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69
168화. 기억상실 (1)
클라리스 반과 넬리 블랑까지.
군터 이후에 이어진 유리를 향한 도전들은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도전하겠다!”
“다음은 나다!”
클라리스에 이어 넬리까지 무사히 대련을 마치자 여기저기서 새로운 도전자들이 나타났다.
유리의 강함을 직접 경험해 보려는 이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 거다.
물론 이는 유리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다양한 마체술도 겪어 보고, 수련도 하고… 이거 꽤 괜찮은데?’
원래도 아린과 뽀삐, 테레시아를 상대로 자주 대련해 온 유리였다.
그것도 한 번 대련을 시작하면 아린과 뽀삐가 학을 떼고 도망칠 때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유리에게 아린, 뽀삐, 테레시아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과의 대련은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리는 지치지 않고 대련을 이어 나갔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마체술들을 접하는 재미가 쏠쏠했기에 실실 웃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줄 서 있는 도전자들을 상대하던 유리.
‘응?’
대충 한 스무 명쯤을 상대했을 때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어디쯤일 거 같아?”
그리고 다시 스물다섯 명쯤을 상대했을 때.
“에이, 그래도 내가 저 녀석보다 강하겠지? 안 그래?”
“…….”
유리는 깨달았다.
도전해 오는 녀석들마다 계속 자신의 서열이 몇 위인지를 물어보고 있다는 걸.
심지어 자신에게 확인받은 순위로 서열 게시판에 이름을 올리는 게 아닌가.
유리가 눈을 끔뻑였다.
‘…뭐냐, 이거?’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답해 줬다.
상대한 사람의 마체술을 분석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었다.
그로 인해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렸더니만, 하는 짓들이 아주 가관이다.
‘이 새끼들… 나한테 도전하는 목적이 달라졌잖아?’
분명 초반에 도전했던 녀석들은 자신과 실력을 겨뤄 보려 한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그나마 대련 같은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때부터는 실력을 겨룬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에게 제 실력이 이 정도라는 것을 과시하듯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실력을 ‘시연’하는 느낌으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된 유리는 동기들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지?’
그랬다.
50기의 서열 정하기 퀘스트는 요람의 역사상 유례가 없을 기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실력의 서열 1위.
1위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하위 서열.
그런데 그 서열 1위가 족집게처럼 전력을 비교 분석해서 순위를 알려 주네?
상황이 그러니 자연스럽게 유리에게 실력을 내보이고 전력을 검증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린 거였다.
그렇게 수십 명을 상대한 유리가 결국 참다못해 버럭 소리쳤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무슨 전력 측정기냐! 시발, 적당히 해!”
마체술 도둑질이나 좀 해 보려다가 졸지에 전투력 측정기 신세가 되어 버린 유리.
그 덕분에 도전이 이어질수록 50기의 서열 게시판 초안이 차츰 완성되어 갔다.
* * *
치료소에서 정신을 차린 군터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욱신욱신.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끔찍한 고통이 온몸 곳곳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놀라운 건 이게 훨씬 나아진 몸 상태라는 거였다.
처음 깨어났을 때, 군터는 정말로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거라 생각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격통에 깨어나자마자 다시 기절하기를 몇 번여.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치료소로 처음 실려 온 후로 일주일째인 오늘이 되어서야 겨우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머엉-.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어째서인지 군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몸이 아닌 정신이 고장 난 것처럼 그저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볼 뿐.
“…….”
군터가 바라보는 새하얀 천장을 배경 삼아 기절 직전의 일들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자신의 패배와 돈오.
그리고 이어진 유리의 폭언.
실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
군터는 그 기억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패배였다.’
자신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유리와의 대련.
그건 대련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무기력한 패배를 안겨 준 이가 한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착각하지 마, 병신 새꺄! 네가 인정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넌 그냥 진 거야. 네가 인정하느니 안 하느니 지껄이는 건 그냥 네가 정신 승리 하고 싶어서라고, 알아들어?]그 말에 처음에는 반발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군터는 이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말이… 옳다.’
