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Done Being a Hero, Unless It’s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93)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193화(193/204)
외전 2화
“아버지?”
데릭이 아델리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델리아가 결혼식을 올리고 황궁으로 들어간 지 1년.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에스테르 공작저에는 아델리아의 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어릴 적 쓰던 모습 그대로.
“여기에 계셨군요.”
“……그래.”
테오스는 데릭이 들어온 뒤에도 창밖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아델이 보고 싶어서 올라오신 거군요, 아버지.”
하하, 데릭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테오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출정을 나갈 때면 항상 이곳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생각해 보니, 단 한 번도 손을 흔들어 주지 못했다.”
그게 뭐라고.
잘 다녀오겠다는 그 말 한마디, 손 인사 한번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남들이 나를 영웅이라 부르면 무엇하겠는가.
아델리아에게는 제국의 영웅이 아니라, 곁에서 있어 줄 다정한 아버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버지…….”
“……난, 그 아이에게도. 데릭, 너에게도. ……좋은 아비가 되어 주지 못했구나.”
그러자 데릭이 성큼 걸어와 테오스의 곁에 섰다.
“아버지.”
데릭은 테오스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자랑처럼 들리시겠지만, 아델과 저는 훌륭하게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자 테오스의 시선이 데릭의 얼굴로 향했다.
데릭이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고, 아델은 이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었죠.”
“…….”
“그리고, 그런 저희를 지금까지 무탈하게 키워 주신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십니다.”
“…….”
“서운함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건, 아델리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데릭의 말이 끝나자, 테오스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의 입가로 은은한 미소가 깃들었다.
한동안 테오스와 데릭은 창밖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으나, 둘 사이에 흐르는 온기만큼은 봄이 찾아온 듯 따뜻했다.
데릭은 테오스의 말과 표정을 곱씹었다.
후회와 외로움. 데릭은 아버지의 목소리와 얼굴에서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외로우신 거야.’
아델리아가 공작저를 떠나고, 데릭 역시 결혼 준비를 하느라 공작저에 들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자식들의 빈자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테오스가 이렇게까지 속마음을 꺼내 놓는 일은 드물었다.
아주 가끔 술을 마셨을 때를 제외하면.
‘가만, ……술?’
설마!
데릭이 재빨리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아델리아가 사용하던 책상 위로 절반도 남지 않은 와인병과 깨끗하게 비어 있는 와인 잔이 보였다.
와인?!
데릭의 시선이 와인병에서 테오스에게로 황급히 옮겨졌다.
“아, 아버지. 설마, 저 와인을 혼자 드셨어요?!”
“아.”
테오스가 책상 위 와인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약간은 몽롱해진 시선으로 와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셨지. 네 외할아버지께서 좋아하는 빌렌드산 와인이란다. 어쩐지, 오늘따라 아버님이 생각나더구나. 딸을 보낸 아비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
“…….”
“너도 한잔하겠느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데릭이 와인병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이냐?”
“반병이나 드셨지 않습니까.”
그러자 테오스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다. 취하지 않았어.”
“…….”
데릭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실상, 테오스는 술이 약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아델리아는 달리, 테오스는 와인 한 모금이 한계였다.
식사 시간에도, 연회 자리에서도. 테오스는 예의상 입술만 축일 뿐이었다.
그런 테오스가 오늘은 와인을 반병이나 비운 것이다.
“데릭, 걱정하지 마라. 나는 멀쩡하니까.”
그의 말대로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테오스가 술에 취하더라도 술에 취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 터였다.
그러나 데릭은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촉촉한 눈동자와 살짝 붉어진 눈가, 평소보다 생기가 넘치는 두 뺨이 그가 취했다는 것을 방증했다.
‘게다가 아델리아의 방까지 올라오신 걸 보면…….’
술에 취한 그의 진심이 아델리아의 방까지 걸음을 옮기도록 한 것이 분명했다.
