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36
235화. 해치지 않아요 (3)
유리와 안경남의 접선이 이뤄진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51기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모인 이들의 얼굴에는 고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거처를 찾는 과정에서 다퉈야 할 경쟁자가 적어서인지 작년 50기들보다는 상태가 나은 듯했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그 이야기 주제는 다양했다.
지난 20여 일간 자신이 겪은 고초.
자신이 자리 잡은 거처가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기.
추위와 배고픔에 대한 불만.
이번에 자신들이 모인 이유가 뭔지에 대한 추론 등등.
신규 기수들이 첫 번째 퀘스트를 맞이하면 으레 나오는 대화가 그들 사이에서 오갔다.
하지만 51기 사이에서 유달리 많이 거론되는 주제는 따로 있었으니.
“봤냐? 그 징그럽게 생긴 성?”
그건 바로 북쪽 숲의 마왕성이었다.
“당연히 봤지. 50기의 어떤 선배님한테 들은 건데, 거길 마왕성이라고 부르던데?”
“마왕성? 확실히 그렇게 생기기는 했던데… 왜 마왕성이래?”
“선배님이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 주시기는 했는데, 무슨 마왕과 사천왕이 산다던가?”
“뭐냐, 그게? 옛날이야기야?”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런데 아까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거기서 시체도 나왔다고 하더라.”
“시… 시체?”
“우리 동기 중에 거기 들어간 애들이 몇몇 있었나 봐 그런데…….”
“그런데?”
“전부 죽어서 나왔대.”
“저, 정말?”
“지금 안 보이는 애들 있지? 걔들이 전부 그 기괴한 성에서 죽었다고 하더라.”
“에,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진짜라고!”
마왕성과 그곳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던 무치.
‘조, 좋지 않아…….’
마왕성이 마왕성답게 악명을 쌓아 갈수록.
현재 마왕성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무치는 식은땀을 흘려 댈 수밖에 없었다.
딱히 자신이 지은 죄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죄지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안녕?”
무치의 옆구리에서 불쑥 나타난 누군가의 머리통.
“히익!”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림자.
뒷짐을 지고 살짝 허리를 숙여 고개를 내밀었던 리사는 경기를 일으키는 무치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너, 쫄보구나? 헤헤.”
살포시 지은 미소.
산뜻함이 묻어나는 리사의 아름다움에 주변 몇몇 남성들이 넋을 놓았다.
하지만 이미 크게 데인 적이 있던 무치는 반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리사를 경계했다.
“무… 무슨 일이야?”
“흐음?”
뒷짐을 지고 무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리사.
그사이 무치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얘를 따라다니는 이들은?’
마치 호위병처럼 리사를 따르던 이들이 분명 있을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 쪽을 흘낏거리며 주시하는 이들이 몇몇 발견되었다.
무치가 그렇게 주변에 자리한 리사의 호위들을 탐색하고 있을 때.
“있잖아.”
무치의 시야로 불쑥 끼어든 새하얀 얼굴.
잠시 나타났던 얼굴은 이내 밑으로 쑥 꺼졌다.
“켁!”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무치가 뒷걸음치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리사는 열심히 점프를 반복하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155㎝ 남짓의 리사와 2m가 넘는 무치.
리사가 무치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던 건 그녀가 제자리에서 열심히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폴짝폴짝.
“그분… 누구셔?”
레몬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리사가 던진 질문.
이에 무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분?”
무치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자 리사가 점프를 멈추고 답했다.
“나 봤어. 네가 그 마왕성에서 그분과 함께 있는 걸.”
“무… 무슨 소리야? 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걸?”
“이제 와서 모른 척을 하기에는 너, 너무 당당하게 마왕성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니?”
“…….”
“그리고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꽤 봤을걸?”
“그, 그래?”
“응.”
“하핳…….”
무치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그분… 누구셔?”
재차 이어진 질문에 무치는 뒷머리를 긁는 걸 멈추고 되물었다.
“그분이 누굴 말하는 거야?”
“그 50기 선배님인데, 검은 머리의…….”
“유리 혀… 아니, 유리 선배님?”
“유리? 아아… 그분 존함이 유리였구나. 유리… 유리 님이었어.”
리사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무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존함?’
살짝 이상함을 느꼈지만, 무치가 그걸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리사가 먼저 질문을 던져 왔다.
“너, 거기서 사는 거야?”
“거기?”
“마왕성 말야.”
“아, 응…….”
“흐음…….”
무치를 빤히 올려다보던 리사가 갑자기 조금 진중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너, 유리 님과는 무슨 관계인 거야?”
