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84
183화. 5×5의 싸움 (5)
동료들이 모두 사라지고, 홀로 남아 두려움에 떨던 마지막 생존자.
파측-.
섬광이 일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자 그는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두려움에 잠식된 뇌는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텁-.
섬광 속에서 나타난 손이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읍?!”
놀란 최후의 생존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제 내 차례구나.’
그런 생각에 저항을 포기한 찰나.
그는 드디어 소리 없는 벼락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다.
‘이, 이 녀석은?!’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색의 눈동자.
파츠측-.
동료들을 잡아간 뇌전은 귀신이나 유령 따위가 아니었다.
섬광을 찢고 나타난 그는 다름 아닌 유리 홀랜드였다.
“읍읍!”
벼락 유령의 정체를 깨달은 그가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러 보려 했지만, 이미 그의 입은 유리에게 콱- 틀어 잡힌 뒤였다.
“으으으읍!”
제 손을 잡고 발버둥 치는 동기를 본 유리가 히죽거렸다.
“아아, 곱게 보내 줄 때 고이 가라. 피차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고.”
유리의 희번덕거리는 미소에 붙잡힌 50기의 안색이 새파래지고.
퍽-.
순식간에 마지막 생존자의 명치에 주먹이 꽂혀 들었다.
‘커헉!’
아득한 통증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50기는 그대로 눈앞이 하얘졌고.
퍽-.
곧 뒤통수에 이어진 둔탁한 소음과 함께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탁탁-.
유리는 가볍게 양손을 털며 미소 지었다.
“끝!”
5-2를 점령하고 있던 청군을 소리 소문 없이 단숨에 쓸어 버린 유리.
그는 점령지의 중앙으로 이동해 기관을 살폈다.
내용물이 절반 정도로 줄어든 모래시계.
유리는 청군의 모래시계를 빼내고 자신이 가져온 모래시계를 끼워 넣은 뒤 좌측으로 돌렸다.
달칵-.
사르륵-.
기관이 정상 작동하며 흰 알갱이들이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 일을 마친 유리는 푸른색 알갱이가 든 모래시계를 들고 유심히 관찰했다.
‘청군 모래시계는 우측으로 돌리고, 백군 모래시계는 좌측으로 돌리게 설계된 거네.’
근래 들어 기관 설비에 관한 관심이 폭증한 유리.
그는 모래시계와 기관에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다가 손에 든 모래시계를 흔들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이거… 모래가 아닌 거 같은데?’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린 그는 이내 힘을 주어 시계를 부쉈고.
그러자 그 속에서 가루들이 쏟아졌다.
이를 손으로 잡아 확인한 유리.
입자의 크기, 질감.
그리고 무엇보다 냄새.
유리는 확신했다.
이건 무조건 모래가 아니라고.
또한, 이는 유리가 잘 알고 있는 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 들어 그가 열정적으로 배우고 있는 것들.
“이거… 폭약이잖아?”
유리의 얼굴에 대번 활기가 돌았다.
갑자기 손이 근질근질해진 유리가 기관에 바짝 붙어 쪼그려 앉았다.
‘이거… 퀘스트 끝나면 한번 뜯어 봐야겠는걸?’
정확한 용도도 모르면서, 일단 뜯어 보고 공부하자고, 유리는 그리 결심했다.
만약 이 점령지를 지킨다는 목적이 없었다면, 이미 진즉 다른 점령지에 가서 기관을 분해하고 있었으리라.
통통-.
그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듯 기관을 두드려 보고 있을 때.
“유리유리유리잇!”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유리유리유리유리잇!”
그곳에는 양팔을 휘휘 휘두르며 뛰어오고 있는 아린이 있었으니.
유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뚱해졌다.
“뭐야? 네가 왜 거기서 오냐?”
뚱한 물음에 아린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저쪽 일 다 끝나서 교대했지!”
“교대?”
“다른 사람 점령지에 박아 두고 내가 정탐꾼 하기로 했거든.”
“아아, 변태 피해서 도망친 거구나.”
유리는 그럴 만도 하지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거기에 그 변태 선배는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드디어 자신이 교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에 아린은 신이 나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변태 선배, 3-5구역으로 갔어.”
“거긴… 율리아가 있는 곳이잖아?”
“응. 거기에 권터 라이더가 나타났대.”
이를 들은 유리가 그녀의 볼을 주욱 잡아 늘였다.
“그런 건… 맨 처음에 말하라고!”
“아아앙!”
한참 동안 볼때기를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겨우 풀려난 아린이 양 볼을 감싸 쥘 때.
유리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3-5라… 나쁘지 않아.’
아니, 백군으로서는 가장 좋은 상황이었다.
