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8
“지금?”
“응.”
훌륭하게 큰 건 좋은데, 그래도 가족을 만나 부모님이랑 자라서 미친 또라이로 크진 않은 걸까?
갑작스럽긴 하지만,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멀쩡하게 보이는 제안이기는 했다.
“응? 가자, 뱀뱀아.”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리하르트가 활짝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 미소에 주춤 물러나자 리하르트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너무해, 나랑 가족이 되어 주기로 했으면서.”
리하르트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잔망스럽기 짝이 없는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리하르트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럼 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야가 뒤집혔다.
‘아, 얘 마법사였지.’
그것도 미래의 마탑주가 될 인재 중의 인재.
울렁거리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시야에 경악스러운 풍경이 담겼다.
아기자기한 방이었다. 파스텔 색감으로 다채롭게 꾸며진 방에는 아기자기한 것들이 가득했다.
눈에 들어온 장식장에는 도마뱀 인형이나 조각상, 그리고 각종 해츨링 인형이 늘어져 있었다.
그뿐이랴, 바닥은 핑크빛 러그가 깔려 있고 침대는 푹신푹신해 보였다.
내 몸을 덜렁 들어 올린 리하르트가 나를 침대 위에 앉혔다.
그러더니 주변으로 간식거리를 늘어놓고 심지어는 소설이나 책등을 산처럼 쌓아 두는 것이 아닌가.
침대 바로 옆에는 설렁줄이 늘어져 있었고 방의 사방에는 마석이 각각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하나는 숫자가 적힌 걸 보니 온도조절기처럼 보였고 또 하나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것을 보아 공기정화 역할을 하는 마석처럼 보였다.
나머지 두 개는 겉보기로는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침대 바로 옆 탁자에는 과일이 수북하게 놓여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과일도 있었고 완전히 열대지방에서나 나는 과일부터 추운 북부에서만 나는 과일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바깥으로는 평화로운 풍경이 보였고 왼쪽으로 돌리면 이제 커다란 식탁에 수십 가지의 음식이 늘어진 모습이 보였다.
넓은 방의 맞은편엔 푹신한 침대도 보였고 인형과 장난감은 물론이고 각종 스노우볼과 놀잇감도 가득했다.
내가 당황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자 리하르트가 이불을 가져와 나를 돌돌 말고는 따끈따끈한 마석을 배 위에 올려 주었다.
그 모든 것들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따끈따끈한 마석이 몸을 흐물흐물 녹였다.
번잡스러운 생각까지 녹아내리는 기분에 눈꺼풀도 감길 듯 말 듯 했다.
내가 꼬물거리자 리하르트가 그 틈으로 푹신한 해츨링 인형까지 안겨 주었다.
‘이건…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거랑 똑같은 거잖아?’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당황한 나를 보던 리하르트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뱀뱀아, 뭐 불편한 거 있어?”
“어, 아니……?”
불편한 거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편해서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까?
‘근데 난 왜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건데?’
당황스러움에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도마뱀 한 마리가 그의 옷 소매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코앞에서 도마뱀과 눈이 맞았다. 그 탓에 가물거리던 눈이 번쩍 뜨였다.
도마뱀이 후다닥 놀라 다시 리하르트의 소맷자락으로 모습을 감췄다.
새하얀 비늘에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도마뱀이었다.
“널 찾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키우게 됐어.”
내가 도마뱀을 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리하르트가 말했다.
“이름은 흰뱀이.”
……너 그 엄청난 작명 센스는 여전하구나.
“뱀뱀아, 나 정말 너 많이 기다렸어.”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리하르트가 김밥처럼 돌돌 말려 손만 나와 있는 내 손등에 허리를 숙여 이마를 비볐다.
“네 편지도 기다렸고 너도 기다렸고 내가 병X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기다렸어.”
못 본 새 제법 말투가 거칠어졌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매번 리하르트가 뒷전이었던 건 사실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리하르트는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게 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그러다가 네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리더라. 근데 또 네가 드래곤이라는 얘기도 있었어.”
내가 보지 못한 사이 훌쩍 큰 리하르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리하르트가 이제 열세 살이었던가?’
5년이 지났으니 아마 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여덟 살 때의 내가 어땠더라?
“내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저 흘리듯 말했던 약속도 꼬박꼬박 기억해서 멍청하게도 날짜를 헤아리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너도나도 외톨이니까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주는 거야, 어때?] [약속했다!]너도 나와의 약속을 나처럼 그렇게 하나하나 헤아리며 기다렸겠구나.
5년 동안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리면서.
거기까지 생각하자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과 함께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내가, 잘못했….”
“그래서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데리러 가기로 결정했어.”
리하르트가 화사하게 웃었다.
늘어진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렸다. 산뜻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눈빛은 어쩐지 조금 무서웠다.
“어…?”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면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마. 여기에 있자, 뱀뱀아.”
“그건 좀…….”
모든 게 호화스러운 이 방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만반의 준비를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내 옆에만 있어. 널 귀찮게 하는 세상 모든 놈들을 전부 없애 줄 테니까. 원하는 건 뭐든지 줄게.”
낯익은 대사에 눈이 절로 커졌다.
