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Done Being a Hero, Unless It’s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76)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176화(176/204)
검은 연기를 뭉쳐 놓은 듯한 핵은 성검이 깊숙이 파고들자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퍽—! 작게 폭발하는 듯했지만, 아델리아의 오러와 성검의 신력이 더욱 과격하게 반응하며 터지는 바람에 그 작은 폭발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하늘로 떠오른 강렬한 빛이 사라지고 잠시 세상은 고요해졌다.
휘, 불어오는 밤바람이 슈미엘을 흔들고 지나갔다.
꼿꼿하게 섰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작은 바람에도 슈미엘의 몸은 크게 휘청거렸다.
『휴, ……시안.』
슈미엘의 왼쪽 얼굴과 왼쪽 어깨는 벌써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슈미엘에게서 떨어져 나온 휴시안은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휴시안의 안색이 창백했다.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은 파리했으며, 새하얀 피부 위로 검푸른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휴시안이 거친 호흡을 내쉬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왜……. 네가 왜 이렇게까지 날…….』
슈미엘의 말은 띄엄띄엄 뭉개지듯 이어졌다. 왼쪽 눈이 사라지고 왼쪽 입꼬리도 연기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한 탓이다.
휴시안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는데.”
하하, 웃음 섞인 음성이 떨렸다.
“휴시안……?”
아델리아가 휴시안을 부르자, 그가 슈미엘 뒤에 선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에게 부축받고 있었다. 엄청난 오러를 뿜어냈으니, 아델리아의 몸에도 상당한 무리가 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저주가 옮겨 가진 않았네.
휴시안이 쓰게 웃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걱정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
“휴시안……. 너 왜 그래? 너, 설마…….”
아델리아의 질문에 휴시안은 말없이 웃기만 하다 슈미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공녀님.”
내가 끝내지 못한 걸, 공녀님이 마무리 지어 줘서.
“그리고 저 아이에게 평온을 줘서……. 고마워.”
『…….』
슈미엘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신체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오른쪽 눈마저 연기에 먹히고 있었다.
그 마지막 시선이 휴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망이었다. 생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 눈동자에는 갈무리되지 못한 원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역시 얼마 있지 않아 연기가 되어 바스러졌다.
아델리아와 휴시안 사이에 우뚝 섰던 슈미엘의 존재가 허공으로 영원히 흩어져 버렸다.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품에서 걸어 나와 휴시안에게 향했다.
“휴시안……!”
그러자 휴시안이 뒷걸음질 쳤다.
“오지 마, 공녀님.”
“……이상하다 했어. 핵을 찌르고 나한테로 넘어와야 할 저주가 넘어오질 않아서.”
“…….”
핵을 찌르는 순간, 슈미엘이 걸어 놓은 저주가 넘어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델리아의 몸은 자신의 오러와 신력으로 가득했다. 그 어디에도 사특한 흑마법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휴시안이 쓰러졌다.
피부 곳곳으로 검푸른 핏줄이 흉할 정도로 불거져 있었다.
“왜 그랬어.”
“속죄.”
“뭐?”
“그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 ……이로써, 조금이라도 속죄가 되었기를 바랄 수밖에.”
“휴시안, 그게 무슨 말…….”
그때, 쿨럭.
휴시안이 검은 피를 토해 냈다.
“휴시안!”
휴시안은 아델리아가 다가오기도 전에 급히 마지막 마력을 끌어내어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곧장 마법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휴시안.”
황궁의 하늘 위로 드리워졌던 슈미엘의 결계도 산산이 조각나며 깨졌다.
비로소 승리였다.
***
날이 밝았다.
지난밤의 치열했던 전투가 거짓말인 것처럼, 황궁을 복구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동요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사상자가 많았고 황궁의 훼손이 심각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기사들은 지난밤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전투였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바로 성검이 깨어나, 성검의 주인. 즉, 제국의 진짜 영웅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봤다니까?”
“아니, 그 자리에서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어딨나! 다들 봤지!”
밤하늘을 가르듯 은빛 검날을 높이 치켜든 제국의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들으셨어요? 성검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 에스테르 공작가의 아델리아 공녀시래요!”
“응? 장남인 데릭 에스테르 경이 아니라?”
“그렇다니까요?!”