권터가 다른 곳이 아닌 율리아가 있는 곳에 제 발로 찾아들었으니 말이다.
‘그거… 마병술이라고 했던가?’
과거 공주 구하기 퀘스트가 끝나고 테레시아가 알려 주었었다.
율리아가 49기 50여 명을 데리고 공인 5단급의 마왕을 상대한 기술의 이름이 마병술이라고.
그 개요를 들은 유리는 마병술에 관해 짧게 정의했다.
‘그거 완전 사기잖아?!’
당시 율리아가 마병술에 이용한 50여명 중 대다수가 비공인 1급, 공인 1단이었다.
일반적이었다면 공인 5단에 단체로 썰려 버렸을 전력.
그런데 결과는 놀랍게도 49기의 우세였다.
비록 당시 마왕이 전력을 내지 않았다고 해도.
나아가 아주 잠시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뿐이라고 해도.
고작 그런 수준의 전력을 데리고 공인 5단급과 대등한 싸움을 한 것이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약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드러난 효과만 보면 실로 불합리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3-5에 있는 사람은 율리아를 제외하고 24명.’
공주 구하기 퀘스트 때에 비해 인원은 줄었으나 그래도 그중에는 3년 차도 섞여 있었다.
그 정도면 아예 못 써먹을 수준의 전력은 아닐 거다.
거기에 아린의 말처럼 괴츠까지 합류했다면?
‘제법 해볼 만하겠는걸?’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저쪽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건데.’
권터 라이더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그 주변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 모른다는 게 찝찝했다.
‘뭐, 상관없어.’
유리는 가볍게 어깨를 휘휘 돌렸다.
‘이기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내가 갈 때까지만 버티고 있으라고.’
그가 아린을 향해 말했다.
“아린, 뒷일 좀 나 대신 해 줘라.”
“뒷일?”
“저 자식 좀 저리 가져가서 묶어 둬.”
유리가 한쪽에 기절한 50기를 슥 보고는 숲 한쪽을 향해 턱짓했다.
“난 간다. 걔들은 못 도망가게 잘 묶어 둬!”
그러고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3-5 점령지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아……?”
눈을 감은 사이 멀어지고, 다시 눈을 뜬 사이에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유리.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린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간다고? 아, 아니, 갔다고? 그럼 5-1은?! 거기는 마무리 짓고 가야지!”
아린이 절규했지만, 이미 그 절규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쉭쉭거리고 있던 아린은 살포시 한숨을 쉬며 기절한 50기의 한쪽 다리를 잡아들었다.
“…괜히 왔어.”
정말로 괜히 왔다가, 귀찮은 일만 떠안게 되었다.
작게 꿍얼거리며 사람을 질질 끌고 유리가 말한 곳으로 향한 아린.
5-1과 5-2의 중간에 자리한 숲에 도달한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기함하고 말았다.
“어?!”
털썩-.
어찌나 놀랐던지 손에 들고 있던 다리를 놓치고 말았다.
“맙소사…….”
그녀의 시야에 닿는 곳.
그곳에는 쓰레기처럼 구겨져 널브러진 5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넝쿨 같은 것에 꽁꽁 묶여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기절한 것인지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이들.
아린은 그 수를 헤아려 보았다.
‘저것도 여섯 명인데?’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은 자신이 데려온 사람까지 포함해서 여섯.
그럼 저 나무에 매달린 것들은 어디서 온 거란 말인가?
‘설마?!’
무언가 생각난 아린은 5-1 점령지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텅텅 빈 5-1 점령지와 기관에 장착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는 흰 모래시계를 보고 다시 놀란 눈이 되었다.
‘벌써… 끝낸 거였다고?’
자신이 갔을 때 유리가 5-2 점령지에 있기에 이제 겨우 그곳을 처리한 줄 알았던 아린.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유리는 이미 진즉에 5-1을 처리하고 5-2를 정리하는 중이었던 거다.
‘하긴 유리라면… 그렇게 판단했을 거야.’
청군에게 더 가까운 쪽은 5-1이니 5-2보다 떨어진 모래의 양도 당연히 더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5-1을 먼저 처리하는 게 옳은 판단이기는 했지만…….
‘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점령지를 두 개나 처리해?’
아린은 유리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 * *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결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억지로 참으며 율리아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움푹움푹 터져 나간 대지.
난잡하게 흙바닥에 그어진 자국들.
그 모든 게 불과 10여 분 사이에 생겨난 것들이었다.
율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남은 사람은 열둘.’
그녀의 시선이 널브러진 사람들을 흘깃거렸다.
작은 미동조차 없는 게, 저들이 일어나 다시 참전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율리아는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이쪽 열둘을 희생해서… 겨우 하나 잡은 건가?’
처음 권터 일행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율리아는 이게 기회임을 깨달았다.
