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68
167화. 서열 (6)
아린의 이야기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유리한테?”
누군가의 되물음에 아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답했다.
“대충 우리끼리 서열 정하고 나중에 유리한테 군터 자리를 정해 달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이견은 바로 튀어나왔다.
“음… 그렇게 하려면 군터 말고도 비교할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나랑 뽀삐가 유리랑 자주 대련을 해 왔으니까, 우리를 기준으로 정해 달라고 하면 돼.”
그리 말한 아린은 유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 의견이 어떠냐는 듯한 눈빛.
이를 마주한 유리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내가? 왜? 귀찮은데?”
“귀찮더라도 해 줘.”
“아, 그냥 대충 하자, 제일 중요한 1위는 정해졌고, 그 밑으로 어차피 의미도 없는 자리인데 뭘 그리 열심히 하냐?”
“우리한테는 의미 있어.”
“흐음……?”
무언가 단호한 아린의 답변에 유리가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내려쳤다.
“아하, 그러니까 지금 이게 그런 상황인 거네?”
“…무슨 상황?”
“나 같은 천상계를 논외로 놓고 미천한 인간들이 인간계 최강자를 가리는 자존심 싸움을 벌이겠다는 거잖아?”
“…….”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한데 본인 입으로 저리 말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심히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리의 말에 대놓고 반박을 할 이는 없…….
“재수 없어.”
“배고프다.”
…아니, 있었다.
팔짱을 낀 아린과 뽀삐가 유리를 뚱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유리는 고뇌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열 1위 미만 잡것들의 시기와 질투라니… 하, 독보적인 서열 1위는 참으로 고단한 자리로구나.”
외롭다는 표정을 지은 그를 보고 아린이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군터 실력이 어느 정도인 거 같은데? 나랑 뽀삐랑 비교하면?”
“흠…….”
조금 전부터 이상하리만치 진지해 보이는 아린의 태도에 유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얘가 웬일로 이렇게 진지하냐?’
자신의 주변 사람 중 가장 만사태평한 이를 꼽으라면 유리는 망설임 없이 아린을 꼽을 것이다.
퀘스트 성과는 물론 월말 평가의 성적까지.
지금까지 아린이 그 무언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좋은 게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지금까지 유리가 지켜본 아린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듯싶었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무언가 이 녀석을 자극할 만한 게 있었나?’
그런 게 있다면 한 가지뿐.
바로 군터의 돈오였다.
‘…얘도 짜증이 난 건가? 나랑 맨날 대련하는 건 자기인데 군터가 깨달음을 얻어서?’
자신 역시 비슷한 심정을 느꼈으니, 아린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유리였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아린을 자극한 것은 군터의 돈오가 맞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린에게 생겨난 감정은 짜증이 아닌 질투였다.
분명 나랑 더 가깝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애랑 이상하게 죽이 잘 맞는 걸 지켜볼 때 생기는 마음.
친구한테는 직접 말하기도 민망한 묘한 질투심.
지금 아린이 느끼는 건 바로 그런 감정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누군가와 그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적이 없는 유리였기에 이런 아린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릴 리 없었다.
대신 그래도 눈치는 있기에 유리는 아린의 진지함에 맞춰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흠… 너랑 뽀삐랑 비교했을 때라.”
한참을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아린, 너랑 군터가 맞붙으면 군터가 이겨.”
아린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딱 봐도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유리의 부연 설명에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군터랑 뽀삐가 붙으면 뽀삐가 이길 테고, 너랑 뽀삐가 붙으면… 네가 이기겠네.”
아린의 살짝 찡그린 미간이 펴지는 걸 본 유리가 피식거리며 마저 설명을 이었다.
“니들 상성은 완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구조야.’
군터에게는 뽀삐의 방어를 뚫을 만한 파괴력과 속도가 없다.
대신 그에게는 아린의 화살을 막을 전신 갑주와 민첩함은 있었다.
그리고 아린에게는 뽀삐의 방패 너머를 타격할 수 있는 ‘기이한 궁술’이 있었다.
그로 인해 아린과 뽀삐, 군터는 서로가 먹고 먹히는 상성이었다.
“그런 관계로 니들 서열을 니들이 알아서 정해. 뭣하면 그냥 공동 2위로 결정 내리든가.”
그 말을 하고는 다시금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배고프다.”
