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67
166화. 서열 (5)
은은하게 발하는 깨달음의 빛.
그건 사람한테서 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성스러웠다.
전설 속 성인이 이러할까?
실로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장면이었다.
다만 그 ‘몇 번’이 문제였다.
‘몇 번은 아닌가? 두 번?’
실질적으로 유리가 겪은 돈오는 세 번이었지만, 그중 한 번은 자신이고 나머지 둘은 타인이었다.
실제로 직접 눈으로 본 건 두 번뿐이다.
그레타 위건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군터 아이언스로 또 한 번.
마왕이 돈오를 겪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른다.
갑자기 강해져서 나타난 걸 보니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질 뿐.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아니, 몇 번이고 자시고, 나랑 싸우는 것들은 뭔 시발 툭하면 깨달음이야?! 내가 무슨 깨달음 주머니야? 두들기면 깨달음이 툭툭 튀어나오게?’
물론 군터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거였지만,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별로였다.
‘옘병! 나는 죽어라 처맞아도 깨달음은 벼룩 오줌만큼도 안 오더니만!’
지금까지 자신이 요한에게 처맞은 거, 거기에 그레타는 물론 마왕에게 처맞은 것까지 합치면 깨달음이 하루에 열두 번씩 와도 모자랐다.
그런 자신은 죽어라고 오지 않던 깨달음이…….
‘저 새끼는 꼴랑 한 대 처맞고 온다고?’
세상에 이보다 더한 부조리가 어디 있겠는가!
배알이 꼴리다 못해, 해서는 안 될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지금 한 대 후려갈겨 봐?’
너무 날로 먹은 거 같은 군터에게 시련과 역경을 몸소 선사해 주자는 욕망이 일어났다.
실제로 슬쩍 한 발짝을 떼었던 유리는 움찔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작게 혀를 찼다.
“쯧… 너 운 좋은 줄 알아.”
아마 자신이 직접 돈오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정말로 후려갈겼을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자신도 돈오를 경험해 본바.
강해지고자 열망하는 이에게 저 상황이 얼마나 꿈에 그리는 순간인지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좌절되었을 때 올 상실감도 충분히 예상이 갔고 말이다.
하여 유리는 치밀어 오른 짜증을 흐트러뜨렸다.
비록 좀 아니꼽기는 하지만…….
‘…이번은 봐주마.’
유리는 쥐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풀었다.
이건 정말로 군터에게는 운이 좋은 순간이었다.
스스스-.
그사이 군터의 돈오가 끝났다.
“아…….”
정신적 황홀감에 취해 있던 눈동자가 제 빛깔을 찾아 갔다.
그렇게 돈오에서 벗어난 군터는 유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그건 꽤 많은 의미가 담긴 감사 인사였다.
자신의 목표가 되어 준 것에 대한 감사.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
혹은 그 깨달음의 순간 방해하지 않고 기다려 준 거에 대한 감사까지.
정확히 그중 어떤 것에 대한 고마움인지는 군터도 잘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차오른 감사함을 표할 뿐이었다.
동시에 그는 유리를 향해 검을 겨눴다.
“너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너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음에 기쁘다.”
그 말을 남긴 군터가 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욱씬 욱씬-.
일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육체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군터는 고통을 참고 달렸다.
그렇게 유리의 곁에 도달한 그가 검을 휘둘렀다.
아이언스가(家) 비전 마체술.
뇌천왕의 발톱.
새하얀 뇌전을 머금은 검 끝이 분열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그렸다.
그게 하나, 둘, 셋, 넷.
순식간에 총 4개로 늘었다.
거기까지가 과거 테레시아를 상대할 때 보인 군터의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군터와 지금의 군터는 달랐다.
현재의 군터에겐 전신 갑주가 있었다.
기사에게 있어 전신 갑주는 그저 단순한 방어 수단이 아니었다.
이는 또 하나의 육체이자, 마체술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
그 중요한 조건이 갖춰지고, 거기에 조금 전 얻은 약간의 깨달음의 더해지니, 군터의 검 끝이 최종적으로 5개로 분화했다.
파츠측-.
마침내 아이언스가의 시조가 모방한 뇌천왕의 다섯 발톱을 온전히 뽑아내게 된 군터.
생에 처음, 완벽에 가깝게 다섯 줄기의 뇌전을 뽑아내게 된 군터는 자신감이 붙었다.
이거라면 확실히 유리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스르륵-.