이대로 자신이 권터 일행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백군의 승리 확률이 올라갈 테니 말이다.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마병술과 이를 활용할 수 있는 24명의 인적 자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네.’
자신들의 전력은 절반이 날아갔지만, 상대는 여섯 중 고작 한 명만이 전투 불능이 된 상태였다.
거기에 더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지금까지의 싸움에 권터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거다.
참담한 심정에 율리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 때.
타닷-!
권터 쪽 4명이 달려들었다.
선두는 적발의 미셀 앙.
그가 손도끼 두 자루를 쥐고 돌진하자, 그 뒤로 루프 크라베, 예룬 크라베 남매가 따라붙었으며.
아리스 무어는 좌측 측면으로 파고 들었다.
전황을 살핀 율리아.
욱씬욱씬-.
그녀가 지끈거리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머리를 혹사시켰고.
그 덕분에 현 상황을 타개할 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좌측 3인 4보 후퇴.”
곧바로 다음 명령이 이어졌다.
“진형 산개!”
병사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생각은 율리아가 하고 이를 마병술로 전할 뿐.
율리아가 머리라면 병사들은 손과 발이 되는 셈이었다.
“후방 지원, 포진 대형!”
마병술을 운용한 그녀의 명령은 빠르고 정확하게 병사들에게 전달되었고.
이에 병사들이 즉각 반응했다.
그 뒤로도 빠르게 명령이 이어졌고, 율리아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적들을 포위하는 진형을 만들어 나갔다.
“정면으로……!”
그리고 다음 명령이 이어지려는 찰나.
우웅-.
갑자기 끼어든 진동음이 그녀의 명령을 집어삼켰다.
그 탓에 율리아의 명령은 이어지지 못했으며, 그 짧은 빈틈을 노리고 적들이 파고들었다.
쾅!
“크헉!”
미셀의 쌍도끼에 또 한 사람이 당해 쓰러졌다.
“전원 산개!”
결국, 율리아는 애써 쌓아 놓은 포위망을 포기하고 모든 이들을 뒤로 물렸다.
동시에 그녀는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권터를 노려보았다.
잘게 웅웅거리고 있는 그의 바스타드 소드.
조금 전, 진동음을 만들어 낸 게 바로 저 바스타드 소드의 떨림이리라.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었으며.
또한, 율리아가 마병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권터 일행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율리아의 얼굴이 짜증으로 와락 일그러졌다.
‘또 읽혔어!’
마병술은 일정한 주파수의 목소리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는 특수 최면술이었다.
따라서 그 주파수를 알아낼 수 있다면 마병술을 파훼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마병술은 진즉에 사장되었을 터.
보통은 마병술의 파훼법을 알아도 그걸 실천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 어려운 걸 저 권터는 너무도 쉽게 해내고 있었다.
‘처음 한두 번이야 그렇다 쳐도… 그래도 정도가 있지!’
처음 권터가 검을 진동시켜 마병술의 명령 체계를 뒤흔들자 율리아는 곧장 주파수를 바꿨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그 주파수로 몇 번 마병술을 사용하면 권터가 금세 그 주파수를 읽고 훼방을 놓는다는 거였다.
‘절대음감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한 사람에게 이리 많은 재능을 부여해도 되는 건가?
권터를 만든 신이 있다면 지금 당장 큰 목소리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율리아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적 4명이 곧장 다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우우웅-.
달려드는 4명의 뒤에서 무심한 눈길로 서 있는 권터.
그의 검이 미친 듯이 몸을 떨며 진동음을 토해 냈다.
이에 율리아가 재빠르게 다른 주파수로 마병술의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훙-.
갑작스러운 돌풍에 앞머리가 휘날리고.
‘어?’
율리아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를 보고 사고가 정지되어 굳고 말았다.
‘언제……?’
율리아의 앞에 나타난 존재.
그건 조금 전까지 저 멀리 서 있던 권터였다.
그가 율리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륵-.
권터의 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에도 율리아는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권터의 존재감에 그대로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아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율리아는 단념했다.
‘끝이네.’
이제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를 인정하자 그녀는 화가 치솟았다.
‘진즉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었으면서 권터 라이더는 그저 멀찍이 물러서서 구경만을 하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유희(遊戲).
권터에게는 자신의 발악을 지켜보는 게 그저 한낱 즐길 거리였을 테니까.
지금껏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율리아는 너무도 치욕스럽고 짜증이 났다.
“이 나아쁜……!”
하여, 이대로 끝날 땐 끝나더라도, 욕이라도 한 번 하고 끝내자는 생각으로 안 떨어지는 입을 억지로 연 찰나.
샥-.
율리아와 권터 사이로 검 한 자루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