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96
195화. 무룡대전 (4)
원형경기장의 서쪽.
3년 차를 위한 대기실 중 하나에서 스산한 울림이 퍼졌다.
스각- 스각- 스각-.
대기실의 중앙에는 짧은 적발의 소년, 미셀 앙이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스각- 스각-.
실내를 장악한 스산한 울림은 다름 아닌 그가 숫돌에 도끼날을 벼려 내는 소리였다.
스각- 스각-.
상체가 앞뒤로 왔다 갔다, 미셀의 움직임은 기계적으로 반복됐다.
경건한 몸가짐으로 날을 세우는 그 모습은 흡사 종교의식을 연상케 할 정도.
그런 미셀의 옆에는 이미 완벽하게 날을 세워 놓은 또 다른 도끼가 놓여 있었다.
스각-.
잠시 뒤, 미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고.
“…….”
도끼를 수직으로 세운 그는 날카로운 날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확인했다.
날이 만족스럽게 세워진 것을 확인한 미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상의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그러자 드러난 우락부락한 근육들.
미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리 챙겨 온 그릇에 검지와 중지를 담갔다 뺐다.
두툼한 손가락에 묻어 나오는 검붉고 진득한 액체.
찰박-.
그건 다름 아닌, 짐승의 피였다.
미셀은 피 묻은 손가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상체에 가져다 댔다.
직- 직-.
우락부락한 상체 근육을 도화지 삼아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미셀의 분위기도 서서히 변해 갔다.
그건 평소 ‘권터 라이더의 집사’라 불리는 차분한 느낌과 사뭇 상반된 분위기였다.
그렇게 상체에 피의 도형을 하나둘씩 채워 나가며 미셀은 유리 홀랜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적당히 설치고, 따까리는 빠져.]자신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서는 그나마 ‘집사’라고 칭하지만, 뒤에서는 빈대, 노예 등으로 낮잡아 부른다는 걸.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이 말하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유리 홀랜드가 면전에서 대놓고 한 날을 떠올리면 미셀은 이상하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그 말을 한 사람이 선배나 동기도 아닌, 어린 후배 놈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음에도 반격조차 못 해 보고 일격에 기절해 버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그 말을 한 존재가 유리 홀랜드였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 속한 가문이나 세력조차 없다고 했던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유리 홀랜드는 떠돌이 출신이라 했다.
대체 어떻게, 어떤 이의 추천으로 요람에 들어온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가문이 아닌 개인의 추천으로 요람에 들어왔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미셀은 옹졸한 분노를 느꼈다.
‘나를 요람에 들여 보내기 위해 우리 부족이 어떤 희생을 감수했고, 부족을 위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놈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
좋은 뒷배경을 가진 이들이 자신을 욕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가진 게 달랐고, 누릴 수 있는 게 달랐으니까.
그들은 자신과 별개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으니까.
하여 무시할 수 있었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 홀랜드는 달랐다.
그는 어찌 보면 자신과 비슷한 부류였다.
가문의 배경 없이 요람에서 생존하게 된 존재.
하지만 그와 자신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유리 홀랜드에게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눈부신 재능이 있다는 거였다.
그런 재능을 가진 이가, 가진 것 없이 발악해 온 자신의 희생과 노력을 ‘따까리’라고 폄하하다니.
‘…너는 나를 그런 식으로 모욕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직- 직-.
분노를 담은 손가락 놀림이 계속 이어진 끝에.
마침내 미셀의 상체가 핏빛 도형으로 빼곡히 가득 찼다.
그리고 때마침 흑검병의 명령이 떨어졌다.
“미셀 앙, 입장해라.”
이를 들은 미셀은 한 손을 토기 그릇에 푹 담갔다가 뺐다.
톡- 톡- 톡-.
손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물을 보며 미셀은 다짐했다.
‘반드시 승리하고 올라간 뒤…….’
핏물 젖은 손이 그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고.
‘유리 홀랜드, 네놈에게 나의 발악이 어떠했는지… 똑똑히 알려 주마!’
번뜩이며 떠진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문신을 한 것처럼 피로 얼룩진 모습.
미셀은 더 이상 권터의 집사라 불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피의 아이’라 불리던 용맹한 부족의 야만 전사로 거듭나 있었다.
