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13
212화. 흑룡고 (3)
시간은 안드레스와 율리아가 신경전을 벌이고, 그 후로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즘.
그들을 피해 빠져나왔던 유리는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한 사람을 마주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유리가 다니는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를 막아선 거였다.
유리는 상대를 살펴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에 구릿빛 피부.
흰색 견장을 찬 건강미 넘치는 46기 미녀.
분명 어디선가 본 듯 굉장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우리 구면이지?”
거기다 상대도 유리에게 알은체를 해 왔다.
“흐응…….”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누구냐는 듯한 적나라한 눈초리에 붉은 머리 미녀는 볼을 긁적였다.
“나 기억 안 나? 속살도 보여 준 사이인데?”
그러면서 그녀는 훌렁 어깨를 까며 유리에게 윙크해 보였다.
그 윙크를 보고서야 유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아! 난봉꾼 애인 3호!”
스쳐 가듯 본 얼굴이었음에도 기억이 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건 그녀와의 첫 만남이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붉은 머리 미녀는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땡!”
“…아니라고?”
“정확히는 난봉꾼의 전 애인 3호란다. 최근에 헤어졌거든.”
“내가 그 자식 언젠가는 차일 줄 알았다. 역시 정의는 살아 있는 법이지!”
“그것도 땡!”
“……?”
“차인 건 내 쪽이거든.”
“엥?”
“괴츠가 몇 달 전에 만나고 있던 사람들을 전부 정리했어. 그 바람에 나도 차였고.”
조금 씁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라리 잘된 거 아닌가? 그런 난봉꾼과 헤어진 건데? 지금이라도 새 사람 찾아서 떠나.”
“난봉꾼이라… 너 정말 괴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뢰턴 가문이 어떤 곳인지도?”
“내가 굳이 그걸 알아야 해?”
“후후, 나중에 알아보렴. 꽤 재밌는 곳이니까.”
“뭐, 시간이 나면. 언제 날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그만한 남자를 찾기 힘든데… 꼭 붙잡고 싶었는데…….”
정말로 아쉬움이 가득해 보이는 여인의 눈빛이 살짝 몽롱해졌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차차, 오늘은 실연 따위를 하소연하러 온 건 아니고,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그녀의 말을 유리가 정색하며 끊었다.
“내가 괴츠보다 괜찮은 남자인 건 알지만, 그쪽은 내 취향 아냐.”
이에 여인의 입가에 어이없다는 미소가 걸렸다.
“…물론 너도 꽤나 내 취향이지만, 오늘 널 찾아온 건 그 이유가 아니야.”
“그럼?”
유리의 물음에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유리에게 날렸다.
푸슉-.
날아온 물체를 가볍게 받아 든 유리.
“뭐야 이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물건.
그건 한 장의 작은 종이 카드였다.
뻣뻣하고 조금 딱딱한 재질.
온통 새까만 종이의 한쪽 면에는 새하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동그란 원을 십자가가 반으로 가르는 듯한 형상.
다만 십자가의 한 직선은 길고, 한 직선을 짧으며 위치마저 비대칭이었다.
‘이건… 십자가가 아니라 검인가?’
어찌 보니 둥근 원을 관통한 검처럼 보이기도 했다.
“흠…….”
그리고 그 뒤편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몇 개의 숫자가 적혀 있었으니.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본 유리가 넌지시 물었다.
“이건 뭔데?”
“초대장.”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날 초대하는 사람이 많이도 찾아오네? 그래서 그쪽은 어디 소속이지?”
소속을 묻는 말에 처음으로 그녀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지금은 알려 줄 수 없어.”
“이건 또 창의적인 초대 방법이네. 소속도 안 알려 주고 손님을 초대한다라…….”
“원래 위험한 초대가 더 매력적인 법이거든.”
그 말에 가볍게 콧방귀를 낀 유리가 손가락에 낀 검은 카드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 초대장의 사용법은?”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어. 네가 요람에 있는 동안, 그게 언제가 되었든… 자정 정각까지 거기 적힌 좌표로 그 카드를 가져다 놓기만 하면 돼.”
그 설명을 듣자마자 유리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자정 정각.
검은 카드.
하얗고 이상한 도형.
이건 너무도 불길한 요소 아닌가?
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거 막… 이상한 거… 칼로도 못 때려잡는 그런 걸 불러들이는 물건은 아니겠지?”
“응? 뭐라고”
“아냐…….”
“아무튼 그렇게 하면 우리의 초대를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 측 인원이 너를 찾아갈 거야.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해 주겠지. 우리의 정체부터, 널 초대한 이유까지.”