아지랑이처럼 일렁인 유리의 형상이 다섯 개의 뇌전 사이를 너무도 손쉽게 빠져나갔다.
‘아……!’
군터는 유리가 멀어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유리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뒤틀렸다.
“이야… 팔팔하네?”
그 말을 한 유리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슈륵-.
“……?!”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유리.
일순간 그 움직임을 놓친 군터는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아이언스가(家) 비전 마체술.
뇌천왕의 날개.
군터의 검이 만들어 낸 잔상.
그건 마치 거대한 날개가 몸을 감싸는 듯한 형상이었다.
가문이 자랑하는 절기 중 방어식을 펼친 군터.
하지만 유리의 검은 날개의 깃털 사이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
놀란 군터가 다급하게 반응해 보려 했지만, 그의 몸이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중상을 입은 육신이다.
지금까지는 정신적 황홀감 덕분에 잠시 고통을 잊고 움직였을 뿐.
그러다가 한바탕 무리했기에 그 한계가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물론 군터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어도 유리의 속도에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틀렸군.’
군터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깨달음을 얻고 돈오에 들었지만, 그의 경지가 극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전해 들었던 것처럼 돈오를 통해 경지가 한 단계 높아진다거나, 오랫동안 막혀 있던 벽을 허문다거나.
자신이 그런 대단한 발전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군터는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이번 돈오로 이룬 정신적 성장.
그것을 바탕으로 정진한다면 한층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 확신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 이렇게 유리에게 패배하게 되었지만, 패배로 인한 분함보다는 고마움이 더 컸다.
유리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군터는 곧이어 찾아올 고통에 대비했다.
그리고.
츠컥- 캉- 캉-!
지척에서 들려온 소리에 군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고통이 뒤따를 거로 생각했건만, 그 어떤 고통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군터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철그럭- 청- 척걱-!
군터의 몸에서 쇳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
정확히는 안 그래도 이미 너덜너덜하던 상체 갑주가 바닥으로 떨어진 거였다.
이에 군터는 깨달았다.
‘아까 그 소리는 설마… 갑옷의 이음새를 끊어 낸 소리였던가?’
조금 전 유리의 검격.
그것이 정확히 상갑의 연결 부분만을 노리고 끊어 낸 것이다.
실로 놀랍고 정교한 검술이 아닐 수 없었다.
군터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유리 홀랜드…….”
공격을 마무리한 유리는 어느새 뒤로 물러나 검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를 향해 군터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량을 베풀어 줘서 고맙다.”
강철 갑주의 이음새를 끊어 냈다는 건, 단순히 이음새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뚱이까지 같이 베어 냈어도 충분할 위력이란 소리였다.
하지만 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음새만을 끊어 내고 자신의 무장을 해제시켰을 뿐이었다.
그의 자비로움에 어찌 고개를 숙이지 않으랴.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
군터가 그리 말한 순간.
“뭔, 입으로 지랄 똥 싸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
앞에서 들려온 거친 욕설에 군터는 눈을 끔뻑였다.
유리는 뚜벅뚜벅 걸으며 손을 꺾었다.
우득 우득-.
유리의 고개가 살짝 삐딱하게 꺾였다.
“하, 이 새끼 보소? 시발, 내가 존나 띠꺼운 것도 참아 가면서 기껏 기다려 줬더니만, 눈깔 돌아오자마자 칼침을 날려? 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새끼야!”
“…아…….”
“그리고 뭐,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 나의 패배애애애를 인정한다아아아?”
“그…….”
“옘병, 꼴값 떨고 있네. 인정 안 하면? 안 하면 네놈이 어쩔 건데?”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유리의 눈깔이 희번덕거렸다.
“착각하지 마, 병신 새꺄! 네가 인정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넌 그냥 진 거야. 네가 인정하느니 안 하느니 지껄이는 건 그냥 네가 정신 승리 하고 싶어서라고, 알아들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폭언에 군터의 눈이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런 거친 욕은 해 본 적도, 들어 본 적 없는 군터.
뇌 용량 한도 초과의 욕설에 그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렇게 어버버거리고 있는 군터를 향해 유리의 욕설 폭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등신이, 좀 살살 만져 주니 정신 못 차리고 기어오르지?”
“말이 좀 심…….”
“그리고 뭘 네 멋대로 대결을 끝내려고 해? 지금 이 상황에서 네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냐?”
“…….”