척-.
미셀은 쌍도끼를 집어 들고 터벅터벅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번 시합의 상대는 아린 헬가라고 했던가.’
그녀는 유리 홀랜드와 몰려다니는 인물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누가 되었든 어차피 자신이 꺾고 넘어야 할 상대일 뿐.
하여 미셀은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상대의 주무기는 활… 거리만 좁힌다면 확실히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거기다 전장 역시 궁수에게는 불리한 한정된 공간이었다.
거리를 좁히거나 혹은 상대의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방어에 치중하거나.
궁수를 상대할 전략은 다양했다.
어떻게 아린을 상대할지를 떠올린 순간.
미셀이 막 출입구를 지나쳤고.
‘어디냐!’
경기장에 발을 디디자마자 그는 아린을 찾아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먼저 들어온 건가?’
아직 아린이 경기장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미셀은 곧장 눈을 빛내며 경기장 중심을 향해 달려 나갔다.
‘중앙을 내가 차지해야 한다!’
원형경기장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손쉽게 아린에게 노출되는 위험이 있겠으나.
하지만 반대로 아린이 어느 출입구에서 나타나든 곧장 달려들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미리 아린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시작은 좋군.’
미셀은 쌍도끼를 쥐고 주변을 경계하며 내달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그가 경기장의 중심에 다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타났다.’
2시 방향에 자리한 출입구.
그 안쪽에서 짙푸른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아린임을 알아차린 미셀.
‘온다!’
곧이어 그의 예상대로 그곳에서 푸른 머리의 소녀가 튀어나왔다.
나타난 아린은 이미 백색의 활을 힘껏 잡아당긴 상태.
그녀는 출입구와 경기장의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곧장 활시위를 놓았다.
퓨슉-!
소리는 하나였으나, 갈라진 궤적은 총 3개.
이를 본 순간 미셀은 극도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후우우웅-.
2개의 손도끼가 미셀의 양손에서 풍차처럼 회전했고, 미셀은 느려진 광경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지척에 나타난 두 대의 화살.
카가가강-.
순간 이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화살이었지만, 이미 잔뜩 경계하고 있던 미셀은 손쉽게 화살 두 대를 갈기갈기 분쇄해 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집중과 긴장을 놓지 않았다.
이미 아린이 3대의 화살을 쏘아 보낸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분명 동시에 쏘아 보낸 화살이 서로 다른 시간에 도달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궁술이었지만, 미셀을 더 놀라게 한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스스스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
세 번째 화살을 찾아 허공을 감시하던 미셀의 감각에 이상한 것이 걸려들었다.
그건 바닥에 낮게 깔려,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를 느낀 미셀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이건?!’
화살이라면 너무도 당연히 높은 위치에서 날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경계했다.
그러나 아린의 세 번째 화살.
그건 땅바닥에 거의 붙다시피 하여 날아들고 있던 것이다.
미셀이 이를 알아차리고 다급히 발목을 보호했다.
그런데.
쉭-!
세 번째 화살이 지면에서 60도 각도로 튀어 오르듯 솟구쳤다.
그 말도 안 되는 궤적을 본 미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무슨 괴상한 궁술이냐?!’
화살이 바닥에 깔려 날아오는 것도 모자라 중간에 방향을 꺾어 솟구치다니.
이게 정녕 자신이 알고 있는 궁술이란 말인가?
아연실색한 미셀.
하지만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극도로 집중하여 육신을 옆으로 움직였다.
‘움직여라… 움직여! 더 빨리!’
푸슉-.
최선을 다해 육신을 비튼 결과,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던 화살이 어깨에 꽂혔고.
이에 미셀은 희열하였다.
‘됐다!’
빠른 판단 덕에 치명상은 피했다.
비록 어깨가 당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상처는 충분히 움직일 만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할 일은 하나뿐.
‘그 녀석은?’
미셀의 의식이 아린을 좇았다.
그러자 저 멀리, 다음 공격을 위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느릿느릿 미셀의 시야에 잡혀 들었다.
미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궁술이었다만, 한 번 당한 이상 더는 먹히지 않을 거다!’
상대의 궁술이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이란 것을 인지했다.