후우……. 데릭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아델과 다르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테오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말했던가? 아델이 이레네아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데릭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예? 어머니께서 아델리아처럼 술고래, 아니. 술을 잘하셨다고요?”
“그랬지. 네 할아버지조차 두 손을 들 정도였지.”
“…….”
그 정도였다고?
어쩐지…….
데릭은 과거의 아델리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전까지, 기사단원들과 종종 술 내기를 했었지.
‘그 숱한 내기에서 졌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아델리아와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술이 약하신데, 대체 누굴 닮았나 했더니.
‘그렇구나.’
아델이 어머니를 닮았던 거구나.
데릭이 속으로 웃으며 책상 위 와인병과 와인 잔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너무 무리하셨어요. 아델리아가 봤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냈을 겁니다.”
테오스가 쓸쓸한 눈으로 아델리아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 잔소리도 그립구나.”
“…….”
확실히 취하신 게 분명하다. 속마음을 저렇게 서슴없이 꺼내시는 것을 보면…….
데릭은 테오스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 와인은 안 됩니다.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
저런. 테오스가 야속하다는 눈빛으로 데릭을 쳐다보았다.
“……아델도 금주하란 말은 하지 않았었다.”
“전 아델이 아니잖습니까. 대신…….”
데릭이 테오스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다음부터는 차를 올리겠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차를 타는 솜씨가 좋거든요.”
“네가 말이냐?”
“예.”
데릭의 말에 테오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
늦은 새벽.
황궁에도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해가 뜰 때까지 조금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하.”
루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일을 마무리 지어 놔야지.”
카르세스의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아스틴의 고개가 창밖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새벽하늘은 어두웠다.
“곧 도착하시겠네요.”
“…….”
서류를 넘기던 카르세스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
“다친 곳은 없으셔야 할 텐데.”
“…….”
이어지는 아스틴의 말에도 카르세스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성검이 곁에 있으니 다치실 리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예상치 못한 일들이 갑자기 생겨—.”
“나가.”
“……예?”
참다못한 카르세스가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라고. 집중 안 되니까.”
“에이. 그게 저 때문입니까? 비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는 서신이 온 뒤로는 쭉 집중 못 하고 계셨으면서.”
“…….”
아스틴이 히죽거렸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하긴, 좋을 수밖에 없지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곧장 떠나 버리셨으니.”
“출정이다. 떠났다는 말은 어감상 듣기에 좋지 않군.”
“아, 예. 그 부분은 명심하겠습니다.”
하아. 카르세스는 결국 서류를 놓았다.
아스틴의 말대로 서류의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질 않았던 탓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이 나자, 이번에는 루드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데릭 경의 결혼식도 있으니 제법 오래 머무르시지 않을까요?”
카르세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아…….”
“다시 그 사람을 내보내려 하겠지.”
아델리아는 황태자비가 된 이후, 그 누구보다 바빴다.
황태자비로서가 아닌, 성검의 선택을 받은 영웅으로서.
물론, 황태자비로서 황실의 내정을 맡는 것 역시 아델리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민과 귀족들은 아델리아에게 황태자비로서의 활약보다, 영웅으로서의 활약을 더욱 기대하고 있었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검의 주인, 성검의 선택을 받은 제국의 영웅으로 제국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
그랬기에 아델리아는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있지 않아 황궁을 떠나야만 했다.
재앙과도 같았던 슈미엘은 처단했지만, 악시덤이 끌어들이고 슈미엘이 남긴 흑마법의 잔재들은 여전히 제국에 남아 있었다.
아델리아는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흑마법이 남긴 저주들을 처리했다. 무려 1년 동안.
“남쪽 귀족들은 한동안 조용하겠지만, 이번에는 북동쪽의 귀족 가문들이 개떼처럼 몰려오겠지. 당장 성검과 영웅을 보내 달라고.”
“…….”
카르세스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루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전하. 그 귀족들이 입을 다물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입을 다물도록 만들라? 어떻게?”
카르세스가 되묻자, 루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