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08
107화. 탕진 (1)
군터의 주변에 모인 이들.
끼리끼리 모인다고, 그들 전부가 최소 금룡패 내지는 백룡패를 소지한 자들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들 모두 용패 추천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며, 또한 증명 시험을 치르기 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용패는 모두 다섯 가지다.]딱 거기까지가 증명 시험을 치르는 이들에게 허용된 정보였다.
혹은 그마저도 못 듣는 이가 부지기수.
하지만 몇몇은 알음알음, 가문의 사람 혹은 용패 추천인으로부터 약간씩의 정보를 더 주워들었으니.
경악하는 기수들이 바로 그렇게 정보를 주워들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곧바로 불신이 깃들었다.
“…흑룡패주?”
“흑룡패를 말하는 건가? 그게 실존하긴 하는 거였어?”
그 물음에 다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군터를 바라보았다.
반면 그런 정보를 듣지 못했던 파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룡패가 뭔데? 용패 중에 그런 게 있었어?”
거기에 답을 준 건 넬리였다.
“백룡패보다 상위 등급의 용패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게 바로 흑룡패고.”
“백룡패보다 상위 등급이라고?”
“응, 그런데 실제로 본 사람은 극히 드물어서, 그냥 소문…….”
“소문이 아니다.”
넬리의 이야기를 군터가 끊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흑룡패는 소문 따위가 아니다. 직접 보았다. 유리 홀랜드가 증명 시험을 치르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흑룡패를 받는 것을.”
“그걸 봤다고? 어떻게?”
“그와 나는 같은 곳에서 증명 시험을 치렀으니까.”
“아…….”
“유리 홀랜드는 1년 전…….”
말을 하다 만 군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년 전?’
군터의 머릿속으로 1년 전 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유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건 분명 마체술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단련조차 되지 않은 육체였다.
그 당시의 유리 홀랜드는 화신이란 특수성을 떼어 놓고 보면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연이어 요람 본토로 오는 흑선에서 주근깨 소년을 바다로 빠뜨리던 유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좀 씻고 와라.]그 당시 유리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랐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자신이 일순간 그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거기다 유리는 용패갈이를 통과한 기수를 단번에 제압할 정도의 완력마저 보여 주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비를 걸고 싶으면 그만큼 털릴 각오를 하고 걸어. 오늘은 일단 경고다.]조금 전 유리 홀랜드가 경고하며 보인 그 서늘하고 강렬했던 기운까지.
그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변화였다.
그 모든 것을 떠올린 군터는 중얼거렸다.
“불과… 1년 만에?”
군터는 부릅뜬 눈으로 유리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 * *
“아는 사람이야?”
그건 유리를 따라온 아린이 던진 질문이었다.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면서 유리가 답했다.
“뭐가?”
“아까 그 녀석, 널 잘 알고 있는 눈치던데? 아는 사이 아냐?”
“흠…….”
유리는 턱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군터의 그런 반응에 의아해하고 있던 차였다.
‘군터라… 누구지?’
그리고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지 않은가.
‘어디서 봤더라?.’
테레시아와 싸우는 것을 봤을 때가 아닌.
흑선에서 말싸움을 했을 때가 아닌.
그보다 더 훨씬 이전에 군터를 본 기억이 있었다.
‘군터 아이언스… 군터 아이언스… 어? 아이언스?’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아, 그 녀석이군.’
한때 꽤 오래 머물렀던 아이언스 영지.
요한과 처음 만났을 때, 자신보다 먼저 요람의 증명 시험을 치렀던 영주의 아들.
그게 바로 군터였다.
그때보다 키가 많이 크기는 했지만, 확실히 그가 맞았다.
유리가 잘 아냐는 아린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다.
“알기는 개뿔, 예에에전에 스치듯 얼굴 한 번 본 게 다야.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고.”
“정말? 그런데 왜 그렇게 널 봤대? 난 또 오래전 생이별한 형제가 상봉한 줄 알았잖아.”
“배고프다.”
아린의 이야기에 뽀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유리가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딱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가 보기에도 군터의 눈빛은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나도 몰라 이것들아.”