아린도 뽀삐도 유리의 이야기에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유리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의견을 신뢰하는 거였다.
아린과 뽀삐가 그런 자세로 나오니 주변에서도 유리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그렇게 군터의 서열 문제가 일단락되려나 싶은 순간.
“그럼 나는 어떤 거 같지?”
경기장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좌중의 시선이 뒤로 돌아가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시야에 잡혀 들었다.
철그럭-.
거기에는 언제 갈아입은 것인지, 전신 갑주를 걸치고 나타난 클라리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절컥- 절컥-.
유리를 둘러싼 인파를 헤치고 들어온 그가 유리의 앞에 섰다.
“네가 말한 그 셋과 비교해서… 내 실력은 어느 정도 위치인 거 같나, 유리 홀랜드.”
유리는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글쎄? 네 실력이라고 해 봤자 딱히 본 게 없는데?”
“…….”
클라리스는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때 나와 있었던 일은…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감흥조차 없었다는 거냐?’
일전에 완장 뺏기 퀘스트에서 클라리스는 유리를 추적하며 그와 한 차례 교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싸움은 그의 완패였다.
무장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에 제 실력을 전부 내보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했던 과거의 기억.
그 이후 무구 제작권으로 전신 갑주를 맞추었고, 최근 작은 진전까지 이뤘기에 클라리스는 자신감이 차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충만했던 자신감은 군터가 유리의 일격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내 실력으로는 유리 홀랜드를 절대 이길 수 없다…….’
눈앞의 현실에 좌절감이 들었던 클라리스는 다시 일어선 군터가 돈오를 겪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래, 유리 홀랜드가 쉬이 넘보지 못할 강자인 게… 어쩌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유리 홀랜드란 절대 강자를 목표로 따라 뛰다 보면 자신 역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군터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끝에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든 클라리스는 유리와 군터의 대결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유리에게 도전하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클라리스가 유리를 향해 자세를 잡으며 외쳤다.
“너에게 서열전을 신청한다, 유리 홀랜드! 이번에는 확실히 내 실력을 보여 주마. 네가 반드시 기억할 수 있도록!”
갑작스러운 클라리스의 도전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놀랐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이내 감탄으로 변했다.
“군터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보고도 도전할 생각을 하다니.”
“클라리스 너…….”
작게 수군거린 50기는 이내 유리와 클라리스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유리는 살포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귀찮게 하네.”
귀찮다.
너무 귀찮아서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위 서열은 하위 서열의 도전을 거부할 수 없으니까.
‘서열 1위를 너무 일찍 차지했나?’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나중에 나설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설마 군터가 그렇게 실려 나가는 것을 보고도 바로 도전하는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살짝 놀란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유리가 제 앞에 선 도전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클라리스 반이라… 그 갑투술인가 뭔가를 쓰는 녀석이랬나?’
검을 들지 않는다는 기사.
상대는 전신 갑주를 무기로 삼는 독특한 마체술을 쓰는 이였다.
그를 본 유리는 치솟았던 짜증이 사르르 가라앉으며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앞으로 나한테 도전할 애가 이 녀석으로 끝은 아니겠지?’
군터가 어떻게 됐는지를 알고도 도전하는 이가 나타났다.
다른 녀석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과연 도전해 오는 녀석들을 전부 무작정 때려눕히는 게 능사인가?’
유리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어차피 받을 도전이고 거기에 내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면… 나 또한 얻어 가는 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을 상대로 유리가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바로…….
‘경험.’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요람의 50기들.
비록 지금에야 그들이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나 예전이라면 자신이 쳐다도 보지 못할 가문의 자제들이었다.
그것도 바깥에 흔히 퍼진 그저 그런 가문이 아닌, 이름 높은 명가의 자제들.
그리고 그들이 품은 건 그 명가가 누대에 걸쳐 오랜 시간 다듬어 온 마체술의 정화였다.
유리가 노릴 건 바로 그거였다.
각 가문의 특색에 맞게 발전한, 수준 높은 마체술을 경험해 보는 것.
그건 어쩌면 이 요람에서만 누릴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리라.
거기에 유리가 노리는 게 하나 더 있었으니.
‘혹시 알아? 텟샤의 취성처럼 건질 만할 게 있을지?’
다시 말해 괜찮아 보이는 마체술이 있다면 그 원리를 빼먹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유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도둑질이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이제부터 할 대련의 과정과 결과가 중요했다.
