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7
“힘들면 돌아가자, 아가.”
“아니에요. 좋아요. 다 좋아요.”
나는 냉큼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생각을 그냥 쭉쭉 밀어 버렸다. 이렇게 기쁜 날 생각하고 싶진 않은 내용이었으니까.
내 말에 나를 걱정스럽게 보던 아빠는 썩 마뜩잖은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크루노 에탐이 가져다주었던 드레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곤 그 자리에 자신이 골라 온 드레스를 올려 두는 것이다.
“……멀쩡한 옷은 대체 왜 던지지?”
“사춘기 옮아.”
“그게 무슨 소리야?”
“사춘기 반항을 이 나이까지 했으니, 병일지도 모르지. 잘못해서 내 따님한테 옮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크루노 에탐이 세상천지에 난생처음 보는 또라이를 보는 표정으로 아빠를 떨떠름하게 보았다.
“한심하긴…….”
“여태까지 사춘기를 겪은 형님이 더 한심하지.”
“…….”
이거 중2병이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작가가 차마 로판이라 그 단어를 적지 못해서 사춘기 정도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막내 조카야!”
“야!”
넬리아와 아크레아가 제 다른 형제들을 전부 밀어내고 승리를 거둔 듯 내게 달려와 드레스를 하나씩 내밀었다.
“뭐가 더 맘에 들어!”
헉헉, 숨을 몰아쉬는 그녀들의 뒤로 난장판이 된 온갖 드레스가 보였다.
‘저게 얼마야…….’
자고로 가격표도 붙어 있지 않은 옷은 들춰 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연회장 가득 놓인 수백 벌의 옷이 처참히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넝마가 된 하이엘 에탐과 차르니엘 에탐이 보였다.
아무래도 두 자매를 이기진 못한 모양이었다.
둘 다 무척 예쁜 드레스였다.
“두, 둘 다 예쁜데요?”
“뭐? 선택해야 해. 황성 연회에 드레스를 두 벌 입고 갈 순 없으니까!”
“황성 연회는 닷새간 지속되니까 번갈아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구석에 박혀 있던 차르니엘이 언제 그랬냐는 듯 크루노 에탐의 뒤에서 말했다.
“아……! 그럼 딱 맞네.”
아크레아 사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거, 언니 거, 막내 거, 그리고 크림 거, 남은 하나는…….”
아크레아 사파일이 기대감에 찬 하이엘의 시선과 차르니엘의 뿌듯한 표정을 보며 팔짱을 꼈다.
“마지막은 이게 좋겠구나.”
예고도 없이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데반느였다.
그녀는 시녀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시녀가 들고 있는 드레스는 연보랏빛의 색감이 무척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와아…….”
내가 봐도 절로 감탄사가 흐를 정도였다.
“그 인간이 별 같잖은 드레스를 주문하려고 하기에 내가 중간에 좀 끼어들어 봤다. 마음에 드느냐?”
“네!”
너무 눈에 띄지도 않는 색이면서 내가 좋아하는 파스텔 색감이었다. 밤이 되기 직전, 별이 박힌 듯한 은빛의 무늬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럼 마지막 건 정해졌구나.”
“네.”
“말도 안 돼! 어머니 치사해요. 이렇게 갑자기 끼어드시다니요.”
아크레아 사파일의 말에 데반느가 웃었다.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이런 파티를 준비한 건 말이 되고?”
“그건…….”
“레아, 이기지 못할 싸움은 걸지 말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체리나 너나 옛날부터 질리지도 않는구나.”
“……으, 어머니 정말 짜증 나요.”
아크레아 사파일이 고개를 홱 돌렸다. 불퉁하게 부푼 뺨을 보며 데반느가 웃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차르니엘 에탐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애칭들 다 무슨 일이야.
“우리 손녀를 처음 내보내는 곳이니 힘줘서 치장해야겠지.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알고 있어요.”
“조금 이르지만 샤르네의 데뷔탕트도 함께이니 모두 도와주도록 하고.”
“오…….”
넬리아 자르단과 아크레아 사파일이 동시에 눈을 빛냈다.