내가 놓아 버린 탓에 이미 미친놈으로 각성해 버린 건 아닐까?
“가족은……, 내가 찾아 준 가족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아니. 좋았어, 너무 좋고 행복했어. 그래도 네가 없어서 슬펐어. 넌 내 첫 가족이잖아.”
웃는 얼굴이 어찌나 서글프게만 보이는지, 나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날 여기에 가둔 거야?”
“아니, 네가 나갈 필요 없이 만들어 봤어. 원래 널 위한 방이었거든.”
네가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덧붙이는 목소리에 섞인 미약한 원망에 입술을 뻐끔거리던 나는 꼬물꼬물 팔을 빼서 리하르트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
내 사과를 듣고도 리하르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야, 나한텐 리하르트도 소중했어.”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행복이 너무 한순간에 나를 덮쳤다.
평생 살면서 오로지 소원하고 꿈꾸기만 했던 모든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끊임없이 내 품에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것들을 전부 가지고 싶어서 꾸역꾸역 욕심을 부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난생처음 생긴 가족이라서……. 친구라서……. 내가 너무 많이 부족했어.”
버거운 것을 알면서도 다 가져 보겠다고 버둥거렸다.
리하르트의 애정을 알면서도, 이 애라면 조금 더 기다려 주겠지 하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너와 가족이 될 순 없어. 리하르트, 미안해. 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생겼어. 내가 제일 좋대.”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어린 시절, 차미소는 매일 밤 잠에 들기 전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하느님이 뭔지도 몰랐고 부처님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사람들이 대단한 존재라고 하니까 그저 소원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부모님이 생기기를. 나를 다정하게 대해 주는 뭇 이야기 속 남매가 생기기를. 함께 즐겁게 놀고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생기기를.
때때로 내가 기연을 만나 아주 높은 사람의 가족 같은 사람이 되거나, 어른이 되어 크게 성공해서 가족들을 무시하는 상상도 했었다.
한번 해 본 반항에 종아리에 피가 터질 정도로 맞았을 때도, 억울한 일이 있었을 때도, 입학식에 혼자서 외따로 서 있었을 때도, 졸업식에 혼자서 빈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 모든 설움 가득한 시간에 소설과 상상이 내 숨통을 틔워 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상상만 하던 모든 것들이 무서울 정도로 현실로 이뤄졌다.
“내가 평생 들어 보고 싶었던 꿈같은 말을 해 줘. 함부로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해서 미안해.”
“…….”
“난 네 가족이 될 수 없어…….”
애초에 단추를 잘못 끼웠다.
처음부터 친구로 지내자고 했었어야 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정말로 미안해.”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리하르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보, 뱀뱀이.”
리하르트가 내 뺨을 꾹 붙잡아 들었다.
“너, 그렇게 말하면 내가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해?”
후두둑.
내 이마 위로 리하르트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구겨진 얼굴을 멍하니 보던 나도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허어어엉.”
무슨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아서 더 미안했다. 과거의 내가 생각나서 더 서러웠다.
겨우 이게 뭐라고 그렇게 서러웠는지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이나 엉엉 울었다.
우리는 한참이나 울어 젖힌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가족이 되자는 말은 이제 안 할게.”
리하르트가 퉁퉁 부은 붕어 같은 눈으로 말했다. 리하르트의 꼴을 보니 내 꼴도 어떨지 짐작이 됐다.
‘아, 눈 뜨거워.’
눈 주위가 후끈후끈했다.
리하르트는 어디서 났는지 차가운 수건으로 내 눈을 푹 덮어 주더니 제 눈에도 수건을 덮고 내 옆에 드러누웠다.
우리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침대에 늘어졌다.
“응, 우리 친구 하자.”
“그건 싫은데.”
“……어?”
가족이 아니면 싫은 거야? 방금까지 분위기 좋았잖아.
내가 당황해서 버둥거리자 리하르트는 짓궂게 내 눈 위에 손수건을 꾹 눌러서 날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응, 대신 나랑 결혼하자. 그것도 다른 의미론 가족이지? 응?”
“…….”
아빠, 얘 이상해요.
내가 황당함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파지직-!
어디선가 스파크가 튀는 소리가 나더니….
“결혼? 저승 가서 네놈 혼자 하는 게 좋을 거다.”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이 달랑 허공에 들렸다.
툭,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빠?”
드디어 밝아진 시야에는 화난 것이 분명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아빠와 마법으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는 리하르트가 있었다.
“따님, 다친 곳은…….”
그의 말이 뚝 멈췄다.
내 얼굴을 유심하게 곱씹듯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이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해졌다.
“납치에 살인 미수라니 죽어 마땅하지.”
“네? 살인 미수는……!”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몸에 물이 사라지면 죽는다고 하지.”
겨우 조금 운 것 가지고!
“충분히 살인미수구나.”
개똥 같은 논리를 정론처럼 내뱉은 그가 그대로 검을 뽑아 드는 순간이었다.
파도처럼 솟은 물이 아빠를 덮쳤다. 아빠가 내게 보호막을 씌워 준 덕분에 나는 한 톨도 젖지 않았다.
“내 아들! 괜찮으냐!”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