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95
194화. 무룡대전 (3)
후우우-.
고요한 숨결이 안면 가리개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카가가강-!
단검이 전신 갑주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군터의 표정은 다급하지도,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매우 평온할 뿐.
군터는 침착한 눈으로 적을 바라보았다.
‘…강하다.’
48기 서열 4위라는 게 거짓은 아닌 듯 하이스는 강했다.
‘하지만…….’
군터는 요한에게 받은 가르침을 떠올렸다.
[경지의 높고 낮음은 분명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이나, 이긴 놈이 꼭 높은 경지를 지닌 건 아니다. 때론 지보다 못한 놈한테도 처발리는 게 이 바닥 아니더냐? 특히 그런 경향은 좆밥들 싸움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법이지.]경험이 부족한 낮은 단수는 스스로가 지닌 마나양과 마력, 그리고 뽐내듯이 사용하는 기예에 의존하기 쉬웠다.
이를 두고 요한은 이리 말했다.
[원래 대갈통이 덜 여문 놈들이 상대가 지보다 못한 놈이라 생각하면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하지. 왜냐? 그게 가장 쉽거든. 뭣 하러 나보다 못한 놈 처리하는 데 굳이 골치 아프게 대가리까지 쓰겠냐?]거기에 덧붙여진 이어진 설명.
[그건 역으로 말해… 힘 딸리는 놈도 머리만 잘 쓰면 충분히 나보다 쎈 놈을 고꾸라뜨릴 수 있다는 소리인 게지. 뭐, 원래 상대를 이기기 위해 열나게 대가리를 굴리는 게 약자의 전유물이긴 했다만…….]요한은 말했다.
특히 낮은 단수 간의 싸움일수록 1~2단의 차이를 단번에 뒤집는 결과가 자주 나타난다고.
다만…….
[뭐, 그것도 아무나 못 하는 거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유리 놈처럼 애초부터 타고나든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열심히 공부해야지.] [공부? 공부가 별거냐?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면 그게 공부인 거지.]요한이 말한 공부란 실로 간단한 방법이었으며,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많은 경험이 나중에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이른바 고릿적부터 전해진 정론(正論).
이를 들은 군터가 조금 맹한 얼굴을 하자, 요한은 가소롭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걸… 네놈은 얼마나 하고 있느냐?]그리고 군터는 요한이 어째서 그리 가소로운 시선을 보냈는지…….
그것을 유리 일행과 함께하며 깨달았다.
유리, 테레시아, 뽀삐, 아린.
그들은 퀘스트, 개인 수련, 요새 짓기 같은 일 외에도 실전 같은 대련을 매일 반복했다.
그 대련을 주도하는 건 유리와 테레시아.
아린과 뽀삐는 낑낑거리며 억지로 참여하였지만, 그래도 녹초가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대련에 임했다.
그 모습이 군터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런 대련을 매일같이…….’
나름 자신도 혹독한 훈련 일과를 소화해 내고 있다고 여겼지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수련일 뿐.
군터는 과거 자신의 행적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람에 들어와서 누군가와 대련해 본 적이 있었던가?’
퀘스트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수련을 위해 다른 동기들과 검을 나눠 본 적이 있던가?
‘없… 군.’
생각해 보면 가문에 있을 때가 오히려 다른 기사들과 대련을 더 자주 한 것 같았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었다.
요람에 적응하느라.
퀘스트를 하느라.
먹고사는 방안을 마련하느라.
이래저래 시간이 없었으니까.
물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유리 홀랜드도 마찬가지였을거다.
아니, 늘 성적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가 더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반드시 대련을 하고 있었다.
‘요한 님마저 인정하는 재능을 지닌 유리도 경험을 쌓고자 저리 매일같이 대련을 하는데 정작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아 주먹을 울끈 말아 쥔 군터.
그는 곧장 자신도 대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맑은 물의 유입에 4명의 고인물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흘러.
매일매일 이어진 실전 같은 대련과 복기(復棋)는 서서히 군터를 변화시켰고, 또한, 성장시켰다.
그 성과가 지금… 증명과 검증의 무대에서 나타났다.
캉-!
‘언뜻 화려해 보이나 아린에 비하면 변칙적이지 않고.’
스컥-!
‘뽀삐보다 힘이 있는 것도 아니며.’
키긱-.
‘테레시아 선배님처럼 집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리보다 느리다!’