‘이 자식까지 후드려 팼다가는 정말로 도전이 끊길지도 모르니…….’
그러니 적당히 해야 했다.
이 대련을 보고 다른 녀석들도 ‘아, 저 정도면 나도 해 볼 만하겠다!’라는 마음이 들게끔.
유리가 히죽 웃으며 클라리스를 향해 검을 까닥였다.
“자자, 후딱후딱 들어와 봐. 이 몸이 성심성의껏 상대해 줄 테니까!”
“……?”
조금 전까지 분명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던 유리가 갑자기 즐겁다는 듯 웃으니 클라리스는 순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우-.
길게 숨을 토해 낸 그가 매섭게 눈을 빛내며 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겠다!”
“오냐!”
* * *
유리와 클라리스의 대결은 앞선 군터의 것과는 그 양상 자체가 달랐다.
사력을 다해 열심히 주먹을 내지르는 클라리스와.
사뿐사뿐 여유롭게 움직이면서 상대의 빈틈을 툭툭 건드리는 유리.
앞서 군터와의 대련이 일방적인 폭행이었다면, 클라리스와의 대련은 흡사 지도 대련처럼 보였다.
그 엄청난 간극에 다른 50기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워 올릴 때, 단 두 사람만 느낌표를 띄워 올렸다.
‘쟤, 또 나쁜 짓 하려나 보다!’
‘배고프다!’
그렇게 아린과 뽀삐가 진실을 깨달은 것과 달리 나머지 50기는 경기장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군터는 왜 그렇게 두들겨 팬 거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저 둘 사이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커.’
‘저 정도 실력 차이가 나는 강자와의 대련은… 분명 나한테 도움이 될 거다.’
‘흠, 저런 식의 대련이라면 나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할지도… 아니, 해 보고 싶다!’
그렇게 부나방들이 유리가 피워 올린 모닥불로 슬슬 모여드는 사이.
경기장의 대련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쾅-!
크게 튕겨 나간 클라리스가 땅바닥을 긁으며 뒤로 미끄러졌다.
쿨럭-.
“내가 졌다…….”
살짝 피를 토해 낸 클라리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패배를 시인했다.
그는 오연히 서 있는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강하다.’
자신의 빈틈을 툭툭 치고 들어와 건드리고 나가는 유리의 검술.
그건 마치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는 것 같았다.
이에 클라리스는 유리를 상대하며 가문의 어른들에게 지도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정도로 유리와 나 사이에 큰 실력 차가 있다는 소리겠지.’
이렇게나 실력 차이가 나니 패배했어도 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내고 나니 개운한 기분이 들 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클라리스를 보고 유리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야, 네 마체술, 상당히 훌륭하다?”
그리 말하는 유리의 눈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빛났다.
‘얘한테서는 제법 건질만 한 게 있겠는걸?’
무얼 뜯어 가야 잘 뜯어 갔다고 소문이 날지, 이리저리 견적을 내 보는 유리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모르는 클라리스는 유리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고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반 가문의 갑투술은 대륙 100대 마체술 중 상위권에 속하는 마체술이다.”
“오? 그런 거야?”
100대 마체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좋다는 거네?
유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그래, 그럼 종종 또 대련하자고!”
“나야말로 잘 부탁하겠다.”
이번 대련을 통해 군터처럼 돈오를 겪은 건 아니었지만, 클라리스는 제법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가 유리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부탁하고 싶어질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대련을 마무리하려던 클라리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내 순위는 어느 정도 위치지?”
이에 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네 실력이 모자란 거는 아닌데, 공동 2위인 애들보다는 꽤 처지네. 공동 2위가 셋이니 네가 이제 5위쯤 되겠다.”
“…그렇군.”
유리의 평가에 살짝 얼굴을 굳힌 클라리스.
하지만 그는 딱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유리의 안목을 믿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정말로 클라리스와의 대련이 마무리되려는 찰나.
“두 사람 얘기 다 끝났으면, 이제 내 볼일을 봐도 되겠지?”
관객석에서 경기장으로 뛰어내린 넬리 블랑.
그녀가 유리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서열전을 신청할게, 유리 홀랜드.”
자신이 피운 모닥불로 뛰어든 부나방을 보고 유리는 환히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그리고 그 순간부터…….
50기의 서열 정하기 퀘스트가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