“그럼 가주님을 꾸몄으니 이번에는 실피 언니의 딸을 꾸며 볼까?”
두 여인이 후다닥 연신 옷을 고르고 있는 샤르네를 낚아챘다.
“꺄아악! 뭐, 뭐예요?!”
“흐흐, 옷 골라야지?”
“전 이미 생각해 둔 옷이…… 꺄악!”
아빠가 이 틈을 타 나를 품에 안았다.
“이만 이 시끄러운 시장 같은 곳에서 돌아가자꾸나.”
“네.”
슬슬 나도 피곤해지고 있었다. 내가 길게 하품을 하자 그가 내 등을 토닥였다.
‘몇 시더라?’
내가 손을 꼬물꼬물 움직여 아빠의 상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연스레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제 정오네.’
내일은 시장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아빠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차 싶어서 시계를 꼬물꼬물 다시 안주머니에 넣어 주자 그가 웃었다.
“거기에 시계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니?”
어, 그러게.
어쩐지 그냥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드래곤의 능력인가?
“그냥…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
“네.”
내가 움츠러들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아빠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낮잠 잘 시간이구나.”
“네에…….”
사실 열 살이나 됐으니 낮잠이 필요한 나이는 아니지만, 아빠는 꼭 나를 재워 주려고 했다.
‘이러다 버릇되겠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끔뻑끔뻑 감겼다. 아빠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잘 자렴, 따님.”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나는 끝도 모를 어둠으로 푹 빠져들었다.
* * *
황성 연회 준비는 정말 순식간에 끝났다. 내 참가는 꽤 급작스럽게 정해진 모양인지 모든 것이 빠른 진행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주가 지나 있었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멍하니 덜컹거리는 마차에 앉아 나는 한껏 꾸민 아빠를 열심히 살폈다.
에탐 가문은 웬만해선 전원 참가하는 모양인지 움직이는 마차 수만 열 대가 족히 넘었다.
거의 행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나는 아빠와 칼란, 실리안, 그리고 샤르네와 함께 마차를 탔다.
‘진짜 다들 멋지다.’
한껏 물오른 외모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약간 왜 다들 나를 솜털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내가 객관적으로는 제법 귀여운 편이기는 하지만…….
여기 사이에 있으니까 좀 대단히 평범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너무 주변 후광이 뛰어나서 내 얼굴은 묻힌다고 해야 할까?
“따님.”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냥, 두근두근거려서요. 이런 곳에 참가하는 건 처음이니까요.”
실제로도 생일 파티 같은 것도 해 본 적이 없고 그런 곳에 초대받은 적도 별로 없었다.
망할 남동생들은 내가 행복하면 뭐가 그렇게 고까웠는지, 꼭 친하게 지내는 친구한테 가서 이간질해댔으니까.
“에이린.”
“응?”
“네가 최고야. 걱정 마.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너야.”
샤르네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따뜻한 손이 기분 좋아서 배시시 웃자 맞은편에 있던 칼란이 냉큼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말한 건 다 완성했어. 그리고 두근거릴 것도 없어. 다 너 한 번 보겠다고 오는 놈들이야.”
“그래?”
“응, 네가 참가한다는 소식이 일주일 전쯤 돌았는데, 그때부터 오늘까지 수도로 들어온 마차 수가 평소의 일곱 배래.”
칼란의 대답에 실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솔직히 감도 오지 않는 숫자라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그렇구나…….”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내가 드래곤이라서?”
“아직은 그렇겠지. 네가 가주직을 계승한 건 에탐과 황족 몇몇이나 아는 얘기니까.”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놀라웠다. 손바닥으로 뺨을 꾹꾹 눌렀다.
“어? 얘 뺨 발개졌다.”
“정말?”
“진짜네….”
샤르네와 두 형제가 짓궂게 다가왔다. 내가 당황해 허둥거리는 순간 몸이 덜렁 들어 올려졌다.
“아빠…?”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나를 보던 에르노 에탐이 창문을 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도착했다.”