“아니, 네 의견 따윈 티끌만큼도 의미 없어. 도전은 네 멋대로 했을지 몰라도…….”
우득우득-.
유리가 이번에는 목을 꺾으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끝내는 건 바로 나야.”
그 말과 함께 유리의 신형이 사라졌다.
파측-.
푸른 뇌전에 휩싸여 유리가 어느새 군터의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리의 폭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면, 이제부터 쏟아지는 건 그의 주먹이었다.
‘아…….’
유리의 주먹이 수십 개의 잔상을 그렸다.
정확히 상체만으로 날아드는 그 잔상에 군터는 깨달았다.
‘아량이… 아니었구나.’
유리가 이음새만 끊어 내 갑주를 벗겨 낸 건 아량을 베풀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지 손이 아플까 봐… 벗겨 낸 거였구나.’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유리의 주먹이 군터의 상체를 두들기고 있었다.
덩- 기덕- 쿵- 더러러러러러러러러러러러!
어마어마한 주먹질에 군터의 상체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가물가물해지는 군터의 시야에 활짝 웃고 있는 유리의 얼굴이 들어왔으니.
‘아, 이자는…….’
진짜 광기가 느껴지는 희번덕거리는 눈깔.
유쾌, 상쾌, 통쾌, 즐거움이 가득 느껴지는 입매.
이를 본 군터의 등골이 짜르르 울리며 강한 깨달음이 들이닥쳤다.
‘단단히… 미친 자로구나…….’
뒤늦게 찾아온 큰 깨달음을 끝으로 군터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오늘 군터가 얻은 깨달음 중 가장 값진 깨달음이었으리라.
* * *
군터가 돈오에 들었을 때만 해도 이를 지켜보고 있는 50기들은 반전을 기대했다.
수세에 몰린 약자가 각성하여 반전을 일으키는.
흡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흔한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반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덩- 기덕- 쿵- 더러러러러러러러러러러러!
경기장 안에서 빠르게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문제는 그 소리가 북이 아닌 사람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거였지만.
덩덩덩덩-!
움찔움찔-.
군터는 끔찍하게 유린당했다.
이미 기절한 게 분명한데 타작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기절했음에도 서서 처맞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신명 난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연신 흠칫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쿵!
맑고 웅장한 소리를 내며 유리의 인간 북 연주가 끝이 났고.
털썩-.
너덜너덜해진 군터가 물먹은 솜 인형처럼 추욱 늘어졌다.
“후우… 즐거웠다, 잘 가라.”
가뿐한 얼굴로 흐르지도 않은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유리.
그리고 그 앞에 미동조차 없이 널브러진 군터.
이를 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죽었겠지?”
슬프게도 그 말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 * *
죽었을 것이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군터는 살아 있었다.
아니, 간당간당하게 숨만 붙어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하여 그는 곧 치료소로 실려 갔다.
그러는 와중에 다시 경기장으로 모인 50기.
“…….”
그 많은 사람이 모였음에도 대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50기는 그저 입을 다물고 건들건들하는 유리를 흘끗거렸다.
그러다가 유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다급히 시선을 돌리기 바빴다.
그런 상황에 유리는 피식거렸다.
‘진즉 이럴 걸 그랬나?’
지난번 통합 퀘스트에서도 어느 정도 힘을 드러냈었지만, 동기 놈들은 그 이후에도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무시는 사라지고 두려움만이 담긴 눈빛.
저들이 자신을 대하는 자세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역시 어중이떠중이 수십을 때려잡는 것보다 남들한테 인정받고 있는 놈 하나를 꺾는 쪽이 확실히 효율적이네.’
있는 집안의 배운 놈들이나, 뒷골목 왈패들이나.
하는 짓거리를 보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유리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의문을 표했다.
“그럼… 이렇게 되면 군터의 서열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에 50기는 그제야 자신들이 서열을 정하던 중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서열 1위는 그냥 논외로 친다지만… 그 밑으로는 서열을 정해야 하는데?’
그런데 군터가 인사불성이 되어 실려 가 버리고 말았다.
만약 군터가 그냥저냥 한 어중이떠중이라면 무시하고 진행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유리에게 동네북처럼 얻어 터졌다고 해도 군터의 실력을 무시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여 군터 없이 서열전을 진행하기에도 무언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에 해답을 내놓은 건 다름 아닌 아린이었다.
“그냥 유리한테 물어보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