자신의 속마음을 곱씹어 보니 유리 홀랜드의 지적이 정확했다.
뭘 멋들어지게 자신의 패배를 포장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패배를 인정하면 무언가 달라지나?
패배한 건 패배한 것인데.
군터는 작게 실소를 지었다.
‘난 아직 멀었군.’
돈오를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고 여겼다.
제 눈을 가린 아집을 벗겨 내고 조금은 트인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여전히 멍청했고, 여전히 아집에 사로잡힌 미성숙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돈오로 그저 똘똘 뭉친 아집에 작은 금이 간 것뿐.
‘뼛속까지 깃든 이 아집을 벗겨 내지 못한다면… 난 성장하지 못한다.’
자신의 해법과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아집을 벗겨 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과연 이 아집을 어떻게 해야지 벗겨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 고민할 때 군터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유리 홀랜드.”
군터는 무의식적으로 답을 찾아냈다.
‘그래, 그라면…….’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유리 홀랜드라면.
자신의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해준 그라면…….
그를 곁에서 지켜보고 배워 나갈 수 있다면 이 아집을 벗겨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군터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스륵-.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난 군터.
“…그에게 가자.”
그는 문을 열고 나아갔다.
유리 홀랜드가 있을 곳을 향해.
* * *
군터는 부단히 걸었다.
그의 목적지는 유리 홀랜드의 주거지.
그곳은 딱히 찾아보고 할 것도 없었다.
50기 중 그곳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저딴 짓거리를 할 사람은 유리 홀랜드뿐이다!’라고 추정하는 장소를 알고 있는 거였다.
어느 날 느닷없이 생겨난,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목조 건축물.
이상하리만치 음습하고 꺼림칙한 느낌에 모두가 다가가길 꺼리던 그곳이 바로 유리 홀랜드의 주거지로 추정되던 장소였다.
군터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유리 홀랜드가… 나를 받아 줄까?’
유리에게 찾아가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
그건 조금 즉흥적인 계획이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자신은 그저 유리에게 있어 외부인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을 받아 줄지 안 받아 줄지는 유리의 몫이었다.
이에 군터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유리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지 말이다.
그런 고민을 안고 숲속을 거닐던 군터.
‘…거의 다 왔군.’
무언가 뒷골이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의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는 ‘유리 일행의 주거지’라 짐작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원래 이랬던가?’
분명 이곳에 그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목조 건축물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건 겨우 뼈대만 세워진 몇 개의 나무 기둥이 전부였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군터는 사방에 널브러진 나무 잔해를 집어 들었다.
‘이건…….’
강한 힘으로 터뜨린 듯 산산조각이 난 흔적.
마치 화포로 후려갈긴 듯한 흔적에 군터는 눈을 끔뻑였다.
‘화포라고?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믿었던 동기들에게 배신당하고 한동안 잠적했던 군터는 유리의 요새가 세경의 분노에 날아간 것을 알지 못했다.
“흠…….”
그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기운.
휑한 느낌이 다분한 공터와 사방에 널브러진 처참한 잔해.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용광로.
“응? 용광로라고?”
순간 군터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믿지 못해 연신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저건 용광로가 분명했다.
‘용광로가 있다고? 그것도 숲 한가운데에?’
간이 지붕이 쳐져 있다고는 하지만, 대장간이나 다른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른 공터에 용광로 하나만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니.
저 용광로가 대체 무슨 용도로 저곳에 세워진 것인지 강한 호기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에 군터가 무언가에 홀린 듯 용광로를 향해 걸어가려는 찰나.
훙–!
군터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놀란 군터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이어, 묵직한 소리와 함께 군터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쿵-!
자신을 덮친 무언가를 확인한 군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무?’
군터를 덮친 건 다름 아닌 거대한 나무.
이게 왜?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 나무가 날아온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이 씨! 내가 던지지 말랬지!”
“배고프다!”
“들고 가기 귀찮대.”