군터가 자신에게 품은 경쟁심을 모르는 유리였기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
그러다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따르는 아린과 뽀삐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천하디천한 2위들아.”
“…그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
“꼬우면 1위 하든가.”
“우으으…….”
“아무튼 니들 어디 가냐.”
“가긴 어딜 가. 네가 가는 그 길이 우리가 가는 길이지.”
“아아, 날 따라오고 계시는 중이다?”
“응!”
“배고프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향해 유리가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네가 우리 집 제대로 구하고 다니는지 감시하러.”
“배고프다!”
그들의 이야기에 유리는 잠시 흠칫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거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가 움찔한 것을 본 아린과 뽀삐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쟤 움찔했지?”
“배고프다.”
끄덕끄덕-.
“그치? 분명 까먹고 있었던 거 같지?”
“배고프다.”
끄덕끄덕-.
“역시 그때 그냥 포인트를 넘겨주는 게 아니었어. 물건을 받고 주는 거였는데.”
“배고프다.”
끄덕끄덕-.
점점 더 가늘어지는 두 사람의 눈초리에 유리는 애써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까먹기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정말?”
“그럼! 그래서 말인데,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어떤 유형의 거처가 필요하냐?”
“…그걸 이제야 물어본다는 거는 아직 찾아보지도 않았다는 거잖아?”
“네, 맞아요. 까먹었어요. 미안해요. 어쩌라고요?”
“와, 뻔뻔한 것 좀 봐.”
“그래서 말 안 할 거냐? 어떤 유형의 거처가 좋은데?”
퉁명스러운 그 말투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아린.
그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는 높은 곳! 높은 곳이 좋아!”
“흠… 높은 곳이라. 좋아, 접수! 뽀삐는?”
“배고프다.”
유리가 아린을 바라보았다.
“아무 곳이나 상관없대.”
“배고프다.”
“비바람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만족한대.”
아린의 통역에 유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높은 곳, 그리고 아무 곳이나라…….’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아린과 뽀삐가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한 가지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윽고 유리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이 녀석들을 믿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아직 저들에 대한 신뢰가 100% 쌓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아린과 뽀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얼마 전의 일들이 떠올렸다.
동물의 숲에서의 두 사람과 협력하였던 일.
그리고 수천만 포인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되돌려 주던 둘의 모습.
이에 유리는 확신했다.
‘100% 신뢰한다고는 말 못 하지만, 사람 등처 먹을 애들은 아니야.’
사람 등도 처먹어 본 사람이 안다고.
유리가 보기에 저 둘은 절대 그럴 유형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 난 알아볼 게 좀 있어서.”
그러고는 유리가 휘릭- 사라졌다.
한동안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진중해진 유리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아린과 뽀삐.
유리가 손을 흔들고 떠날 때 아차 싶었지만, 이미 그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또다시 유리를 놓쳐 버린 두 사람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또 당한 건가?”
“배고프다…….”
둘의 처량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한편, 아린과 뽀삐를 떼어 놓고 균열로 돌아온 유리.
그는 균열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이 균열은 최고의 은신처야.’
균열은 외부의 침입에 대처하기 상당히 유리한 구조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균열에서 밖으로 빠져나올 때 쉽게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는 거였다.
이를 떠올리며 유리는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균열 주변, 높이 쭉 뻗은 나무 꼭대기.
“높은 곳을 좋아하는 궁수.”
그다음으로 균열 주변의 너른 공터에 시선이 닿았다.
“아무 곳이나라고 한 방패병.”
그리 중얼거림과 함께 처음 떠올렸던 앙상한 뼈대의 계획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거기다 칼잡이와 창잡이.”
유리는 턱을 쓰다듬었다.
‘3, 4, 5년 차가 되면 다들 거주 구역으로 떠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건 아니랬다.’
그건 테레시아에게서 들은 정보였다.
그녀의 정보에 의하면, 3, 4, 5년 차가 해당 거주 구역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그곳에서 제공되는 식사와 각종 편의 시설 때문이라 하였다.
‘그건 어느 정도 편의성만 개선되면 한번 자리 잡은 곳에 계속 있어도 된다는 거고…….’
