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90
189화. 마왕성 (2)
나직이 던져진 검주의 질문.
다른 사람 같았다면 그 즉시 고개를 조아리고 답을 하였겠지만, 고든은 달랐다.
그는 양손으로 쥔 찻잔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며 답했다.
“어찌 먼저 연락해 주셨나 하였더니, 그것 때문이셨습니까?”
은은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
검주를 대하는 고든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또한, 비록 무릎을 꿇고는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경직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존경과 예의는 갖추되 주인과 수하란 수직적 관계를 벗어난 듯한 분위기.
공적인 자리는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분위기로 검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는 요람에서 고든뿐이리라.
이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검주를 보필해 온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단순히 긴 시간을 함께했다는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검주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이라면 고든 말고도 몇몇이 더 있었다.
그런데 검주와 얼굴을 맞대고 차를 마신다?
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다.
그 차이를 만든 요인은 간단했다.
고든이 ‘검주에게 인정을 받은 강자’였으니까.
그가 검주에게 자격을 부여받은 이였기에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였다.
후륵-.
찻물을 짧게 들이켠 고든이 향을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보고받으신 대로, 이번 퀘스트에서 막내 아드님이 패하셨습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검주의 이야기에 고든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지 않습니까? 향후 몇 년간은 요람이 막내 아드님의 세상일 거라는 데에는 저 또한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변하다니…….”
“괜히 돌려 말할 필요 없다. 내 아들놈이 요한, 그 녀석의 제자에게 패한 것이 즐거운 거겠지.”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음흉한 놈. 남몰래 그 아이에게 후원해 준 것을 알고 있거늘.”
자신이 직권을 사용하여 유리가 먹을 비약의 등급을 높여 준 일을 검주가 언급하자 고든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 물었지만, 그게 의미 없는 물음이란 걸 고든도 잘 알고 있었다.
요람의 주인인 검주가 모르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여 고든은 굳은 얼굴을 풀고 답했다.
“제 나름, 속으로 응원하고 있는 아이여서 말입니다.”
“그래, 너와 요한의 사이가 꽤 돈독했던 사실이 기억나는구나.”
“…다 옛일이지요.”
고든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데, 그 아이에 관한 조사는 어찌 되고 있더냐.”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고든은 단번에 검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답했다.
“월가(月家)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아직까진 딱히 들어온 보고가 없습니다.”
“그렇군.”
후륵-.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금 짧게 차를 들이켠 검주.
그의 심유한 눈은 쉽사리 그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40년을 넘게 모셨으나, 난 아직도 이분을 모르겠구나.’
검주 루크 라이더.
세상은 그를 절대자이자 파괴의 화신 정도로 여기지만, 오랜 세월 곁에서 지켜본 고든은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검주는 어떨 때는 잔잔한 물 같다가도, 어떨 때는 모든 걸 말소시킬 불이 되기도 하고.
모든 걸 포용할 자비로움을 내비치다가도, 흉포한 악마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종잡기 어려우며, 예측할 수도 없는 사람.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함’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품은 이.
그렇기에 더욱더 두려운 존재.
그게 고든이 수십 년 세월을 바쳐 얻은 검주에 관한 단상(斷想)이었다.
그렇게 고든이 수십 년의 세월을 되짚어 보고 있을 때.
검주가 얇은 책자 하나를 고든에게 툭- 하고 던져 주었다.
다상 위로 올라온 책자에 고든이 의문을 표했다.
“무엇입니까?”
“흑혈에 관한 내 심득을 권터 그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까지 적어 놓은 해례본이다. 가져다주거라.”
그 말에 고든의 눈이 살짝 커졌다.
라이더의 혈족.
특히, 검주의 아들·딸 모두가 요람을 거쳐 갔다.
하지만 검주는 자식 중 그 누구에게도 특별 대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모두 요람의 원칙에 맞게 보상을 내려 줬을 뿐.
지금처럼 이리 사적으로 자신의 심득을 전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례적인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 무룡대전의 우승자에게 흑룡고의 개방을 허(許)하겠다.”
“……?!”
삽시간에 동그랗게 떠진 고든의 두 눈.
어찌나 놀랐으면 그답지 않게 되묻기까지 했겠는가.
“정녕… 흑룡고입니까?”
고든의 물음에 검주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얼굴로 찻잔에 입술을 가져갈 뿐.
그 모습을 본 고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 흑룡고를 개방하시다니.’
흑룡고.
이는 요람에 존재하는 여러 창고 중 가장 높은 보안 등급의 창고이자.
검주의 개인 소장품들을 모아 놓은, 요람 최고의 보물 창고였다.
