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
1화. 탈피 (1)
시시하다.
‘사람 탈을 쓴 괴물’이라 불리는 사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감상은 그러했다.
난생처음 검을 쥐고 보낸 세월이 25년.
그간 절대자가 걸어온 길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싸움, 전투, 전쟁.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고, 승리만이 존재의 증명이었다.
열다섯 나이, 그는 첫 승리에서 한 사람의 생을 앗아 갔고.
백(百) 명을 베고 승리를 취했을 때, 세상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천(千) 번째의 승리에서 그 이름에 명성이 깃들었다.
만(萬) 자루의 검을 꺾으니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고.
단신으로 일국(一國)을 베어 내니 세상은 사내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더는 꺾을 검도.
더는 대적할 이도 사라졌을 때.
발아래 엎드린 세계가 그를 검의 주인이라 칭하며 경외했다.
위기는 있었으나 패배는 없었다.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지상 최강의 생명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검의 극의를 보았다고 칭해지는 존재.
검주(劍主), 루크 라이더.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룬 절대자에게 찾아든 것은 지독한 고독이었다.
오로지 투쟁만이 삶의 전부였던 그였기에 정적에 잠긴 삶은 고통과 다름없었다.
이제 고작 마흔이란 나이.
그는 여전히 투쟁에 목말랐고, 더 나아가고 싶었다.
더욱더 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꺾을 검이 없구나.’
세상 어디에도 자신에게 대적할 존재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에 그는 한탄했다.
그 순간 절대자의 뇌리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나에게 대적할 검이라…….”
지금 세대에 대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두 꺾어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벼려 내면 되지 않겠는가?’
자신과 신명 나게 어울려 줄 예리한 검을.
자신의 심장을 노릴 다음 세대의 대적자를.
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키워 내면 되지 않겠는가.
“좋구나… 좋아!”
생각만 해도 즐겁고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광기가 차오르며 번들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로 한 가지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재능을 지닌 자여, 내게로 오라!]이는 절대자의 약속이자.
[내, 너희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줄 터이니, 이로 말미암아…….]또한, 피의 축제를 알리는 선포였다.
[나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어라! 내 목을 끊어 낸 자가 나의 전부를 계승할지어다!]절대자의 선언에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검주의 전부.
누군가는 이를 검주가 깨우친 마지막 심득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세계를 움직이는 절대적인 권력이라 하였으며.
혹은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검주의 후계라고도 하였다.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검주의 전부’를 계승한다면 이는 곧 대륙의 지배자가 됨을 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이 탐욕스럽게 흥분했고, 재능을 지닌 자들이 검주가 벌인 축제판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검주의 선포 이후 42년.
‘검좌 찬탈’이라 불리는 축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나날이 피로 얼룩져 가는 절대자의 권좌를 얻기 위해.
더욱더 많은 피를 권좌에 묻혀 가며.
* * *
촤아악-.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프헉!”
피를 토해 낸 사내는 바닥에 널브러져 죽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이곳이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눈에 잡힌 풍경은 사내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불타오르는 건물.
시선이 닿는 곳곳에 즐비한 피와 시신.
‘시산혈해의 지옥.’
지금 주변 상황을 표현할 단어는 그뿐이었다.
‘어쩌다… 이리되었지?’
이번에 자신이 속한 조에게 떨어진 명령은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그저 영주의 눈 밖에 난, 작은 산골 마을 하나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일.
야밤에 가벼이 산책을 나왔다고 여길 정도로, 참 보잘것없는 임무였다.
실제로 건물을 불태우고, 자다 놀라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베어 내면서도 긴장은커녕 지루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20여 가구에 불과한 작은 마을 하나가 초토화되는 데에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집이 불탔고, 대다수 주민이 칼날에 베여 숨을 거뒀다.
다만 마지막 집.
마을 끝자락의 가장 작고 허름한, 사람이 산다는 게 믿기지 않을 그 집이 변수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화르륵-.
마지막 집에 불이 붙고 가장 먼저 뛰쳐나온 노파가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것으로 임무는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마지막 집에서…….
‘괴… 물.’
…괴물이 나타났다.
짙은 어둠을 품은 괴물이.
크르륵-.
난데없이 나타난 괴물은 불길 속에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마, 막아!] [저게 뭐야?!] [도, 도망쳐!]싸우고자 하는 투쟁심도.
