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06
205화. 무룡대전 (14)
수잔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확실해, 백화독은 통하지 않는다.’
어떤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리 홀랜드에게는 자신의 독이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흡수한 독의 양이면 이미 치사량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여전히 멀쩡한 것을 보면 더 이상 백화독은 그에게 전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껏 요람에서 그녀의 독이 통하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명, 권터 라이더뿐.
그런데 오늘 그녀의 독이 통하지 않는 두 번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수잔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은 몰라. 백화독만 통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 거다.’
정말 드물게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사람이 나타나고는 한다.
어쩌면 유리 홀랜드도 그런 경우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스르릉-.
시합이 시작되고 그녀가 처음으로 검을 빼 들었다.
‘조금 더 강한 아이들로 먹여 줄게!’
수잔은 30㎝ 길이의 중단검을 왼손 안에서 빙그르르 회전시켜 역수로 쥐었다.
동시에 앞으로 쏘아진 그녀의 신형.
탓-!
달려드는 수잔의 몸놀림은 매우 빠르고 경쾌했다.
이를 본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단순히 독 하나에만 의지하는 건 아니라 이건가?’
이제는 간단히 몸동작만 보아도 상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이 갔다.
그가 보기에 수잔은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48기 서열 중위권까지는 가볍게 제압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실력에 독까지 가미되었으니 47기 서열 1위가 된 것이리라.
유리가 그런 생각으로 수잔의 움직임을 좇을 때.
슥-.
입술과 손톱이 보라색으로 변한 수잔의 오른손이 오므려졌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는 어느새 꺼낸 것인지 모를 얇은 못이 끼워져 있었으니.
수잔은 그것들을 유리를 향해 힘차게 뿌렸다.
쉬쉭-!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3개의 못.
이를 본 유리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암기?’
심지어 그것도 그냥 암기가 아니었다.
보랏빛 광택이 옅게 묻어나는 것을 보니 독이 발린 게 분명했다.
물론 고작 이 정도에 유리가 위기를 느낄 리는 없었다.
카가강-.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그가 날아든 암기를 손쉽게 쳐 냈다.
그런데 암기는 단순히 겉에만 독을 바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퍼버벙-.
유리의 검이 닿기 무섭게 공중에서 터진 못들이 보랏빛 독연을 뿜어냈다.
삽시간에 주변을 자욱하게 장악한 독연.
이에 유리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이건 좀… 독하네.’
이번 독은 백화독이라 불린 것보다 더 지독했다.
뇌기가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조화신수가 아니었다면… 위험했겠는데?’
독이란 게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까다로운 공격 수단이란 것을 깨달은 유리.
그가 몸속에서 독이 분해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사이, 지척에 도달한 수잔이 빠르게 단검을 휘둘렀다.
쉐엑-.
독과 마나가 섞인 독검이 보랏빛 독연을 가르며 유리를 향해 나아갔다.
보라색의 독.
이는 수잔이 보유한 독 중 두 번째로 독기가 강한 것이었다.
현재 그녀가 보유한 독 중 가장 독기가 강한 것은 실전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양을 모으지 못했다.
다시 말해 지금 사용한 독으로도 유리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그녀에게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는 뜻.
‘쓰러져!’
수잔의 독검이 유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독연이 그녀의 검술에 따라 유리의 주변을 휘몰아쳤다.
‘하나… 단 하나면 돼!’
큰 상처가 아니어도 된다.
자신의 독검에 아주 작은 생채기라도 입게 된다면 독연에 노출되게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르고 강력하게 중독시킬 수 있다.
그리고 수잔이 배운 독검술은 상대를 중독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기예였다.
휘오오-.
유리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독 연기와.
스사사-.
연기 사이에 갇힌 그를 난도질하듯 빠르게 휘둘러지는 단검.
보통의 기수였다면 사방에 휘몰아치는 독연을 신경 쓰면서 날아오는 단검을 피하느라 순식간에 손발이 꼬였을 거다.
그러다 독연을 마시거나, 혹은 독검에 베이거나, 결국 어떻게든 중독되는 결말을 맞았을 터.
하지만 유리는 달랐다.
스륵-.
운보를 펼친 유리가 독연과 단검의 공세를 너무도 손쉽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수잔의 통제에 놓여 있던 보랏빛 독연의 움직임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마치 아까 백화독의 통제가 끊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에 수잔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체내의 독을 풀어냈다.