그리고 요람의 50년 역사 동안 다른 이유에서 흑룡고가 열렸던 적은 있으나, 퀘스트 보상을 위해 개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우승자에게 개방되는 흑룡고.
이는 당연히 막내아들이 우승하리라 여기고 내리는 검주의 사랑일까.
아니면 보상을 얻고 싶거든 권터를 다시 한번 꺾어 보라고 유리에게 던져진 검주의 시험일까.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번 무룡대전은 제법 볼만하겠구나.’
고든의 입가에 진한 기대감을 머금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 * *
무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10월 말.
“…멋있어.”
“웅장하네요.”
“배고프다!”
“끝내주는군.”
쪼르르 일렬로 서서, 너도 나도 한마디씩을 내뱉은 테레시아, 아린, 뽀삐, 군터.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 근 6개월간 그들의 피와 땀을 섞어 만든 결과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외벽과 세모꼴 지붕.
각각의 모서리마다 세워진 4개의 첨탑.
거기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붕은 물론 외벽에까지 수두룩하게 박혀 있는 날카로운 나무 가시까지.
대충 보면 네모난 밤송이 같은 흉물스러운 모양의 성이었지만, 그들 넷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멋있는 보금자리였다.
어찌 안 그러겠는가.
잘못된 인연을 만든 죄로 그 귀한 휴가증조차 써 보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한 시간.
그동안 그들은 강제로 정성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새록새록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이제… 이제 끝난 거겠지? 정말?”
“우리보고는 외부만 만들라고 했잖아. 내부는 자기가 한다고. 여기서 더 일 시키면… 나 진짜 파업할 거야!”
“배고프다!”
불신하는 군터와 주먹을 울끈 말아 쥔 아린.
자기도 파업에 동참할 거라는 듯 강하게 콧김을 흥- 뿜어낸 뽀삐까지.
그들은 이제 남들 다 쓴 휴가증을 자신들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살짝 들떠 올랐다.
그때였다.
“바보들.”
잔잔하게 들려온 목소리.
이에 세 사람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니, 그곳에는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테레시아가 있었다.
“이미 글렀어. 아직도 모르겠니? 우린 절대 그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테레시아 선배님?”
군터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테레시아는 해탈한 얼굴로 답했다.
“너희는 상상이 가?”
“예?”
“유리의 요리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말야.”
“…….”
“난…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아. 어쩌면 난 이미… 그 녀석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걸지도 몰라. 아아… 그래, 난 돼지처럼 길들여진 게 분명해!”
“……?!”
테레시아의 현실 자각, 자아 성찰에 50기 삼인방은 상상해 보았다.
지금까지 먹어 온 유리의 요리를 포기하고 다시 건량 신세로 돌아갈 수 있을지.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동시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마, 맙소사! 정말이구나!’
‘나… 완전 길들여지고 있었어?!’
‘배고프다!’
자신들이 길들여진 돼지 혹은 노예란 진실을 수개월 만에 깨달았지만, 이미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특히 누구보다 그 사실을 일찍 깨달은 테레시아는 다소 염세적인 얼굴이 되었다.
“난… 배고픈 자유인보다, 배부른 노예가 될 거야. 그냥 유리가 시키는 거 다 하고 해 주는 음식 얻어먹을래.”
빠른 상황 판단과 빠른 포기.
이에 경악한 아린이 테레시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테, 텟샤 선배님아! 포기하지 마요! 예전의 그 당당하고 도도했던 당신으로 돌아오란 말이에요!”
“…늦었어. 이미 그때의 내가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
“아, 안 돼!”
아린이 절규하며 테레시아를 흔들었고.
짤짤짤-.
해탈한 테레시아의 고개가 맥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콰강!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음에 네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우뚝 멈추었다.
그들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야?”
* * *
매캐한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실내.
콜록콜록-.
켈룩켈룩-.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두툼한 손이 까만 뒤통수를 거칠게 후려갈겼다.
퍽-!
“야, 이놈의 새끼야! 내가 그거 적당히 처넣으라고 했지!”
앞으로 고꾸라졌던 고개가 불쑥 치솟으며 짜증 섞인 외침을 터뜨렸다.
“아이 씨! 그러니까 그 ‘적당히’가 대체 얼만데!”
유리의 항의에 세경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딱 보면 모르냐? 보자마자 따악- 이만큼만 넣으면 되겠다고 감이 오잖냐?”
“응, 안 오는데?”
“등신.”
“아오, 그러니까 그게 얼마냐고!”
“대충 요만큼이지!”
