드레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는 입 좀 닥치고 있어.”
“동감이야. 예나 지금이나 보는 눈이 저렇게 없어선…, 대체 새언니한테 청혼은 어떻게 한 거람?”
아크레아 사파일과 넬리아 자르단의 공격에 차르니엘 에탐이 쪼그라들었다.
커다란 덩치로 입술을 툭 내밀곤 구석에 박혀 무릎을 끌어당기는 모습에 나는 입을 벌렸다.
“…….”
“원래 옛날부터 저랬다.”
아빠가 늘어진 드레스를 하나하나 보면서도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내 궁금증에 대답을 해 주었다.
‘회의 땐 완전히 카리스마가 흘러넘쳤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즐겁지 않은 것은 나뿐인 모양이었다.
‘……왜 드레스 한 벌 사는데 연회장이 꽉 찰 정도의 드레스가 늘어져 있는 건데?’
재벌들의 돈지랄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은 드라마나 뉴스만 봐도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의 그 이상이었다.
“가주님……, 이건, 어때……?”
“어……, 무서워요….”
하이엘 에탐이 가져온 검고 붉은색의 드레스를 보며 나는 몸을 움츠렸다.
“……아, 그래…?”
그가 실망한 듯 몸을 돌려 드레스를 돌려 놓더니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왜 다들 대리 쇼핑을 하고 있느냐고.’
내가 막 헛웃음을 삼킬 때였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이런 멍청한 인간들은 도저히 못 봐주겠군.”
역시 여기에 정상인은 그나마 크루노 에탐뿐인 걸까?
곁에서 느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크루노 에탐은 드레스 한 벌을 내게 내밀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가 앉은 소파 옆자리에 턱 앉았다.
“그냥 이걸로 정하고 끝내라.”
“…….”
삼촌은 대체 언제 쇼핑한 건데.
왜 또 이렇게 당당한데.
‘…뭐야, 예쁘잖아.’
뭐가 이렇게 제대로 된 드레스야. 얼마나 진지하게 쇼핑한 거냐고.
나는 멀거니 앞을 보았다.
모두가 날 위해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티격태격하긴 하지만, 에탐 가문은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은 가족이었다.
다른 가문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가문은 작위를 위해서, 돈과 명예를 위해서 죽도록 싸우곤 할 텐데 내가 있는 이 가문은 달랐다.
이 모든 것은 내게 현실로 일어나고 있지만 현실성이 없는 것들이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 미뤄 둔 질문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파지직-
생각하는 순간 눈동자 안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자 크루노 에탐이 나를 봐 왔다.
내가 어설프게 웃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다시 제 형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저 자다가 눈을 뜬 것뿐인데.’
무릎을 끌어안으며 나는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감출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이뤄지는, 내가 꿈꿔 왔던 가족이 있는 이런 꿈만 같은 세계가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언뜻 위화감이 느껴졌던 탓이다.
‘마지막에 나는 잠을, 잤지…?’
의문을 갖는 것과 동시에 두통이 밀려왔다.
파지직-
눈 안에서 희게 튀는 스파크에 손을 들어 눈두덩을 꾹 눌렀다.
‘잠이… 아니었나?’
마치 정답이라는 듯 어긋나듯 튀던 스파크가 사라지고 머릿속을 헤집던 두통이 가셨다.
‘아니었다고…?’
그럼, 대체 난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멀쩡하다면 죽지 않아야 했잖아. 그러면 이 세계에 오는 일도 없어야 했다.
“에이린? 괜찮니?”
“아, 아빠…….”
“그래, 불러도 모르기에. 몸이 좋지 않으면 돌아가서 쉬겠니?”
“아뇨, 아니에요.”
다정하고 상냥한 아빠.
“으악, 진짜 부티끄를 옮겨 놨네! 우리도 참전할 권리를 달라!”
“맞습니다, 불공평해요.”
“에이린 옷 고른다면서요! 헉헉, 저도, 헉… 고를게요!”
꿈에 그리던 형제와 사촌.
“어린 것들은 빠지렴.”
“그래, 가서 공부나 더해.”
“신학도 배워 두면 좋다.”
유쾌한 삼촌과 고모들까지.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게 완벽할 수 있지?
문득 의문을 가지는 순간,
끼이익-
덜컹.
무언가가 어긋난 소리가 들렸다.
덜컹. 덜컹. 덜컹.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난 듯 그것은 연신 고장 난 소리를 내며 내게 한 조각 의문의 파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