또한, 비상식적인 변칙성을 보인다는 것도.
하여 이제부터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방어에 치중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품고 아린을 향해 뛰어가려는 찰나.
퓨슉- 퓨슉- 퓨슉-.
왼팔 삼두근, 오른쪽 날개뼈.
그리고 오른 종아리까지.
동시에 세 곳에서 격통이 밀려들었다.
‘…큭?!’
미셀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사이 아린이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고.
퓨슉- 퓨슉- 퓨슉-.
왼쪽 무릎, 복부, 오른 팔목에 추가로 세 대의 화살이 꽂혀 버렸다.
털썩-.
미셀은 달리지 못하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마지막에 날아든 3대의 화살은 분명 그 역시도 아린이 날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날아든 3대의 화살.
즉, 뒤쪽에서 날아와 꽂힌 그것들은 도무지 언제 날린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내가… 움직임을 놓쳤던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화살의 회피에 집중하고는 있었으나, 의식적으로 아린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하여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 3대의 화살을 쏜 이후 그녀가 쏜 화살은 방금 전의 3대가 전부란 것을.
‘그럼, 뒤에서 날아든 이 3개의 화살은 대체 언제……?’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6개의 화살이 갑자기 9개로 늘어난단 말인가.
그리 혼란스러워하는 그때.
미셀의 뇌리로 한 가지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셀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설마… 설마 처음부터 연기였던 거냐?”
만약 경기장에 처음 도착한 게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린 헬가가 먼저 도착한 뒤, 자신을 방심시키기 위해 뒤늦게 나타난 척 연기를 한 것이라면?
‘그럼… 모든 게 말이 된다.’
3대의 화살을 일시에 쏘아 보냈음에도 각기 도달하는 시간을 다르게 조절할 수 있는 기기묘묘한 궁술의 소유자라면.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미셀의 추측은 정확했다.
‘성공이다!’
자신이 미리 깔아 둔 수가 성공적으로 먹혀들자 아린은 환히 미소 지었다.
입장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온 아린.
그녀가 경기장에 입장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높디높은 하늘을 향해 3대의 화살을 쏘아 보낸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출입구로 돌아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녀는 미셀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 마치 이제 막 입장한 것처럼 연기했다.
만약 미셀의 등장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시간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한정된 화살 중 3대를 허무하게 날려 버렸을 작전.
하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자신의 작전을 성공시켰고.
그 결과…….
“크윽!”
48기의 서열 3위, 미셀 앙을 무릎 꿇렸다.
시합이 시작된 지, 불과 10초가 지나기도 전에.
* * *
7조와 8조가 부전승으로 싱겁게 끝난 가운데.
아린의 주무기가 활임을 안 좌중은 9조 역시 미셀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장에서 펼쳐진 광경에 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으니.
“…….”
“…….”
7대의 화살을 몸에 꽂은 채 무릎 꿇은 미셀 앙.
그런 그를 향해 여전히 활을 겨누고 있는 아린 헬가.
요람 내에서 은연중 무시받던 궁술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
심지어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3년 차를 1년 차가 신기(神技)에 가까운 궁술로 제압한 상황에.
대다수 기수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태연한 건 오로지 유리 일행뿐.
“…저 악마 같은 화살의 움직임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저는 솔직히 이제… 맨몸으로 아린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선배님.”
“배고프다.”
그간 자신들이 겪어 온 아린의 궁술을 평가하는 테레시아와 군터.
거기에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뽀삐까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유리를 제외하면, 자신들 중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존재가 바로 아린이란 것을.
그녀의 궁술이 얼마나 진보하였는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세 사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인정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쯧!”
한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인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가니.
그곳에는 불량스럽게 육포를 질겅질겅 씹는 유리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활시위를 당기고만 있는 아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똥멍청이가! 뭘 멀뚱멀뚱 서 있는 거야? 그 시간에 화살을 더 꽂아 넣어야지! 저러다 일어나면 어쩌려고? 쯧쯧.”
그 말에 주변인들이 ‘에이, 설마 화살을 일곱 발이나 맞고도 움직일까?’라는 눈빛으로 다시 경기장을 바라본 순간.
“아……?”
“어엇?!”
마치 유리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셀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