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65
164화. 서열 (3)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보라는 유리의 말.
마치 너희 일 따위에 나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듯한 저 태도가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너와 우리는 급이 다르다는 거냐?’
‘어차피 1위는 네 자리니 밑에 것들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군.’
‘그 자리가 네 지정석이라는 거야?’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위 옆자리에 당당히 쓰여 있는 이름.
원래라면 서열 순위 변동이 일어날 것을 고려하여 명패에 이름을 적어 게시하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따위 원칙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 개무시하고 1위 자리에 그냥 본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분명 이 서열 게시판이 요람을 수료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쓰인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
“…….”
“…….”
좌중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리는 게시판을 향한 주변 시선을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거짓 표정을 취하며 헤실헤실 웃었다.
“아아, 이거?”
길쭉한 손가락이 ‘1위 유리 홀랜드’를 가리켰다.
“에이, 뭐 어차피 끝까지 내 이름이 걸려 있을 건데 명패 따위가 뭐가 필요하겠어?”
50기의 예상이 정확했다.
저 녀석은 정말로 제 이름을 1위에 고정할 생각으로 게시판에 적어 넣은 것이다.
자신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좌중의 냉기는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재수가 없기는 하지만, 한 달 전 저 녀석이 보여 준 실력은… 진짜였다.’
‘솔직히 우리 중 서열 1위를 뽑는다면 저 녀석이겠지.’
2차 통합 퀘스트인 완장 빼앗기 퀘스트에서 유리가 힘을 보인 건 퀘스트 초반뿐이었다.
물론 그가 퀘스트의 우승을 거머쥘 수 있게 만든 건 잔머리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초반에 보인 힘, 혼자서 몇 개의 분대를 궤멸시킨 실력만으로도 50기는 유리를 은연중에 최강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은연중’에다.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다 하여도… 우리를 이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거다.’
‘그래, 좋다, 이번 기회에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봐 주마!’
‘서열 1위를 그냥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어?’
50기 중,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는 이들은 강한 투지와 의욕을 보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그들의 머릿속 유리의 실력은 아직 한 달 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상태.
유리가 한 달 동안 어떤 성장을 이뤘는지.
그의 성장이 얼마나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지 모르기에.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다!’라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오만하구나, 유리 홀랜드!”
누군가가 그리 일갈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살짝 각진 얼굴에 짧은 갈색 머리카락.
선이 굵어 강인해 보이는 인상.
그는 휴이 머몬이라는 이였다.
월말 평가 성적은 10위권 초중반.
휴이가 유리를 노려보았다.
“네 월말 평가 성적이 1등인 거는 알지만, 그게 실력을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다.”
이에 유리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예이예이, 그러시군요.”
듣기 싫다는 듯 건성으로 답하는 그 모습에 휴이 머몬의 얼굴이 굳어졌다.
“…겸손해지는 게 좋을 거다. 싸움에는 상성이라는 게 있고, 네놈을 잡아먹을 상성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유리가 새끼손가락 끝에 묻은 귀지를 훅 불며 답했다.
“그게 너는 아닌 거 같은데?”
끝까지 사람 속을 긁는 말투에 휴이도 정중하게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오냐, 그럼 어디 한번 붙어 보자, 이 새끼야! 네놈이 정말로 저기 서열 1위에 어울리는지 내가 검증해 주마!”
그 외침에 유리는 충격을 받은 듯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거, 검증?”
유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검지를 뻗어 휴이를 가리켰다.
“네가……?”
덜덜거리는 검지 끝이 이번에는 자기 얼굴로 되돌아왔다.
“…나를?”
차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유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빼액- 소리쳤다.
“시, 싫어! 내, 내가 저딴 실력도 없는 새끼한테 검증받아야 하는 처지라니! 이따위 꼴을 보자고 그렇게 아등바등 수련해 온 게 아니라고!”
“…….”
“이런 수모를 당할 바에는… 그냥 혀 깨물고 죽을래애애애!”
실제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유리의 열연에 아린과 뽀삐는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한편, 파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싸우기도 전에 휴이가 진 거 아냐?”
“…그러게. 정신적 타격이 상당하겠어.”
이반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눈물 공격을 받은 휴이의 얼굴을 멍하니 풀려 있었다.