하지만.
스오오-.
그녀의 독은 이내 다시금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대체 어떻게?!’
이게 도무지 무슨 조화인지 몰라 수잔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어 갈 때,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싶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수잔의 고개가 돌아갔지만, 이미 유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네 독이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수잔이 독에 대한 통제를 잃은 이유.
그건 너무도 간단했다.
유리가 그 흐름을 미리 읽어 내고 툭툭 방해했기 때문.
“그 이유가 뭐냐면…….”
유리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트는 수잔을 보고 다시 운보를 밟았다.
슥-.
그렇게 수잔이 바라보는 방향의 반대쪽에 나타난 그가 씨익 웃었다.
“아니다, 안 알려 줄래.”
그러고는 다시 운보를 밟으며 유리는 검을 내질렀다.
술래잡기를 하듯, 자신을 좇는 시선을 피해 유령처럼 나타난 유리.
그의 검 끝이 수잔의 몸을 살짝 찌르고 빠졌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수잔의 전신이 핏물로 물들어 갔다.
따끔따끔한 고통 속에 그녀의 얼굴 역시 좌절과 분노로 물들어 갔다.
‘이 녀석… 날 가지고 놀고 있어!’
휙-.
분개한 수잔이 단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 자리에 유리는 없었다.
대신 반대편에 나타난 다시 그녀를 콕 찔렀고.
“너… 큭!”
쉭-.
수잔이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유리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수잔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유리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런데 너 말야…….”
수잔의 등 뒤에 바짝 나타난 유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정도 수준의 독을 썼다는 건, 날 죽일 생각이었다는 거잖아? 그치?”
귓가로 불어오는 유리의 숨결은 뜨거웠지만, 역설적으로 냉랭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연이어 나직하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반대쪽 귓가에 속삭여졌다.
“그럼… 내가 널 죽여도 할 말 없겠네?”
고막을 타고 등줄기로 번져 나가는 섬뜩함.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수잔은 본능적으로 항복을 외치려 했다.
한데.
턱-.
어느새 정면에 나타난 유리가 수잔의 입과 턱을 단번에 낚아챘다.
그 덕분에 유리와 눈을 마주하게 된 수잔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유리의 눈동자 속으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혼이 삼켜진 그녀는 어느새 사방이 깜깜한 공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헉?!’
무저갱 같은 공간 속에서 요사스럽게 빛나는 거대한 황금 눈동자가 그녀를 압사시키듯 내려다보았다.
너무도 생생히 흉포한 살의의 집합체를 목격하고 만 수잔.
‘아아……!’
삽시간에 정신이 붕괴된 그녀는 온몸이 굳고, 혀가 말려들어 갔다.
동시에 그녀는 깊숙이 묻어 두었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이, 이, 이 눈?!’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내뱉은 순간 돌변한 유리 홀랜드의 눈빛.
그건 그녀에게 마독술을 알려 준 스승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 수잔이 너무도 두려워했던 그 눈.
지독히도 잊고 싶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눈빛.
그녀는 이를 이리 칭했었다.
‘하… 학살자의 눈!’
그건 최소 수십, 혹은 수백 단위의 사람을 죽여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런 눈을 일개 요람의 기수가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런 눈을 한 자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된 것과 다름없을 터.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수잔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죽음 앞에 몸을 떨어 대는 것뿐이었다.
‘사, 살려…….’
단검을 내지르면 찌를 수 있는 거리임에도 수잔은 팔에 힘을 줄 수 없었다.
그녀는 촉촉이 젖어 들어간 눈망울로 간절히 빌었다.
이를 본 유리는 피식거렸다.
“살려 달라고?”
그의 물음에 수잔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간절함에 유리는 잠시 멈칫했다.
“흠…….”
그는 어린 시절,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검은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의 피를 손에 묻힌 것이다.
그 일을 지금에 와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또한, 지금도 죽이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여태껏 수잔을 죽이지 않고 있는 건 갑자기 생각난 요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네 화신이 제대로 형상을 갖추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냐?]요람에 들어오기 전 요한이 던진 의미심장한 질문.