그 설명을 들은 유리의 얼굴이 대번에 풀렸다.
“아아, 뭐야? 그런 거였어? 난 또 뭐라고!”
“……?”
이상할 정도로 안심하는 유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붉은 머리가 이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그럼 이만 난 가 볼게. 초대에 응하고 말고는 네 선택이지만… 될 수 있으면 응해 줬으면 좋겠어! 너의 현명한 선택 기대할게!”
그렇게 그녀는 양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끝끝내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말이다.
이후 홀로 남은 유리.
그는 손에 쥔 카드를 물끄러미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자고로 제 이름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것들이랑은 얽히지 않는 게 상책이지.”
심지어 이렇게 불길해 보이는 초대장이라니.
자신의 경험상 이런 것과 엮이면 명만 짧아지는 법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유리는 받은 초대장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고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말끔하게.
* * *
다시 시간은 흘러 무룡대전이 끝난 일로부터 4일째.
조만간 부르겠다는 고든의 말과는 달리 유리를 찾는 흑검병은 없었다.
남는 시간에 유리가 한 일은 하나였다.
바로 자신이 만들어 낸 ‘마류-가두기’를 요한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유리의 선생 노릇.
하지만 그의 인생 첫 수업은 시작부터 엄청난 난항을 겪고 있었으니.
“아니! 그걸… 그걸 왜 못 하는데!”
“……”
“와극- 하고 가뒀다가 와르륵- 하고 내보내면 되는 거잖아!”
“…….”
“와극- 하고, 와르륵-만 기억하라니까! 그 느낌만!”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는 유리를 보며 요한도 자기 가슴을 텅텅 쳤다.
“그러니까 와극- 하고 와르륵- 이 대체 뭐냔 말이다!”
“그걸 몰라?”
“모른다!”
“왜 몰라!”
“네놈이 제대로 설명해 주질 않는데 어찌 알아!”
“아까도 설명해 줬잖아! 이보다 더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건데?”
복장이 터진다는 듯한 얼굴의 요한이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환장하것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만큼 답답해하는 저 낯짝을 보고 있자니 그건 아님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정말… 고작 이딴 느낌으로 이 가두기란 걸 만들어 낸 거야?’
처음에 설명을 듣기는 했다.
흐름을 잡는 게 아니라고.
그건 잡을 수 없으니 끊임없이 흐르는 힘을 잠시 막아 가두고, 이를 축적시켰다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터뜨리는 거라고.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는데…….’
문제는 그 가두고 터뜨리는 핵심 요소가 와득- 과 와르륵- 이란다.
세세히 풀이해 줘도 따라 하기 힘든 것을 저딴 5살짜리 꼬맹이나 할 법한 소리로 가르치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천재란 것들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어. 전부 나가 죽어야 해. 쯧쯧.”
자신도 그 재수 없는 천재 부류에 속했었건만, 이제는 자신보다 더한 천재를 만나게 된 요한.
그것도 자신이 몇 년이나 끙끙거리고도 완성 못 한, 마류 3식을 저딴 얼토당토않은 방식으로 만들어 낸 천재를 만났기에 신나게 욕을 해 댈 수 있었다.
반면 유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내가 천재가 아니고 그냥 영감이 멍청한 건데?”
“…내가? 이 요한 레드너가?”
“어, 그 요한 레드너가!”
“…….”
“부절검은 무슨, 고작 이딴 것도 이해 못 하는 재능으로 어디 칼밥은 먹고 살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얼른 다른 기술을 알아봐.”
“이… 이… 이익!”
“내가 야장술이라도 알려 줄까? 엉? 아니면 그 꽁술 영감 문하생으로 들어가든가. 아마 좋다고 받아 줄걸? 대신 너무 갈굼받아서 영감 그 나이에 탈모가 생길 수도 있겠다.”
“야, 이 스벌 놈아, 말 다 했냐!”
버럭 소리친 요한의 손이 유리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뜨, 뜨왓씨?! 악! 내 머리! 야이 미친 노친네! 이거 안 놔?! 엉?!”
화들짝 놀란 유리도 덩달아 요한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켁! 이, 이 저주받을 애새꺄! 네놈은 노인 공경도 모르냐!”
“영감은 이거 아동학대야!”
“노약자를 배려하란 말이다, 이 인간 말종 놈아!”
“누가 봐도 내가 약잔데? 그러는 영감은 자라나는 새싹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냐?! 이 인류애 따윈 똥통에 처박은 노친네야!”
“여기 새싹이 어디 있어! 되바라져서 누렇게 뜬 이파리만 있지!”
아웅다웅.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도 절대 먼저 손을 놓지 않는 두 사람.