평생을 단련한 기예도.
모든 게 괴물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0명에 달하는 동료 전원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하하…….”
끔찍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사내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살기는 그른 건가…….’
검을 쥐는 팔이 뜯겨 나갔고, 척추를 다친 것인지 하반신에 감각이 없었다.
피도 많이 흘린 탓에 벌써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뒈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겼지만, 이런 작은 산골 마을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사내가 한탄하고 있을 때.
저벅- 저벅-.
흐릿한 사내의 시야에 살아 움직이는 작은 발이 들어왔다.
이를 보자 심장이 쿵쾅거렸고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다.
곧이어 두 눈에 가득 들어온 하나의 형상.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황금색의 눈동자.
그리고 왼쪽 눈 밑에 자리한 작은 눈물점.
이제 고작 7살이 되었음 직한 사내아이가 부러진 식칼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산골 출신답지 않게 뽀얀 피부와 올망졸망한 미모가 꽤 돋보였지만, 아이를 본 사내의 얼굴에는 옅은 두려움이 깃들었다.
“넌…….”
연약해 보이는 작은 아이.
하지만 사내는 알고 있었다.
스무 명의 동료를 찢어 죽인 괴물이.
그리고 자신의 팔을 뜯어 간 괴물이 바로 저 녀석임을.
“쿨럭!”
빠르게 뛰는 심장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피가 돌자 사내가 피를 토해 냈다.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
“대체… 왜 그랬냐고!”
변성기도 오지 않은 가냘픈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아이의 등 뒤로 검은 형상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촤아악-.
사내의 하나 남은 팔이 날아갔다.
튀어 오르는 피.
이제 정말로 끝임을 직감한 사내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란 감정이 사라졌다.
그가 아이를 보며 웃었다.
“큭, 크크크. 왜… 그랬냐고?”
아이는 묻고 있었다.
어째서 마을을 불태웠냐고.
어째서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죽였냐고.
이에 사내가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약하… 니까. 너희는 약하기… 때문에… 짓밟힌 거다.”
“…….”
“그리고… 내가 약했기 때문에… 너에게… 죽는 거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미약한 목소리.
그러나 확고한 신념이 담긴 목소리가 아이의 가슴에 낙인찍혔다.
“…약해서라고?”
“약자는 짓밟히고 도태되나 강자는… 짓이기고 진화한다.”
“…….”
“그게… 검주의 시대다.”
세계는 검주에 의해 평정되었지만, 오히려 그에 의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과거보다 더욱더 철저해진 강자 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
사람들은 이를 검주의 시대라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넌 검주의 시대를 즐길 충분한 자격이 있는 놈이지.”
고작 식칼 한 자루로 20명의 기사를 몰살시킨 저 괴물이라면, 충분히 이 냉혹한 시대의 주역이 되리라.
‘잘 놀다 오거라. 크크큭.’
그 생각을 끝으로 사내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
아이는 죽은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아이의 발걸음은 멈췄다.
그런 아이의 발 근처.
그곳에는 피를 흘리며 죽은 노파가 있었다.
아이는 그녀의 시신을 멍하니 응시했다.
곧이어 아이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작… 고작 이렇게 죽을 거였으면서…….”
슬픔인지 기쁨인지.
아픔인지 후련함인지 모를 기묘한 감정.
도저히 어린아이답지 않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크르릉-.
그리고 이에 반응하듯 아이의 등 뒤로 검은 형상이 크게 일렁이다 사라졌다.
그로부터 사흘 뒤.
커다란 나무 상자를 짊어진 중년 사내가 산골 마을로 들어섰다.
“이, 이건?!”
지난 몇 년간 산골 마을을 돌며 생필품을 팔거나 가죽을 사들이는 등의 일을 해 온 보따리상.
그는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기겁했다.
‘싹 타 버렸구먼!’
불과 3주 전까지만 해도 마을이 있던 곳에 남은 것은 검게 타 버린 잔해뿐.
‘어찌 된 거지?’
상인은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검은 잔해와 곳곳에서 보이는 검붉은 자국.
상인은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핏자국?!’
순간 그의 등 뒤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 올랐다.
‘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핏자국이 있다는 건 이곳에서 무슨 변고가 있었다는 이야기.
어쩌면 마을의 변고는 아직 끝난 게 아닐 수 있었다.
