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23
122화. 파랑새 (3)
무언가를 제작하는 일은 유리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준비이자, 유일하게 흥미를 느낀 소소한 취미 생활이었다.
거기다 그의 손재주도 나쁜 편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따져서 재능이 있다고 할 수준이었다.
흥미도 있고, 재능도 있으며.
그 덕분에 재미도 느끼고 있기에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어 온 유리.
하지만 그는 최근에 작은 요새의 토대를 만들면서 자신이 가진 재주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마주하게 된 기관의 함정들은 유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런데 그걸 만든 게 골족이라 이거지?’
인생의 멘토인 용병 아저씨가 그랬다.
[행여 살다가 골족을 만나는 날이 오거든, 그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라, 반드시!]그렇게 해서 얻은 게 쓰레기에 가까운 잡동사니일지라도 ‘골족이 만든’이란 수식언이 붙는 순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랬는데…….
‘골족이 만든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력이라.’
기관에 들어가는 작은 함정 하나하나.
그 모든 게 골족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고, 그 기술을 배울 기회가 눈앞에 있다.
이 어찌 탐이 나지 않겠는가.
배울 수만 있다면 무조건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유리에게 있었다.
그의 눈이 빛났다.
“강의 신청서.”
그 10,000포인트짜리 종이 쪼가리를 대체 언제 써먹나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오다니.
하지만 이 기회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이름을 모르네.’
테레시아의 설명에 의하면 신청서에 강의를 듣고 싶은 이의 이름과 소속을 기재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유리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가 골족이라는 사실 뿐.
대화하자고 찾아갔더니 대뜸 공격당하고 황당한 방법으로 내쫓김당했다.
미처 이름을 알아낼 틈도 없이 말이다.
‘이름과 소속을 알아낼 방법이 어떻게 없을까?’
유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번처럼 계속 괴롭히는 방법은 더는 안 먹힐 테고.’
그 골족 사내가 말했었다.
임무 교대 하게 될 거라고.
아마 지금처럼 자극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을 터.
‘임무 교대를 하게 되면 아예 떠나는 건가?’
그 골족 사내가 임무 교대 후 요람을 떠나는지.
혹은 새로운 임무를 배정받는지.
그리고 그를 대신해 오는 새로운 운영자도 골족일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강의 신청서를 써먹고 싶어도 정보가 없으니 쓰지 못하는 상황.
방법을 갈구하는 유리의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어?”
유리의 뇌리를 스친 과거의 기억.
“어쩌면…….”
방법을 찾은 것일까?
유리의 눈이 맑게 빛났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그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3월이 시작되며 얼어붙은 시냇물이 녹아 흘렀다.
졸졸졸-.
그리고 시냇물이 흘러가는 음률 속에 작은 콧노래 소리가 섞여들었으니.
“흐흥~.”
개울가에 속옷 차림으로 쪼그려 앉아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
그는 다름 아닌 제리 비였다.
“흐흥, 흐흐흥!”
날이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 물이 꽤 차가울 텐데도 제리는 개의치 않고 몸 구석구석을 닦아 나갔다.
어푸어푸-.
세수를 하는 건지 수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머리를 감는 건지.
얼굴에서 머리까지 단번에 씻은 제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가에 비친 자기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후우-.”
젖은 금발을 뒤로 넘긴 그는 씨익 웃어 보였다.
“짜식, 잘생겼군.”
씻을 때마다 매번 자신 정도의 외모면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제리였다.
자아도취에 빠졌던 그는 이대로 씻는 걸 마무리하려다가 멈칫거렸다.
“음…….”
옅은 신음을 흘린 제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쭈그려 앉았다.
“…조금만 더 씻자.”
평소였다면 이 정도에서 마무리했을 터.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자신이 일생일대의 순간을 맞이하는 날이지 않은가.
수면에 비친 제리의 암갈색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깃들었다.
‘어설픈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러 갈 수는 없지!’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더 꼼꼼하게 몸을 씻어 나갔다.
그의 입에서 다시금 흥겨운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노래 속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흐흥- 흐흐흐흥!