“아놔, 목재 상한다고 몇 번을 처말해야 알아듣냐! 말 좀 들어 먹어라, 이 힘쓰는 거 빼고는 하등 쓸모없는 근육 돼지 빡빡아!”
“배고프다!”
“한 번만 더 빡빡이라고 놀리면 전쟁이다, 이 조루 새끼야! …라고 하는데?”
“캬아악! 그래, 한판 붙자! 내가 아주 미래에 날 머리털까지 아주 싸그리 뽑아 줄라니까!”
“너희들… 창피하니까, 조금 떨어져서 걸어 줘.”
“같이 가요, 선배!”
왁자지껄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군터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곧이어 네 사람이 등장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종종걸음으로 일행을 따돌리는 테레시아와 그 옆에 쪼르르 따라붙은 아린.
그리고 팔을 붕붕 휘두르며 뛰는 뽀삐와 그 등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은 유리까지.
“응?”
“어?”
가장 먼저 온 테레시아와 아린이 군터를 발견하고 멈추어 섰고.
이내 뽀삐와 그의 목에 매달려 맨들맨들한 정수리를 물어뜯던 유리마저 군터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
“…….”
4 대 1의 대치.
서로가 서로를 보고 놀란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건 유리였다.
턱-.
뽀삐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유리가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뭐야? 재바소잖아?”
“…재바소?”
자신을 지칭하는 재바소란 단어에 군터가 의문을 표했다.
이에 뚱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재수 없는 바른 생활 소년.”
“…….”
사람 면전에 대고 대뜸 재수 없다니…….
군터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가 군터를 노려보았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복수전을 하고 싶어서 왔나? 그럼 받아 줘야지, 나 그런 거 완전 좋아하거든.”
유리가 살벌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꺾었다.
우득우득-.
고막으로 전달되는 뼈 소리에 군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목적으로 온 게 아니다.”
“응?”
“복수 따위를 원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란 소리다.”
“뭐야? 그럼 여긴 왜 왔어?”
“그건…….”
순간 군터는 할 말이 턱 막히고 말았다.
너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속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해야 할지… 막상 유리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는 군터를 보고 유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할 말 없으면 그냥 가라, 나 바쁘다.”
“…….”
유리가 쌀쌀맞게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마음이 급해진 군터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 지켜보고 싶다!”
“응?”
“네가 어떤 사람인지 옆에서… 관찰하고 싶다!”
“…….”
군터의 외침이 공터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이에 테레시아, 아린, 뽀삐가 입을 떡 벌렸고.
얼굴이 창백해진 유리는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너… 너 이 새끼……! 그렇게 안 봤는데?!”
아르르르-.
“네놈도 변태 새끼였던 거냐!”
캬악!
자신에게 한 발짝이라도 접근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지독한 살기가 덮쳐 오자 군터는 눈을 끔벅였다.
‘어……?’
그러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맥락을 곱씹어 보고는 이내 사색이 되어 양손을 내저었다.
“아, 아,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캬악! 가까이 오지 마, 이 변태 새꺄!”
“그, 그… 내 설명을 좀 들어 보고…….”
“햐아악!”
훙훙- 검을 내젓는 유리를 보고 군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후 군터는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유리에게 배움을 구하러 왔다는 것을 몇 번이고 설명해야만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유리의 칼에 맞을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 몇 번이고 연출됐다.
그래도 그런 노력 덕분일까?
겨우 진정하고 군터의 설명을 이해하는 데 성공한 유리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인생 공부를 하러 왔다고?”
살짝 벙찐 표정의 유리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날 보고… 인생 공부? 진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한테?”
의혹이 가득한 유리의 물음에 군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 공부라… 표현하자면 그런 셈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는 거 같군.”
군터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공터에 정적이 감돌았다.
“…….”
“…….”
“…….”
“…….”
한참 동안 기묘한 침묵이 계속되고.
그러다가 동시에 4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매우 훌륭하고 현명한 선택이로다!”
“…쟤, 어디 아픈 거지?”
“저 자식 단단히 미쳤는데?”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