“그럼 뭐야. 제국 최초의 여기사가 나오는 건가?”
“어? 그렇게 되나요?”
“성검의 주인은 황제 폐하의 검이 되니까 말이야.”
“그렇네요?!”
성검이 깨어난 일로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는데, 그 성검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더욱 놀라워했다.
이렇다 할 공표가 없는 가운데,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마탑에서 마법사들이 황궁을 찾아왔다. 그리고 사람들을 도와 복원 마법으로 복구를 도왔다.
-마탑주께서 미리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마탑주 대리인으로서 황궁을 찾아온 밀튼이라는 마법사는 그렇게 말을 전했다.
휴시안의 상태에 관해 묻는 아델리아의 질문에 밀튼은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만, 저희도 휴시안 님의 행방은 알지 못합니다……. 워낙에 신출귀몰하신 분이셔서요. 단지……. 항상 그러했듯,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나실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밀튼은 조용히 물러갔다.
황궁 내부를 둘러보던 카르세스는 멍하니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양의 오러를 쏟아 낸 사람치고는 꽤 멀쩡한 것 같았다.
그러나 카르세스의 눈에는 보였다. 핏기 없이 푸르스름한 입술이며 집중력이 떨어져 흐리멍덩해진 눈동자며.
툭 치면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 것만 같은 그 위태로움이.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인지, 카르세스가 짧게 혀를 차며 아델리아의 손을 잡았다.
“어……? 전하?”
낮게 잠긴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큼, 크흠. 아델리아가 다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왜, 왜 그러세요?”
“일단 가지.”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카르세스는 황궁을 빠져나가 별궁으로 향했다.
황궁과 가장 멀리 떨어진 별궁이라서 그런가, 지난밤 전투에서 가장 멀쩡하게 살아남은 건물이기도 했다.
2층 계단을 빠르게 올라간 카르세스는 복도에서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고르게 들어오는 환한 침실이었다.
새하얀 캐노피가 우아한 곡선을 이루며 드리워진 침대로 카르세스가 성큼 걸어갔다.
어어? 하는 사이, 아델리아는 어느새 카르세스와 함께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카르세스는 방 안을 느릿하게 훑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한 번씩 쓰셨던 별궁이다. 평소에도 관리를 해 둔 덕분에 침구도 깨끗해.”
“……네?”
그래서요? 하며 되묻는 아델리아의 두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카르세스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전투에서도 영향을 덜 받아 훼손된 곳도 없고, 무너질 염려도 없고.”
아델리아가 말없이 눈을 깜빡거리고 서 있자,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앉혔다.
“그러니까 쉬라고.”
푹신한 침대에 푹 눌러진 아델리아가 다시 발딱 일어났다.
“쉬다뇨! 저 혼자 어떻게 쉬어요!”
모두가 복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데!
그러자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다시 눌러 앉혀 놓고 그 옆자리에 자신도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같이 쉬도록 하지.”
“……네?”
그러더니 뒤로 벌러덩 몸을 누였다. 그가 두 눈을 감고서 말했다.
“혼자서는 쉴 수 없다며. 그러니까 같이 쉬어 준다고.”
“저, 전하…….”
“누워.”
그 순간, 카르세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델리아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길에 이끌려 간 아델리아의 몸이 카르세스의 옆자리로 털썩 쓰러졌다.
어……?
놀란 아델리아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붙들고 있는 카르세스의 힘이 예상보다 강했다.
작정하고 벗어나려면 벗어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오러를 써서 손길을 뿌리칠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마음은 되게 불편한데, 확실히 누우니까 편하긴 하다.’
긴장이 단박에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몇 시간 전만 해도 생사를 건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이었는데, 이 고요와 이 평화는 마치 꿈결 같기도 했다.
아델리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몸부림을 치지 않고 조용해지자, 카르세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내가.”
아델리아의 시선이 조금 위로 향했다. 눈을 감고 있는 카르세스의 옆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카르세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곁에 있어 줄 테니까.”
“…….”
“아주 잠시만, 눈을 붙여.”
“…….”
아델리아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거워진 눈꺼풀을 그대로 감았다.
카르세스의 그 말 한마디에 주문에 걸린 아이처럼, 아델리아는 따스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