하물며 그게 가장 안전한 곳이라면 굳이 상위 연차가 되어도 거주 구역으로 떠날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 그냥 단순히 1, 2년을 살다 떠날 생각으로 대충 있을 게 아니라…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면?’
이 요람에서 가장 안전한, 심지어 흑검병들조차 함부로 건들지 못할 곳을 만들면?
그곳에서만큼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될 것이다.
‘내 집이라…….’
아니, 사실 유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냥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그건 작은 요새나 다름없었다.
‘우선… 이걸 시작하려면 동의를 구해야겠네.’
지금 이 균열에는 자신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자신보다 먼저 터를 잡은 이가 있지 않은가.
유리는 그녀에게 동의를 구하러 균열 속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련을 하고 있는 테레시아.
유리는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이 균열을 중심으로 공사를 할 거고.
거기에 다른 사람도 데려올 거라고.
그렇게 해도 되겠냐고.
그걸 전부 들은 테레시아는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가 데려올 그 사람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이곳을 위험에 노출 시키는 꼴인데?”
이에 유리는 덤덤하게 답했다.
“완벽히 신뢰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내가 봤을 땐 남 등처 먹을 유형의 사람들은 아냐. 조금 성격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그럼 됐어. 마음대로 해.”
“…그게 끝이야?”
“그럼, 내가 이 악물고 반대라도 해 주길 원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쉽게 허락해 주는 게 이상해서.”
“내가 본 넌 타인을 쉽게 믿는 성격이 아냐. 그런 너라면 분명 데려올 사람들을 깐깐하게 따져 보았을 거고.”
“……?!”
“그런 네 입에서 ‘남 등처 먹을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면, ‘믿을 만한 사람들이다’라고 결론 내렸을 뿐이야.”
“…우리가 제법 가까워지긴 했나 보네. 날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니.”
“너한테 창 한 번 꽂아 보려고 노력하는 만큼 알아 가고 있긴 하지.”
“그럼 거의 다 알고 있다는 건데?”
“그런 건가?”
“그런 거지. 아무튼, 동의한 거다?”
“그래.”
두 사람은 그렇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는… 훗날 ‘마왕성’이라 불릴 작은 요새가 탄생하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 * *
그날 밤.
2월 1일 자정을 5분 앞둔 시각.
“좋은 물건 건지시길.”
“너도.”
함께 균열을 빠져나온 유리와 테레시아는 북문 안쪽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테레시아는 2년 차 특별 판매 상점이 있는 우측 통로로.
유리는 1년 차 특별 판매 상점이 있는 좌측 통로로.
그렇게 테레시아와 헤어져 자신만의 길로 걸어가는 유리의 얼굴은 사뭇 비장했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그토록 바라고 바라 왔던.
이루지 못할 거라 여겼던 꿈을 이루는 날.
유리는 긴장된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덜컹-.
과거에는 특별 할인 판매점이었으나 이제는 특별 판매 상점이 된 곳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활짝 열린 문 너머.
은은한 주홍빛 불빛과 새하얀 궐련 연기가 유리를 반겨 줬다.
이에 유리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실내는 넓었지만, 손님으로 찾아온 이는 달랑 유리 혼자였기에 유독 그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저벅저벅-.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과거에도 보았던 판매품 진열장 앞에 선 유리.
“응?”
코코가 눈을 끔뻑였다.
동시에 유리가 손을 뻗으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는 유리의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였다.
‘드디어!’
사람으로 태어나 언젠가는 꼭 해 보고 싶었지만, 가난한 형편으로 늘 속에만 담아 두었던 바로 그 말!
오늘 드디어 그것을 내뱉게 된다.
“코코 씨.”
코코를 부른 유리의 표정이 사뭇 도도하고 고고하게 바뀌었고.
척-.
들어 올린 팔에서 힘이 빠지며 손목이 ‘ㄱ’ 모양으로 꺾였다.
그리고 홀로 삐죽 튀어나온 검지가 진열장을 가리키니.
유리에게서 새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주세요.”
검지의 끝이 진열장의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 끝에 부드럽게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