“그냥 아는 사이이기는 한데…….”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 요람에 들어오기 전부터?”
“응.”
“친한 사이인 거네?”
“그, 그렇지?”
요새 맨날 혼나고 있기는 하지만.
밥값도 제대로 못 하는 모지리라고 구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그래도 친하긴 친한 거겠지?’
무치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자 리사는 빤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작은 손을 무치를 향해 내밀었다.
“자, 악수!”
“…어?”
“저번 일은 미안!”
“어… 그…….”
“악수, 악수!”
쾌활한 목소리에 무치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리사는 그의 큼지막한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경쾌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우리 안 좋은 기억은 다 잊고 앞으로 잘 지내 보자!”
그러고는 이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무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닌가.
“…….”
그런 리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무치.
‘뭐, 뭐지?’
시작의 숲에서의 리사.
그리고 오늘 본 리사.
너무도 다른 리사의 분위기에 무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 이상한 애다.”
리사 덕분에 혼이 쏙 빠졌던 무치는 고개를 털며 정신을 되찾았다.
그로부터 잠시 뒤.
구그그긍-.
동물의 숲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개방되며.
“시작하라!”
51기의 가죽 모으기 퀘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해가 서서히 서쪽 땅끝으로 기울 무렵.
동물의 숲 정중앙.
거대한 나무 사이에는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해먹이 튼튼하게 걸려 있었으니.
그 속에는 두툼한 털 뭉치를 베고 누운 유리가 있다.
“흐흥~.”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까딱거리는 그는 눈을 감고 전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유리의 아우라에 안경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잘하는 짓인 건지…….’
가죽 모으기 퀘스트에서 호랑이 역할은 대대로 흑검병 조장들이 맡아 왔었다.
그중에서도 공인 6단급의 조장 중 가장 경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주로 도맡았던 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가죽 모으기 퀘스트에서 호랑이 역을 맡기로 했던 조장이 임무 중 부상을 입고 돌아온 것이다.
바로 당장 내일이 퀘스트인데 말이다.
‘큰일이군, 이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이 있으려나?’
안 그래도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흑검병단.
그중에서 현장 책임자인 조장급 이상의 인력은 더더욱 부족했고.
심지어 최근에는 외부에서 터진 일을 수습하느라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이 더 부족해지고 말았다.
하여 요람에서도 바로 호랑이 역을 대체할 인력을 사방으로 물색했지만, 불행히도 요람 내에 남은 공인 6단급 조장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건 공인 5단급의 조장들뿐이라 자격 미달이고.
또 이런 일에 7단 이상의 부장들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대책 마련으로 전전긍긍하던 그때 누군가가 한 가지 방안을 내놓았으니.
그게 바로 이번 무룡대전에서 성검을 사용한 유리와 권터였다.
하지만 권터의 경우 신분은 일개 기수이나 그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이런 자질구레한 퀘스트에 동원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은 대체재가 유리뿐.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리 홀랜드란 존재 자체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예상이 가는데… 멍청하게 당해 줄 수는 없지.’
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을 봐라.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지 않은가.
하여 안경남은 자신이 준비해 온 수단을 꺼내 들었다.
“유리 홀랜드, 네가 호랑이 역을 맡는다면 이는 흑검병을 대신해 퀘스트에 참여하는 게 된다. 일개 기수가 아니란 거지.”
“그런데요?”
“그러한 까닭으로 편법을 통해 부당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엄히 금한다.”
유리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 편법에 부당이득?”
“지인 및 여러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51기에게 돌아갈 가죽을 네가 손에 넣거나 이를 통해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단호한 안경남의 음성에 유리는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에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제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퀘스트가 끝나면 너는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의 계좌를 추적하고, 만약 위반 사항이 적발된다면 편취한 포인트는 전부 몰수할 거다.”
“호랑이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안경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가 정색하며 뒤돌아섰다.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한 재빠른 태세 전환.
‘부수입이 없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걸 해?’
안경남이 호랑이 역할을 제안했을 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일련의 과정이 좌르르 정리를 끝마친 상태였다.
1. 가죽 모으기에 참여하여 무치와 접선한다.
2. 무치를 몰래몰래 도와주면서 녀석이 빠르게 가죽을 모을 수 있게 한다.
3. 자신 역시 밤 사냥에 나서 51기들이 모은 가죽을 야금야금 갈취한다.
4. 낮에는 무치를 호랑이의 구역으로 데려와 쉬게 해 준다.
5. 퀘스트 막바지에 무치의 손에 당하는 척하면서 호랑이 가죽을 자연스럽게 넘겨준다.
