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07
106화. 월말 평가 (5)
마주한 유리의 표정이 삐딱하고 불량스럽게 변했지만, 군터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눈은 너무도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있었다.
‘유리 홀랜드.’
상위 10명의 이름이 게시판에 붙은 순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위의 이름을 보았을 때부터 군터는 자신의 순위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과거의 기억들이었다.
요한 레드너의 부름을 받고 나타난 작고 깡말랐던 소년.
검을 쥐는 것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던 소년이 화신을 꺼내 흑검병을 쓰러뜨렸고.
너무도 당당하게 흑룡패를 받아 들었다.
그건 군터가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는 반드시 꺾겠노라고 다짐했던 마음속 경쟁자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랬던 과거의 기억이 근래의 기억들로 뒤덮였다.
요람으로 오는 흑선 안에 온종일 누워 있던 거지.
동기를 배 밖으로 밀어 빠뜨리고 되레 당당하게 소리치는 무뢰한.
백보 의식에서 자신보다 앞서 걷던 선두 주자.
그리고…….
[우득- 우드드득-!] [으아아아악!]포효를 내지르며, 아득바득 9번째 걸음을 내디디려 하던… 처절하고 고귀한 투사.
‘그게… 그게 전부 유리 홀랜드였구나.’
그렇게 뒤섞인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 자신의 눈앞에 선 이에게 투영되었다.
‘그리고 그 유리 홀랜드가… 지금 여기에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음속 경쟁자를 만난 군터는 심경이 복잡했다.
이건 그가 여기 있기에 기쁜 걸까?
아니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도 다른 재회에 배신감을 느끼는 걸까?
군터도 제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군터를 향해 유리는 싸늘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뭔데 알은척이야?”
“……?!”
“알은척할 거면 최소 본인 이름은 까고 합시다.”
유리의 냉랭한 말투에 군터는 움찔거렸다.
그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날… 모르나?”
“내가 알아야 되냐?”
“내 이름은… 군터 아이언스다. 이래도 모르겠나?”
“아!”
그 말에 유리가 탄성을 내뱉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모습.
이제야 유리가 자신을 알아차렸나 싶어 살짝 기대했던 군터는 곧 이어진 말에 주먹을 울끈 말아쥐고 말았다.
“아아! 네가 4위구나. 그래서 이 1위에게 무슨 볼일이시죠, 밑에 것… 아니, 4위 씨?”
히죽거리는 유리의 말투에 군터는 말아 쥐었던 주먹을 폈다.
‘그렇군…….’
그의 마음에 허탈한 감정이 깃들었다.
‘유리 홀랜드는 날 모르는구나.’
너무도 허탈하여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요람에 들어오기 전, 그는 마음속 유리 홀랜드를 경쟁자로 여기며 수련에 임해 왔었다.
그리고 그건 이 요람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만나게 될 유리를 이기기 위해.
그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최근까지도 최선을 다해 수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모두 다 허상이었다.
경쟁자라 여겼던 이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난 그럼 그동안 누구를 쫓아 왔던 거지?’
알고 있었다.
이게 유리 홀랜드의 잘못은 아니란 걸.
그냥 스스로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것뿐인데…….
‘…난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군터는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화를 억눌렀다.
그렇다고 해도 목소리가 다소 퉁명스럽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 네가 왜 여기 있는지 물었다, 유리 홀랜드.”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냐?”
“그야, 넌…….”
지금쯤 요한 레드너와 같이 수련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그런 말이 목젖까지 치밀었지만, 군터를 이마저도 집어삼켰다.
‘이것도 나의 추측일 뿐이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군터의 아버지인 아쉬라프가 그리 말했던 거였다.
군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유리가 거만하게 가슴을 펴며 혀를 찼다.
“쯧, 1위한테 시비를 걸고 싶은 4위의 마음은 잘 알겠다만…….”
이에 아린과 뽀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배고프다?”
“어허, 조용히 하거라! 너희 따위가 뭘 알겠느냐, 천하디천한 2위 나부랭이들아.”
“…….”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둘을 보고 무시하고 유리는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아무튼, 1위한테 시비를 걸고 싶은 4위의 마음은 내 잘 알겠으나…….”
거만하던 유리의 눈빛이 대번 서늘하게 변했다.
“시비를 걸고 싶으면 그만큼 털릴 각오를 하고 걸어. 오늘은 일단 경고다.”
“시비 건 게 아닌 거 같다니까?”
“배고프다?”
“조용히 하거라, 미천한 2위들아.”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아웅다웅하며 자리를 떴다.
평소에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존재가 멀어지고 있었지만, 군터는 유리를 붙잡지 못했다.
아직 자신의 머릿속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된 탓이었다.
‘지금 유리 홀랜드를 붙잡아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군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와 유리의 짧은 대화.
이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얼굴을 까고 나타난 검은 머리 그 녀석’의 이름이 유리 홀랜드란 것을 알게 되었다.
덩달아 그가 바로 이번 월말 평가에서 1위를 한 존재라는 것도 말이다.
이에 군터의 주변으로 몇몇이 모여들었다.
그 무리에 속한 넬리가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녀의 중얼거림에 파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뭐가 역시야?”
“가죽 모으기 퀘스트에서 보비크르탄카푸르타비가 모은 그 말도 안 되는 가죽의 개수. 그건 역시 혼자 모은 게 아니었던 거야.”
“그럼?”