그러다가 주먹을 바들바들 떨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이, 이, 이 새끼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실제로 그는 검 자루로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턱-.
휴이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휴이는 당연히 성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휴이의 뒤쪽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군터였다.
그는 고요하고 차분한 얼굴로 휴이의 어깨를 슬쩍 눌렀다.
“진정해라.”
덤덤한 목소리.
어째서인지 이를 들은 휴이의 분노가 사르르 가라앉았다.
‘왜?’
휴이는 어째서 자신의 분노가 사라진 것인지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군터의 손은 자신의 어깨에 닿아 있었으나.
그의 올곧은 시선은 유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군터의 녹빛 눈동자 깊숙이 내재한 단단한 투지.
그 강인한 감정에 휴이의 분노가 압도당한 것이다.
꾸득-.
군터의 손이 한 층 더 휴이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처음은 나에게 양보해 주었으면 한다.”
“그, 그러지.”
‘처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휴이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손을 거둬들인 군터는 휴이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 짜내는 연기를 하고 있는 유리의 앞에 섰다.
“유리 홀랜드, 그대에게 서열전을 신청한다.”
그 덤덤한 목소리에 유리는 그제야 연기를 그치고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하고 바른 자세로 서 있는 군터.
그에게서 풍기는 강인한 투지에 유리는 빙그레 웃어 줬다.
“서열전이라… 그 말은 나한테 도전을 한다는 거네? 날 서열 1위로 인정해서?”
“그렇다.”
“오! 검증이니 뭐니, 제 주제도 모르고 꼴같잖은 소리를 해 대는 새끼보다는 네가 100배 낫다.”
“그거 다행이군.”
“좋아 좋아, 서열 1위로서 하위 서열의 도전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 한판 붙자!”
그 말에 휴이의 얼굴이 똥이라도 씹은 듯 변했지만,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저 모두가 갑자기 성사된 대결에 흥미로워할 뿐.
“유리 홀랜드 대 군터 아이언스라…….”
“이건 좀, 볼만하겠는걸?”
유리가 두각을 드러낸 이후 은연중에 최강자로 꼽히고 있다면, 그 전까지 그 역할을 하고 있던 건 군터였다.
다시 말해 (구)최강자와 (현)최강자가 그들이란 소리였다.
거기다 두 사람은 극과 극처럼 대비되는 이들이었기에 이 대결에 더욱 흥미를 더했다.
명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좋은 교육과 바른 인성을 지닌 군터.
반면 출신은 정확히 모르나 누가 봐도 못 배운 티가 확 나는 인성의 유리.
어린 시절부터 크로탄 행정구는 물론 그 인근 행정구에까지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군터.
그 어떤 것도 알려진 게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유리.
이러니 사람들이 흥미가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있겠는가.
‘지난번 완장 빼앗기 퀘스트에서는 유리 홀랜드의 완승이었지.’
당시 군터는 스스로 완장을 찢으며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지략이 승패를 좌우한 경우였다.
하여 50기 중 대다수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순수한 무력만으로 붙는다면 둘 중 누가 이길까?
…라고 말이다.
이에 정보 모으기를 좋아하는 슐레만 한스는 이리 결론 내렸다.
‘유리 홀랜드가 이길 확률이 60%다.’
백룡패주의 군터 아이언스와 흑룡패주인 유리 홀랜드.
그리고 그간 그들이 보여 준 모습을 종합한 결과 슐레만은 유리와 군터의 승률을 ‘6 : 4’로 잡은 것이다.
슐레만은 유리와 마주한 군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군터 아이언스, 네가 과연 6 대 4의 승률을 뒤엎고 유리 홀랜드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사실 그런 건 슐레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저 두 사람이 이번 대결에서 전력을 다해, 보다 많은 정보를 노출시켜줬으면 하는 거였다.
특히 그간 개인의 실력과 마체술에 관해 두루뭉술한 수준의 정보만 노출시켰던 유리였기에 슐레만의 기대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슐레만뿐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잘됐다. 유리 홀랜드가 어떤 유형의 마체술을 익히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어.’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봐 주마! 분석하고 또 분석해서… 널 꺾을 방법을 찾아 주겠어, 유리 홀랜드!’