[내 첫 바람은 누군가의 죽음이었어. 그런 바람에서 태어난 내 화신은 살의가 사라지며 완성되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덩어리진 형상으로 남게 된 게 아닐까?]그에 대해 자신이 한 답변과.
[어디 한번 열심히 고심해 봐라. 과연 어떤 걸 쌓아야지 네놈의 화신이 제대로 된 형상을 지니게 될지. 그게 과연 네가 말한 ‘바람’이란 게 맞을지.]그리고 요한이 내준 평생의 숙제까지.
옛 기억이 폭풍처럼 몰아쳤고, 그 속에서 피어오른 작은 고민에 유리는 살의를 가라앉혔다.
스륵-.
턱을 강하게 부여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자신을 억누르던 살의가 사그라지자 다리에 힘이 풀린 수잔은 그대로 반쯤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턱-.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은 강한 손.
“히끅!”
놀란 수잔이 경기를 일으키자, 유리가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귀 쪽으로 얼굴을 가져가 대며 작게 속삭였다.
“너… 나한테 빚 하나 진 거다? 잊지 마.”
“……?!”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검은 공간 속에서 보았던 황금빛 눈동자가 떠오른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것만이 살길이라는 듯, 필사적으로.
그러자 손에 힘을 푼 유리가 수잔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이 사람, 기권한답니다!”
당사자도 아닌 시합 상대방이 외친 기권 선언에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관객들은 의문 섞인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했다.
하지만 곧 흑검병이 수잔의 패배를 인정하자 여기저기서 작은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유리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
“우오오오오오오!”
객석에서 난데없이 우렁찬 외침 하나가 터져 나왔다.
그곳에는 객석의 난간에 다리를 걸친 채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제리가 있었으니.
“우와아아아악! 미, 믿고 있었다! 네가 이길 거라고 믿고 있었다고, 이 미친놈아아아아!”
배당 종이를 꽈악 움켜쥔 그는 경기장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우오오오!”
“우와아!!”
“유리 홀랜드으으으!”
49기와 50기의 객석에서 수많은 사람이 우르르 난간으로 달라붙어 환희의 괴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제리와 같은 종이가 들려 있었으니.
이를 확인한 제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하 씨… 이러면 배당률 낮아지는데.”
유리 홀랜드란 특수를 자신만이 누리기엔… 그는 너무도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제리가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는 사이.
시끌벅적한 객석에서 시선을 뗀 유리는 도망치듯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수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물론 수잔을 죽일 생각으로 살기를 품기는 했지만, 보통은 그런 살기를 맞고도 이를 바락바락 갈며 달려드는 게 요람의 기수들이었다.
한데, 수잔은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살의에 과민 반응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지.’
그건 어린 시절 진짜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경험한 수잔이었기에.
다른 기수들은 제대로 읽지 못한, 유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오래된 살의를 읽어 냈다는 사실을…….
정작 당사자인 유리 본인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 * *
유리와 수잔의 준결승 시합이 끝나고.
상황이 정리되기 무섭게 경기장 안에 두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저벅저벅-.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경기장의 중앙에서 마주한 괴츠와 권터.
서로를 바라보던 둘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괴츠 쪽이었다.
“올해 무룡대전에서만큼은 네가 아닌 다른 녀석과 전력을 다해 싸워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리 말하면서 괴츠의 시선이 권터의 어깨 너머, 객석에 자리한 유리를 흘끗거렸다.
하지만 이내 권터에게로 시선을 돌린 괴츠가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솔직히 결과가 좋지 못하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네.”
“…….”
“그리고 혹시 아나? 후배들이 그랬듯 나 역시 기적을 만들어 내면서 결승에 올라갈지? 하하.”
가볍게 검을 빙빙 돌리며 무어라 떠들어 대는 괴츠와 달리 권터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나직이 딱 한마디를 내뱉었으니.
“말이 많군.”
스르릉-.
권터가 검을 뽑았다.
스오오-.
검집에서 검신이 서서히 드러남과 동시에 칠흑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며 어떠한 형상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이를 본 괴츠는 표정을 굳히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요즘은 저게 유행인가?”
그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권터.
콰앙-!
그가 휘두른 검은 기운에 얻어맞은 괴츠가 포탄처럼 튕겨 나갔고.
쿠과강!
괴츠를 경기장 벽에 처박아 버린 권터의 검은 기운을 본 유리 역시 놀란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성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