오늘 그가 즐겁고 설레하는 이유.
또한, 이토록 꼼꼼하게 외모를 손보는 이유.
그건 바로 2시간 전에 만난 테레시아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 있었네.]마치 오랫동안 제리를 찾고 있었다는 듯 살짝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 테레시아.
하지만 반가워했던 처음과는 달리 그녀는 살짝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혹시… 시간 좀 있어? 할 얘기가 있는데.]그러고는 시선을 피하듯 살포시 고개를 떨군 테레시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그녀는 한 장의 쪽지를 제리에게 건네고 그대로 달아나듯 사라졌다.
그렇게 멀어지는 테레시아의 모습에 제리를 비롯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49기들이 경악했다.
‘테레시아가… 부끄러워했다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포시 떨군 고개.
도망치듯 사라진 상황하며.
그건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런 테레시아의 반응에 제리는 물론 주변에 있던 이들도 한결같이 입을 떡 벌렸다.
테레시아가 누구던가.
황룡패로 들어와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여 49기의 정점을 차지한 입지전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지독한 수련광(狂)이었으며 그로 인해 일정 이상의 친분을 유지하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 다른 49기 남성들로 하여금 테레시아를 선망하게 만들었다.
너무도 뛰어난 외모.
그리고 자신을 몰아붙이는 노력파의 고고한 여인.
49기 남성들에게 있어 그런 테레시아는 쉽사리 다가갈 수 없고, 쉽사리 다가가서도 안 되는 신성한 그 무언가였다.
그랬던 테레시아가.
그 테레시아 윈체스터가!
저리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한 남성에게 쪽지를 건네고 가다니!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대충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며.
이는 49기 남성들에게 있어 신성모독이 행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고오오오-.
순식간에 치솟는 살기.
하지만 그 살기가 향한 곳에 있어야 할 제리는 이미 진즉에 몸을 내뺀 지 오래였다.
그렇게 동기들로부터 도망친 제리는 곧장 때 빼고 광내기에 돌입했고.
“완벽하군.”
무려 두 시간에 걸쳐 몸을 정돈한 제리는 완벽해진 자신의 모습에 흡족해했다.
재빨리 옷을 걸친 그는 양팔을 벌려 크게 공기를 들이켰다.
스읍-!
아직 차가운 겨울의 냉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제리는 그 속에 섞인 옅은 봄 내음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제리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드디어 나에게도 봄이 오는 건가?’
히죽거린 그가 주머니에서 테레시아가 주고 간 쪽지를 꺼내 냄새를 맡았다.
킁킁-.
그래 봤자 종이 냄새만이 옅게 날 뿐이었으나 제리에게는 이마저도 전혀 다른 향으로 다가왔다.
‘달콤해.’
이 달콤한 향이야말로 그녀가 남긴 서툰 사랑의 향이 아닐까?
부끄럽다는 듯 떠나간 테레시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제리가 쪽지를 펼쳤다.
“외모만큼 글씨도 참으로 정갈하고 아름다우시군요, 우리 여신님은.”
흐뭇하게 미소 지은 제리는 자신이 고백받을 약속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고 곧장 움직였다.
아직 약속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이 신사 아니겠는가.
“흐흥~.”
무려 두 시간이나 이어졌던 콧노래가 또 시작되며 제리는 설렘 가득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잠시 뒤.
드디어 약속 장소에 도착한 제리.
“응?”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보고 멈칫했다.
‘이렇게나 일찍?’
자신도 일찍 도착한 건데 그보다 테레시아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에 제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시아도 긴장했나 보군.’
아마도 초조함에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게 아닐까?
그리 여긴 제리는 조금 있으면 받을 테레시아의 고백에 어떻게 대답할지를 상상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테레시아와 마주하게 된 제리.
“일찍 왔네?”
느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는 자신이 봐도 멋있다고 생각할 미소를 머금었다.
‘완벽한 미소였겠지?’
그러는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도 됐다.
자신의 이 완벽한 미소에 그녀가 심장이 떨려 더 긴장하면 어쩌나 싶어서.