“아까 그 세 사람. 그들 셋이 함께 모은 거겠지.”
넬리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유리, 뽀삐, 아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넬리 블랑의 이야기.
“그 정도의 가죽이라면 1등은 확실할 테니…….”
“그걸 한 사람에게 몰아줘서 정산한 거구나! 1위 특전을 노리고!”
“맞아, 어중간하게 2, 3위를 하는 것보다는 1위 특전으로 100% 추가 포인트를 노리는 게 더 이득이니까.”
“아아!”
“애초에 개인이 그 많은 가죽을 모을 수도 없거니와, 혼자서 곰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들 셋이서 곰을 잡았던 거야.”
“확실히 그렇겠네. 분명 그 보비… 뭐라는 사람이 100만 포인트 건 것 말고도, 나머지 둘이 그 정도 포인트를 걸 수 있던 거 역시 셋이서 그 많은 포인트를 나눠서겠네?”
“아마도.”
넬리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지만, 유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추론이었다.
아니, 진실을 말해 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유리 혼자서, 그것도 단 사흘 만에 늑대와 사슴, 토끼를 싹 쓸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당장 아린과 뽀삐만 해도 유리에게서 가죽을 받고 기겁했었다.
그걸 직접 본 이들도 안 믿었는데, 유리 혼자서 그 많은 가죽을 모았다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넬리와 파나가 서로의 추론에 고개를 끄덕이던 때.
“그럼 호랑이는?”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반 바스킨이 툭 끼어들었다.
이에 넬리가 눈을 끔뻑였다.
“…뭐?”
“그들 셋이서 어찌어찌 곰을 잡았다고 치자고. 그러면… 호랑이는 어찌 잡은 건데?”
“그건…….”
넬리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들 셋이 힘을 합쳤다고 해도 호랑이는 잡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란 걸.
그게 가능했다면 자신들 역시 힘을 합쳐 호랑이를 노렸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넬리는 추론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호랑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이반의 지적처럼 들리는 질문에 파나가 볼멘소리를 냈다.
“지금 우리가 얘기한 건 그들 셋이 힘을 합쳐 그 많은 가죽을 모았다는 건데, 뜬금없이 호랑이 얘기가 왜 나와?”
“그래서 꺼낸 얘기였다. 그들 셋이 모은 가죽에 호랑이 가죽도 있었으니까. 그건 바꿔 말해 그들 셋이면 호랑이급 강자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지금 와서 그걸 이야기해 봤자 뭐가 달라지는데?”
사실 파나의 말처럼 이미 퀘스트가 끝난 마당에 이를 논의하는 건 무의미했다.
어떤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호랑이가 잡힌 거는 기정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그 수가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하였기에.
또한, 그들을 향한 경계심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거였다.
그때, 파나와 이반의 날 선 공방을 듣고 있던 넬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어떤 특수한 조건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말에 클라리스가 흥미를 보였다.
“특수한 조건?”
“무력으로 호랑이를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어떤 특수 조건으로 호랑이를 무력화 시켜야 했던 게 아닐까?”
“흠… 일리 있네.”
넬리의 추측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때였다.
“유리 홀랜드… 그였구나. 그였기에 가능했던 거였어.”
멍하니 있던 군터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한 말에 놀란 군터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지척에 자리한 이들이 듣기에는 충분했다.
이에 주변에 모여 있던 기수들의 시선이 군터에게 향했다.
“뭐가? 뭐가 유리 홀랜드라서 가능했던 건데?”
“아, 그건…….”
군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살짝 당황했다.
세 사람이 협동하여 호랑이를 잡았다는 가정하에.
그들이 어떻게 호랑이를 잡았을지 고민하던 군터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유리 홀랜드’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 말이다.
그리고 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실수를 하고 만 것인데…….
“하아…….”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군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자신이 내뱉은 말이니 자신이 수습해야 할 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 홀랜드라면… 어쩌면 가능했을 거다. 호랑이를 잡는 게.”
“뭐? 어떻게?”
“자세한 방법은 나도 모른다. 다만, 그라면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유리 홀랜드란 존재를 맹신하는 듯, 두리뭉실한 답변.
다만 그걸 말한 이가 다름 아닌 군터였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들이 군터를 중심으로 모인 이유.
그건 군터 아이언스가 믿을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평소 그가 보여 주는 정직함과 신중함이라면 아무런 생각 없이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터.
안 그래도 다들 궁금해하던 것을 파나 테일러가 대표로 하여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그 유리 홀랜드랑 무슨 사이야? 잘 아는 거 같던데?”
“…….”
“혹시 뭐 더 아는 거 없어?”
그 질문에 군터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유리 홀랜드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게 맞나?’
분명 이 요람에서 그의 정체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일 거다.
요한 레드너의 제자.
화신을 부리는 소년.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고작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건 그게 끝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젠 불확실했다.
과연 유리 홀랜드는 요한 레드너의 제자가 맞나?
두 사람이 같이 떠났다고 해서 그들이 사제지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나?
그리고 화신.
그 또한 유리 홀랜드가 부리는 게 맞는 걸까?
짧은 고민 끝에 군터는 결론 내렸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구나. 유리 홀랜드에 대해서.’
하지만 딱 하나가 있었다.
“유리 홀랜드, 그는…….”
그가 유리 홀랜드에 관해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명확한 진실이.
“흑룡패주다.”
“……?!”
군터의 이야기에 경악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