서열 1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유리 홀랜드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하기에.
유리에게 도전할 마음이 있는 이들 모두가 이번 대결을 통해 그의 약점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처음으로 맞이한 도전에 눈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그 말에 군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나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었으면 한다.”
“왜?”
“이번 대결에 나의 전부를 쏟아 내고 싶다. 후회 없이.”
“흠…….”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안에 준비를 끝내고 오겠다.”
약간은 간절함이 엿보이는 그 목소리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차피 그런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나중에 가서 몸 상태가 별로였다느니, 아직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느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양해해 줘서 고맙군.”
손을 휘휘 내젓는 유리를 향해 군터는 짧게 묵례를 해 보이고 뒤돌아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대결이 조금 지연되기는 했지만, 50기 중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 대결이 시작되어 구경 기회를 놓쳐 버릴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20분 정도가 흘러.
“하암…….”
유리가 크게 하품할 때, 군터가 나타났다.
은빛의 찬란한 전신 갑주(Full plate armor)를 걸치고.
철걱- 철걱-.
옆구리에 투구를 낀 그는 일정한 보폭으로 유리를 향해 나아갔다.
그 모습에 원형 경기장 관객석에 앉아 있던 50기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쟤, 저거 어디서 났지?”
“특판에서 전신 갑주는 안 팔 텐데?”
군터의 전신 갑주는 1인 착장이 가능한 고급품이었다.
그가 저런 물건을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해할 때 누군가 답을 알려 주었다.
“아, 저거 때문이었구나!”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파나를 보고 넬리가 고개를 돌렸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내가 팔았거든.”
“뭘?”
“지난번 통합 퀘스트에서 얻은 무구 제작권, 그거 군터가 비싸게 산다기에 냉큼 팔았지. 아마 그거로 전신 갑주를 맞춘 거 같네.”
이에 이반이 인상을 찡그렸다.
“멍청하긴, 포인트에 눈이 멀어서 경쟁자의 전력을 늘려 주는 짓을 하다니.”
“너야말로 멍청한 소리 지껄이지 마, 이반.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군터에게 무구 제작권을 팔았을 거야, 그럼 나라도 나한테 필요 없는 걸 팔아서 이득을 보는 게 맞지 않겠어?”
그렇게 군터가 어찌 전신 갑주의 구할 수 있었는지 내막을 알게 된 이들은 다시 군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철걱-.
“기다려 줘서 고맙다.”
당당하게 유리를 마주한 군터.
그는 천천히 투구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후우…….”
살짝 눈을 감고 숨을 내쉰 군터.
번쩍-.
그가 크게 눈을 뜨며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철컥-.
가느다란 구멍으로 유리를 응시하며 군터가 검을 뽑아 자신의 정면에 세웠다.
“아이언스의 장자, 군터. 유리 홀랜드와 후회 없이 검을 나누고자 합니다.”
기사의 예를 보이는 군터의 모습은 절도 있고, 비장했다.
이에 관중은 자연스럽게 몰입했다.
한편, 그런 군터를 마주한 유리는…….
‘우와, 우와, 우와… 우와아아앙!’
속으로 괴상한 환호성을 내지르며 과하다 싶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였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군터는 예를 갖춘 후 검을 뒤쪽으로 보냈다.
철걱-.
살짝 숙인 상체.
양손에 쥔 검 끝이 땅을 가리키며 사선으로 늘어진 순간.
“…가겠다.”
마치 경고하듯 그리 중얼거린 군터가 오른발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쾅!
흙더미가 비산하고 군터의 육신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해 들었다.
그건 흡사 성문을 부수는 데 사용되는 충차(衝車)라고 생각될 정도의 강렬한 돌진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돌진의 끝에 서 있는 게 거대한 성문이 아닌, 한낱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관중들에게는 저 은빛 충차의 돌격에 유리라는 인간이 산산이 터져 나갈 듯 보였다.
그 정도로 군터의 돌진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훙-!
은빛의 철갑이 유리의 코앞에 도달한 순간.
쯔어어어어어어엉-!
굉음이 터져 나오며, 돌진해 왔던 군터의 허리가 접혀 뒤로 튕겨 나갔다.
달려들었던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