하지만 제리를 바라보는 테레시아는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민망하고, 굉장히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일 뿐.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테레시아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어.”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나무 기둥 뒤쪽에서 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황금빛 눈동자의 미소년.
바로 유리였다.
그는 테레시아의 곁으로 걸어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고생했어.”
유리가 내민 【식권】이란 종이를 받아 든 테레시아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정말로 이거면 언제든 내가 먹고 싶은 걸 만들어 주는 거지?”
“물론. 한 끼라면, 얼마든지.”
유리의 확답에 그제야 테레시아가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고 살짝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잠시일 뿐.
제리에게 고개를 돌렸을 땐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옅은 미안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 둘이 이야기 잘 나눠.”
테레시아는 제리에게 그 말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떠나갔다.
마치 몇 시간 전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제리의 머리 위로 연신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게 뭔 상황이지?’
쉽사리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제리는 마침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짧게 정리할 수 있었다.
‘나… 팔린 거네?’
그것도 고작 한 끼 식사에?
제리의 뇌리로 몇 시간 전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던 테레시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내 눈을 못 마주친 이유가… 이거였던 거야?!’
테레시아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떨군 건, 동기를 고작 한 끼 식사에 팔아 치운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제리는 허탈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시리구나.”
고대하고 고대했던 봄날은 오지 않았다.
시린 겨울만이 여전히 이어질 뿐.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리의 시선이 이번에는 지면으로 수그러졌고.
또륵-.
순정을 짓밟힌 사내의 눈에서 맑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야, 우냐?”
숙인 제리의 얼굴 밑으로 불쑥 끼어든 검은 대갈통 하나.
“꺄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친 제리는 히죽거리는 유리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저 새끼, 저거!’
그래, 이 모든 게 바로 저 자식이 원흉이었다.
저 녀석이 테레시아를 이용해 이런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자신 혼자 착각하고 상처받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속으로 씩씩-거린 제리가 검은 머리 소년을 유심히 살폈다.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겼네.’
일단 가장 먼저 잘생긴 외모가 시야에 들어왔고.
곧이어 살짝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빨간 견장? 그럼 50기란 소리인데?’
49기와도 쉽사리 친해지지 않는 테레시아가 50기와 친분이 있다고?
심지어 조금 전 대화로 미뤄 짐작해 보면 둘 사이가 매우 친밀해 보이지 않았던가.
‘정체가 뭐지?’
미간을 모으고 유리를 살피는 제리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묘하게 낯익단 말이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심지어 그 느낌이 좋은 쪽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지는.
그런 불쾌하고 불길한 느낌이었다.
이에 제리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누구냐? 무슨 이유로 날 불러낸 거지?”
그 물음에 유리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 쩨리 선배. 그동안 잘 지냈어?”
자신을 향한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에 제리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너, 너어는?!”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제, 젠장! 어쩐지 묘하게 익숙하더라니!’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들던 불길한 느낌.
그리고 자신을 쩨리라 부르는 껄렁껄렁하고 싸가지 없는 목소리까지.
그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제리가 상대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미친 또라이 새끼!”
그런 제리의 외침에 유리의 눈이 위험하게 휘었다.
“그렇게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해 대시면 듣는 미친 또라이 새끼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
“거기서 정지, 만약 한 발자국만 더 뒷걸음질 치면 그땐 그나마 해 주던 선배 대접도 싹 날아간다고 생각하쇼.”
“네가 언제 선배 대접을…….”
“쓰읍!”
“그, 그래.”
제리는 눈치챘다.
유리가 말하는 선배 대접이 사실은 사람 대접을 돌려 말한 것이란 걸.
그리고 그걸 눈치챈 그 즉시 자리에 우뚝 선 제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 그래서 공사다망하신 우리 후배님께서 무슨 연유로 날 찾아오셨을까? 바쁠 테니 내가 아주 속전속결로 처리해 줄게!”
“역시 쩨리 선배. 말이 정말 잘 통한단 말이지.”
흡족하다는 듯 미소 지은 유리.
그가 곧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쩨리 선배, 요람의 정보를 사고파는 단체가 어딨는지…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