하얀 가루를 한 꼬집 쥐어 보이는 세경을 보고 유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재수 없어. 이래서 천재들이란.”
무릇 연금술이란 정확한 수치와 계량이 기본 아니겠냔 말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는 무슨 대충 눈대중에, 대충 손대중으로 모든 걸 해치우고 있었다.
‘더 재수 없는 건, 그렇게 눈대중, 손대중으로 하는 게 저울로 계량하는 나보다 더 정확하다는 거지.’
투덜거린 유리는 세경이 쥐어 보인 ‘요만큼!’을 저울로 측정하여 기록해 넣었다.
이후 다시 이런저런 가루를 사발에 섞어 나가는 유리.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됐다! 확인 바람!”
유리가 내민 울긋불긋한 가루를 유심히 본 세경이 멸시하는 시선을 보냈다.
“뭐냐, 이 쓰레기는?”
“쓰레기라니! 영감이 알려 준 대로 만든 거잖아!”
“난 이딴 쓰레기 조합물 만드는 방법은 알려 준 적이 없다만?”
“무슨 소리야. 난 분명 알려 준 대로 했는데? 영감이 이상하게 알려 준 거 아냐?”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 유리가 자신이 적은 계량 기록지를 내밀었다.
“쯧. 줘 봐라.”
짧게 혀를 찬 세경은 기록지를 뺏어 들고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슥슥-.
작은 계량 숟가락으로 각종 가루를 저울 위에 퍼 올려 유리에게 보란 듯이 보여 주는 세경.
신기한 건 그렇게 딱 한 번 저울에 올리는데 더 덜고 보탤 것도 없이 딱딱 정확한 계량이 이뤄진다는 거였다.
덕분에 엄청 빠른 속도로 제조가 이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전히 붉은빛이 도는 가루가 약사발 안에 나타났다.
이를 본 유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어… 이,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정도로 희한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세경이 한 계량과 비율은 기록지에 적힌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자신과 똑같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도 결과물이 다르게 나오는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으니 일단 유리는 의심부터 하고 봤다.
“딱 말해, 영감… 나 몰래 뭐 다른 거 넣었지?”
“다른 거는 무슨. 그냥 네놈이 똥손인 게지.”
“또, 똥손?”
나름 손재주를 자부하며 살아온 유리였기에 똥손이란 표현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놀라 경직된 유리를 보고 세경은 혀를 찼다.
“쯧쯧, 요리도 손맛이 있듯이 연금술도 손 기운을 타는 법이다.”
세경은 그리 말하고는 유리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뭐, 그깟 연금술? 야금술처럼 단번에 해치워 주겠다고?”
“…….”
“풉! 개소리도 이런 수준급 개소리가 또 있었을까.”
“…….”
“하긴 하나의 재능을 줬으면 하나를 뺏는 게 맞는 게지. 아암, 그게 바로 정의지! 정의는 살아 있던 게야! 프흐흐.”
한껏 조롱을 들어도 유리는 딱히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야금술을 배우기 시작해 근 한 달 만에 세경의 밑천을 전부 털어 내며 자신감이 차올랐던 유리.
그는 세경의 연금술도 단번에 밑천을 털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요리면 요리.
조각을 비롯해 미술의 각 분야.
거기에 각종 수공업과 야금술까지.
손 쓰는 일이라면 놀라운 천재성을 보였던 유리의 연금술 재능은 지극히 평범했다.
상황이 그러니 야금술을 싹 털렸던 세경만 신이 나 떠들었다.
“에라이, 난 네놈 나이 때 이깟 조합은 눈 감고도 했다!”
“…아예, 그러시겠죠.”
“그러지 말고 그냥 때려치우지 그러냐? 네놈, 이쪽으로는 영 재능 없어.”
“꽁술 영감, 나 조금은 영감의 마음을 알 거 같아.”
“뭔 마음?”
“영감이 왜 되지도 않는 야금술을 붙들고 늘어졌던 건지.”
“…….”
“시발, 이거 진짜 오기 생기네? 내가 연금술 이거… 될 때까지 하고 만다!”
유리의 강한 의지에 ‘암, 내가 그 마음 잘 알지’라는 얼굴로 슬쩍 고개를 끄덕이던 세경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 이 몸은 연금술과 야금술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천재였기에 야금술을 놓지 않고 있던 것뿐이다! 요한 놈한테 못 들었냐? 이 몸이 차기 마이스터로 거론되던 천재였단 걸?”
“예이예이, 들었죠. 그래서 그 전도유망하신 천재께서 어쩌다가 이런 추방자 신세가 되셨대?”
유리가 툭 던진 이야기에 세경의 얼굴이 우울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