그때 유리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소리쳤다.
“아오, 진짜! 잡기가 아닌 가두기고, 그냥 와득- 하고 흐름을 막아서 와르륵- 터뜨리면 되는 거라니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결국, 영감이 만들어 낸 이론이 기본 골자고 거기에 내가 살을 덧붙인 거뿐인데 왜 이해를 못 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 아니고 영감이 알고 있는 거라니까!”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관계가 역전된 상황.
서로서로 머리채를 붙잡아 씩씩거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마류 가두기에 관한 설명이 오갔다.
이후, 붙잡은 머리채를 먼저 놓은 건 요한이었다.
“…옘병할 애새끼.”
투덜거리며 그가 손을 놓자 유리도 손을 놓고 입술을 삐죽였다.
서로 등 돌려 머리를 정돈하는 두 사람.
그러고 나서도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물론 삐지거나 그래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통해 얻은 것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뿐.
유리는 유리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그렇게 한참 동안 유리가 해 준 말 같지도 않은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는 유리를 보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놈은 뭔 생각 하냐? 애인이라도 생겼어?”
“애인은 무슨.”
“그런데 엊그제부터 뭔 고민을 그리 하는 게야?”
“흠…….”
요한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인 유리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어… 음, 영감?”
“왜.”
“그… 검주의 군림은 공인 7단이 사용하는 영역(Zone)과는 다른 거야?”
“난 또, 뭔 고민을 하나 싶더니만 별… 당연히 다르지, 그게 같겠냐?”
유리가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다른데? 군림을 겪어 보기는 했지만, 영역이란 건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군림을 겪어 보긴 네놈이 뭘 겪어 봐. 설마 그 권터라는 애새끼가 사용한 군림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게냐?”
“…달라?”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요한은 피식거렸다.
“둘을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정도라고? 하긴… 백보 의식 때를 생각하면…….”
백보 의식에서 자신을 짓누르던 검주의 기세가 망치질이라면 권터의 것은 갓난아이의 토닥거림 정도일지 몰랐다.
유리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요한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잘 들어라. 군림과 영역은 그 개념부터가 다르다.”
“어떻게?”
“공인 7단이 사용하는 영역이란 감각의 확장이다. 일정 공간 자체를 자신의 신체 일부처럼 취급하면서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거지. 하지만 군림은 다르다. 군림은… 공간을 지배한다.”
“…공간을 지배?”
“쯧, 이름이 왜 군림이겠냐? 바로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모든 것을 발아래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단순히 압박을 가하는 수준? 그건 군림의 진짜 능력을 단 1%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야.”
“…….”
“검주가 군림하는 공간에서 그는… 신이 된다. 손가락질 하나로 수백의 인간을 핏물로 만들고, 비를 거꾸로 솟구치게도 하며, 태풍도 일으킨다.”
“…그게 사람이야?”
저 말대로면 정말로 신이 아닌가?
혀를 내두르던 유리는 권터의 군림 따위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영감은 그런 거 못 해? 그래도 나름 명인이잖아? 검주랑 싸우면서 훔쳐 배우거나 그러지 않았어?”
“훔쳐 배운다고? 군림을?”
유리의 질문에 요한이 별 미친 소리를 들었다는 시선을 보냈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라이더가의 마체술 중 다른 거는 몰라도 흑혈과 군림은 오로지 라이더의 혈족만 사용할 수 있는 거다.”
“…다른 사람은 사용 못 한다고? 왜?”
“원래 그런 거다, 혈족 계승의 절기란 건. 타고난 핏줄만이 발현시킬 수 있는 특수한 마체술이지.”
“…진짜?”
“이 새끼가, 그럼 내가 고작 이딴 걸로 네놈한테 구라를 칠까!”
“…….”
눈을 끔뻑이는 유리.
그는 버럭 성질을 내는 요한을 보며 마지막 말을 삼켰다.
‘…될 거 같던데?’
그렇게 유리가 속에서 메아리치는 뒷말을 애써 억누르는 사이.
“응?”
갑자기 고개를 튼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가 봐라. 밖에 누가 널 찾아온 모양이니.”
“응? 누가?”
“내가 어제 했던 말… 잊지 말아라.”
그 말을 남긴 요한은 유령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어제 했던 말?’
요한의 마지막 말에서 대충 무언가를 눈치챈 유리.
그는 튕기듯 일어나 호다다닥- 마왕성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와 마주할 수 있었으니.
“따라와라. 흑룡고를 개방할 준비가 끝났으니.”
매번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지던 안경남 흑검병의 말투가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고대하던 소식에 유리의 두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