이에 상인이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찰나.
“아저씨.”
“히익!”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인이 대경실색하여 후다닥 몸을 돌렸다.
놀라 창백했던 그의 안색이 자신을 부른 존재를 보고 화색을 되찾았다.
“너, 너는… 그… 유리라고 했던가?”
검은 머리에 황금안이라는 독특한 외모.
거기에 자신이 마을에 들를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곁을 맴돌던 꼬맹이였기에 기억이 났다.
상인이 유리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이게 어찌 된 거냐?! 마을은 왜 이 모양이고?”
질문을 던지면서 상인은 유리의 행색을 살폈다.
검은 재투성이의 의복은 검붉은 딱지가 가득했고, 손끝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었다.
그리고.
‘뭔 애새끼 눈깔이?!’
공허한 유리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상인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상인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지금까지 묵묵히 서 있던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응? 왜 그러냐?”
“이게… 뭔지 알아요?”
유리는 상인에게 작은 패를 하나 내밀었다.
마을을 습격한 이의 품에서 나온 물건.
유리가 내민 것을 살펴보는 상인의 미간이 모여들었다.
“어? 그건?”
뱀처럼 구불구불 휘어진 검(劍) 문장이 그려진 철패.
근방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던 그는 그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파울리 가문의 문장 같은데?”
“파울리… 가문?”
“왜, 이번에 이 인근 영토의 영주로 부임한 가문이 있지 않으냐? 쥐뿔, 능력도 없이 욕심만 가득해서 통행세를 50%나 올려 버린 도둑놈들! 이깟 깡촌에서 뭘 하겠다고 그리 뜯어 가는지, 원! 우리 같은 보따리 장사꾼은 다 굶어 죽으란 거야 뭐야!”
“…….”
“듣기로는 영주가 되려고 칼잡이 몇 데려다가 무리하게 기사단을 만든 탓에… 거기에 들어간 돈을 메꾸려고 그렇게 영지를 탈탈 털고 있다더구나.”
맺힌 게 많았던지 상인은 주저리주저리 떠벌렸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태를 깨닫고 헛기침을 흘렸다.
“헛험! 아, 아무튼 그 문장은 파울리 가문의 것 같은데… 그건 어디서 난 게야?”
“…감사합니다.”
상인의 물음에 유리는 패를 거두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꼬마야!”
유리를 붙잡아 보려 했지만,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섬뜩함에 몸이 굳어 버린 것이다.
한편, 걸어가는 유리의 두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약하기 때문에 짓밟힌 거라고?’
그게 검주의 시대라고?
정말로 고작 그런 같잖은 이유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면…….
‘너희도 한번 짓밟혀 봐.’
강한 결의에 반응하듯 유리의 그림자가 작게 요동쳤다.
그렇게 유리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상인은 참아 왔던 숨을 내쉬었다.
“푸흐! 뭐, 뭐야?!”
숨을 할딱이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허리춤에 있던 거, 그거… 칼 아니었나?’
정신이 없어서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유리의 허리춤에 있던 것은 반 토막 난, 식칼이었던 듯싶었다.
그것도 진흙투성이의 식칼이 말이다.
‘식칼이 맞나?’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더듬던 그는 유리가 서 있던 곳의 뒤쪽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상인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흙무덤 수십 개가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허…….”
탄식한 사내는 깨달을 수 있었다.
피와 흙으로 얼룩져 있던 유리의 손끝.
흙투성이의 부러진 식칼.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혼자서… 무덤을 만들었던 거냐?’
상인의 시선은 수십 개의 봉분에서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2주 뒤.
유리가 살던 산골 마을 인근에 한 가지 소식이 휘몰아쳤다.
[파울리 가문이 괴물에게 잡아먹혔다!]벽촌에서 나름 방귀 좀 뀐다던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멸문당한 것.
파울리 가문의 저택이 불탔으며 당시 저택에 남아 있던 이들 중 생존자는 없었다.
그날 저택에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에 잠에서 깼던 이들 중 몇몇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집채만 한 검은 괴물이 파울리 저택을 집어삼켰다고.
한동안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파울리 가문을 멸문시킨 괴물에 대해 떠들었다.
하지만 정작 불타 버린 파울리 저택의 한쪽 구석에 방치된, 반 토막 난 식칼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