뒤늦게 찾은 이유를 변명으로 둘러대는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숙부님도 참…….”
“아버지…….”
“내리지.”
뒤에서 들려오는 야유 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가 나를 품에 안은 채 단숨에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우르르 내린 에탐 가문의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약간 민망해졌다.
그 열의 맨 앞 중앙에 내가 있다는 것이 조금 믿기지 않아서 나는 아빠 품에 안긴 채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이렇게 도망치는 것도 관두긴 해야 되는데…….’
아직은 가주라는 게 밝혀지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뒤를 흘긋 보니 크루노 에탐도 참석한 것이 보였다.
흰 신관복을 입지 않은 사내는 조금 편안하게도 보였다.
“에르노 에탐 가주님 외 에탐 가문의 일원이 입장하십니다!”
사위가 적막해지고 그 속에서 아빠는 당당하게 카펫을 밟으며 걸어 들어갔다.
“에이린, 우리 옆에서 떨어지지 마.”
“응.”
연회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에 숨이 막힐 때쯤 칼란 에탐과 실리안 에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쪽에 있자.”
두 사람은 연회의 빈자리에 나를 세우고 지키듯이 서 버렸다.
두 사람이 눈을 얼마나 부리부리하게 떴는지 사람들이 이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하면 흠칫하고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렸다.
은근슬쩍 다가오려던 사람도 멀어져서 이윽고 우리 주변으론 개미 한 마리 기어 다니지 않게 됐다.
민망함에 고개가 푹 숙어졌다.
“뭐 좀 먹을래?”
“응.”
“그래? 그럼 내가 맛있는 거 가져다줄게. 여기 잠깐 있어.”
“내가 갈게, 형이 에이린에 대해서 뭘 알아?”
“너보단 많이 알걸?”
“그럴 리가. 난 에이린이 무슨 색 양말을 신는지도 알고 있다고.”
그게 뭔데.
그걸 왜 네가 아는데.
“허, 맨날 검술 훈련이나 다니는 놈이 알긴 뭘 알아? 그거 스토커야.”
“연구실에 박혀 있는 형보단 낫겠지. 관심이야, 형.”
칼란 에탐과 실리안 에탐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음, 이 두 사람을 붙여 놓은 건 아빠의 실수였을지도.
“그럼 어디 내기해 볼까?”
“좋아.”
“5분 안에 에이린이 가장 좋아하는 먹을 거 찾아오기. 어때?”
“좋아! 에이린, 5분만 딱 여기에 있어. 알았지? 우리 금방 다녀올게.”
두 사람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인파 사이를 뚫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겨우 5분이긴 하니까….’
아마 아빠한테 들키면 두 사람 다 크게 혼나긴 할 것 같다.
몸은 다 큰 것처럼 보여도 역시 아직 어린아이구나 싶었다. 가볍게 웃으며 뺨을 문질렀다.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 쫓아낸 덕분에 한동안은 아무도 오지 않겠…… 어?’
생각하는 도중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짙어졌다. 고개를 들자 화려하게 생긴 소년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낯익은 문양이 새겨진 드롭 귀걸이를 차고 있는 소년은 짙은 자수정빛 눈동자에, 그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아래로 갈수록 색소가 옅어지는 특이한 장발의 소년.
그 눈에 익을 정도로 낯익은 모습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안녕.”
“……리하…르트……?”
리하르트 콜린이었다.
어느새 훤칠하게 자란 새하얀 피부의 소년은 내 부름에 눈매를 초승달로 예쁘게 접어 보였다.
사람을 홀리게 할 법한 아름다운 미소였다.
“쑥쑥 큰 걸 보니 잘 지냈나 보네, 뱀뱀아.”
“…….”
“난 못 지냈는데.”
리하르트의 손가락 끝이 내 뺨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편지도 하다가 뚝 끊기고 만나러 오겠다고 하더니 오지도 않고…….”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살짝 음울해졌다.
“뱀뱀아, 나 화 많이 났어. 그러니까 우리 어디 좀 같이 갈래?”
리하르트 콜린이 다정하게 물어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