군터의 눈이 하이스의 움직임을 전부 완벽하게 읽어 냈다.
그렇게 읽은 움직임과 그간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이스가 이후 어찌 행동할지 ‘예측’하게 되었고.
그건 다시 군터가 직접 기회를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카카캉!
긴 장검을 훑으며 밀려드는 두 자루의 단검.
그 순간 군터는 검 자루를 손에서 놓았다.
‘뭐……?!’
싸움 도중 군터가 검을 놓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하이스는 잠시 당황했고, 그로 인해 작은 틈이 생겨났다.
그 틈을 유도한 군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훙-.
순식간에 품으로 파고든 군터의 어깨가 하이스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쾅-!
“컥!”
강검처럼 마나를 머금은 견갑(Pauldron)이 강타한 순간, 하이스는 위장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그의 육신이 뒤로 주륵 미끄러졌다.
‘큭… 자세를!’
하이스는 실력자답게 일격에 쓰러지지 않고, 곧장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다만 문제는 상대도 그걸 예상했다는 거였다.
턱-.
군터가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의 검을 낚아채 그대로 날렸다.
쉐엑-!
“……?!”
날아오는 검에 당황한 하이스가 가까스로 몸을 뒤틀었으나, 조금 늦고 말았다.
스걱.
군터의 장검은 그의 허벅지를 가르고 지나가 버렸다.
거의 뼈가 보일 정도로 갈라진 허벅지.
하지만 그보다 하이스를 더욱 당혹스럽게 한 것은 검을 뒤따라온 군터였다.
쿵-!
경기장이 작게 울릴 정도로 땅을 내디딘 순간.
군터는 은빛 충차가 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으직-.
흡사 성문을 꿰뚫은 것처럼, 군터의 팔꿈치가 하이스의 명치에 틀어박히니.
‘컥!? 이, 이 새끼가……!’
동시에 어마어마한 고통에 입을 떡 벌린 하이스가 침을 흘리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아까 때린 데를 또?!’
그사이 하이스의 육신이 허공을 날아 그대로 경기장 벽면에 틀어박혔다.
쾅-!
그 모습은 흡사 일전에 유리에게 덤볐다가 튕겨 나갔던, 과거의 군터를 연상케 했다.
후드득-.
하이스가 처박힌 곳에서 잔해가 모락모락 먼지를 피워 올리는 사이, 군터는 흙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감회가 깃들었다.
‘나도 많이 변했군.’
검을 손에서 놓는 것도 모자라, 던지기까지 하다니.
기사가 지녀야 할 자존심을 중히 여겼던 몇 달 전의 자신이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무수히 반복해 온 대련이 그를 변화시켰다.
헛된 자존심을 지키고자 고집한다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히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저벅저벅-.
군터는 하이스에게 다가갔다.
철철 피를 흘리는 다리.
부러진 듯 보이는 왼팔과 갈비뼈.
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하이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내장도 상한 듯 입으로 피를 흘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군터가 검을 겨눴다.
“죄송합니다만, 저한테 예의를 가르치기엔 그쪽은 조금 모자란 듯싶습니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자신이 했던 말을 군터가 비꼬자 하이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너… 이… 그 갑옷만… 아니었으면…….”
갑옷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승리였을 거란 하이스.
그가 쥐어짜듯 던진 말에 군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이 전신 갑주가 아니었으면, 아마 제 몸은 진즉 난도질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아는 ‘그 녀석’이라면 분명 이리 말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군터는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철걱-.
훤히 얼굴을 드러낸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니.
“꼬우면 너도 사 입든가. 왜 지랄이야?”
자신을 내려다보는 군터의 냉랭한 시선에 하이스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너 이… 끄륵!”
이를 바득 깨문 그는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렇게 하이스가 미동조차 없이 늘어지자 군터는 검을 넣고 자신이 나왔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저벅저벅-.
관객들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벅저벅-.
승자 선언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를.
이에 조용했던 경기장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하이스가 진 거야?”
“고작 1년 차한테?”
최약체라 평가받는 1년 차가 3년 차를 꺾은 상황.
첫 시합부터 일어난 파란에 조용했던 장내가 급격히 달궈졌고.
와아아아아-!
이내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와 원형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물론 그 함성을 내지른 이들의 대다수가 50기였다.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걸어가던 군터는 무의식적으로 50기들이 모여 있는 객석을 바라보았다.
우뚝-.
그러다가 돌연 멈추어 섰으니.