6. 퀘스트가 끝나면 열심히 모아 둔 가죽을 무치에게 몰아줘서 단번에 많은 포인트를 손에 넣는다.
그 모든 계획이 정리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 남짓.
‘이건 기회다. 한 번 크게 땡길 수 있는 기회!’
무치의 실력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자신이 녀석을 야금야금 도와주면 어찌어찌 곰 가죽도 모을 수 있을지 몰랐다.
‘작년에 내가 번 포인트는 1,900만 포인트.’
거기다 1등 특전으로 2배 뻥튀기가 들어가 3,800만이었다.
당시 아린과 뽀삐의 몫을 떼어 주고 유리가 실질적으로 손에 넣은 포인트는 대략 3,200만 포인트.
유리가 작년 1년 동안 이런저런 퀘스트를 통해 참 많은 포인트를 벌었지만, 단번에 그 정도로 많은 포인트를 번 퀘스트는 없었다.
‘비록 이번엔 아린이랑 뽀삐가 없어서 조금 느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무치 녀석을 잘 굴리면 최소 2천… 아니, 2,500만까지도 가능하지.’
노다지도 이런 노다지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노다지판으로 들어가게 해 주면서 철저하게 주머니 검사를 하겠다는데.
유리 성격에 이를 승낙할 리 있겠는가.
조금 전 보인 흥미는 다 어디로 간 건지.
티끌만 한 아쉬움도 보이지 않고 유리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뜨려 했다.
뒤통수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턱-.
“보수는 천만 포인트.”
그리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유리의 발길을 붙잡기에는 충분했다.
직-.
그대로 우뚝 멈춰 선 유리.
하지만 그는 뒤돌아서지 않았다.
“…….”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서 있을 뿐.
이에 슬쩍 안경남의 미간이 좁아졌다.
“천오백.”
그가 단숨에 500만을 올려 불렀다.
그럼에도 유리는 여전히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경남이 더욱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얼마를 원하지?”
이에 유리는 간단히 답했다.
“삼천.”
“욕심이 과하군.”
“제재만 풀어 주면 전 그것보다 더 많이 벌 자신 있는데 말이죠. 싫으면 다른 사람 알아보시든가.”
이제는 아주 대놓고 협박을 하는 유리였다.
자신이 작정하고 나서면 퀘스트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어투에 안경남은 속으로 혀를 찼다.
‘큭… 눈치챘나 보군.’
약삭 빠르고 기회주의적인 녀석이 저리 고압적인 자세로 나온다는 건 분명 이쪽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는 거였다.
지금 요람에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기에 일개 기수인 자신에게까지 찾아와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건들거리는 뒤통수만 봐도 유리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안경남이 다시 액수를 올려 불렀다.
“2천만.”
하지만 이미 자신에게 판이 유리한 것을 알고 있는 유리가 거기서 멈출 리 있겠는가.
“제 요구 하나 들어 주는 조건으로다가 2,700만.”
“…….”
안경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에서 많은 갈등이 보였다.
과연 유리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안경남의 눈에 서린 갈등의 빛은 점차 줄어들고.
이내 결단이 서렸다.
‘어쩔 수 없군…….’
지금 아쉬운 쪽은 자신들이었다.
그가 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조건이 뭐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가 뒤돌아섰다.
“아이코, 제 조건은 별거 아닙니다. 뭐냐면 말이죠…….”
싱글벙글.
언제 냉랭하게 뒤돌아섰었냐는 듯 양손을 싹싹 비비며 친근한 미소를 머금고 다가오는 유리.
안경남은 진심으로 녀석의 얼굴을 한 대만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뒤.
유리가 내건 조건을 전부 들은 안경남.
“…알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유리의 조건을 승낙했다.
* * *
조용히 떠지는 유리의 두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서서히 몰려드는 어둠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작년에 호랑이 역을 맡은 그레타 위건이 설치해 놓았던 해먹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유리.
탁- 타닥-.
그가 가볍게 나무를 박차고 지면에 두 발을 내디뎠다.
유리는 미미하게 남은 노을빛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마침내 주홍빛 노을이 전부 사라지고 어둠이 숲을 뒤덮었다.
그와 함께 유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으니.
“밤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온전한 밤이 찾아들었다.
바야흐로 짐승들의 시간.
번뜩-.
어둠 속 또렷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곧 두 개의 호안(虎眼)이 금빛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고.
타닥-.
어둠을 주파하는 유리의 손에는 그가 베고 누웠던 호피 무늬의 가죽조끼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