“…없군.”
실망감이 담긴 중얼거림을 내뱉은 그는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군터는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경기 시작 전, 그가 느낀 짜증은 사실 짜증이 아닌… 섭섭함이었다는 것을.
* * *
1년 차가 3년 차를 꺾은 파란의 24강 1조 시합 이후, 연달아 두 번이나 또다시 파란이 일어났다.
그 주인공들은 똑같이 5년 차를 꺾고 12강으로 진출한 4년 차의 수잔 리플리와 3년 차의 괴츠 뢰턴.
하지만 파란은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 24강 4조에서는 5년 차가 4년 차를 손쉽게 제압했고, 5조의 테레시아는 동기인 49기를 당연하게 짓밟고 12강으로 진출했다.
마지막 6조 또한 5조처럼 동기 간의 시합 끝에 4년 차의 안드레스 체이슈가 12강을 확정 지었다.
그렇게 24강의 첫날이 무난히 끝을 맺었고.
다음 날.
24강 나머지 조의 시합이 펼쳐지는 둘째 날.
첫 시합부터 많은 이들이 기대를 안고 원형경기장을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시작인 7조에 바로 ‘그 유리 홀랜드’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흠… 드디어 볼 수 있는 건가?”
“권터를 꺾었다는 그 실력… 이번에 확실히 확인해 주지.”
“그런데 그거 사실인 거 맞아? 정말 권터 라이더를 이겼다고?”
“성검을 썼다잖아.”
“난 솔직히 그 녀석이 권터를 이겼다는 것보다 성검을 사용했다는 게 더 믿기지 않는데? 그냥 뜬소문 아냐?”
여기저기서 첫 시합을 놓고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으니.
그 모든 게 수개월 전에 있었던 연합 퀘스트 이후, 빠르게 요람에 퍼진 유리에 관한 소문 및 괴담이었다.
유리 홀랜드가 팔 한 짝만 써서 수십 명을 이겼다거나.
유리 홀랜드가 권터를 단칼에 때려눕혔다느니.
유리 홀랜드가 권터를 잡는 데 사용한 게 성검이었다느니, 혹은 2m짜리 마검이었다는 등.
분명 사실이나 어딘가 조금씩 과장된 소문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었다.
하여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부푼 기대를 안고 경기장에 찾아왔지만, 그들의 목적은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
“24강 7조 경기는 상대의 기권으로 유리 홀랜드의 승리다!”
경기장에 올라와 보지도 않고 2년 차가 1년 차를 상대로 기권해 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대기석에서 시합을 기다리다가 흑검병의 전달 사항을 듣고 낄낄거리는 유리.
“이야, 이 새끼… 잘 피해 가네? 기권이라니?”
“…그 새끼가 그래도 네 선배야.”
“그냥 살포시 다리 한 짝, 팔 한 짝씩만 어루만져 주려 했었는데. 쯧.”
“…잘 피해 간 게 맞구나.”
유리를 타박하던 테레시아는 현명한 선택으로 위기에서 탈출한 동기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사이 유리는 군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표정이 왜 그렇냐?”
“…뭐가 말이지?”
“뭔가 되게 아니꼬운 낯짝인데?”
그런 유리의 말에 군터는 슥, 주변을 둘러보았다.
좁은 대기실에 줄줄이 들어찬 테레시아, 아린, 뽀삐.
자신의 시합 때와는 달리 북적북적함이 느껴졌다.
이에 살짝 튀어나온 군터의 주둥이가 달싹거렸다.
“…그럴 리가.”
“맞는데?”
“네가 잘못 본 거다.”
극구 부정하는 군터를 게슴츠레 바라보던 유리는 이내 관심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볼일 끝났으니 이제 나가서 놀아 볼까?”
그렇게 유리를 필두로 일행이 막 대기실을 벗어나려는 찰나.
다시 들이닥친 흑검병이 그들을 붙잡았다.
“24강 8조 경기는 상대의 기권으로 프리츠 싱의 승리다.”
유리 조의 경기에 이어 8조 역시 부전승으로 순식간에 경기가 끝난 상황.
하여 흑검병은 다음 명령을 전달했다.
“24강 9조에 속한 이는 속히 다음 시합을 준비하라.”
그 명령에 좌중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가니.
“9조 참가자, 아린 헬가! 출격 준비 끝!”
그곳에는 어느새 활과 화살집을 멘 채 환히 웃고 있는 아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