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59
258화. 마의 9층 (5)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진짜 사기가 맞는 거 같다.
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왜 자꾸 난이도가 올라가는 건데!’
불만은 잔뜩 넘쳐나지만, 대놓고 항의하지도 못하는 이유.
그건 지금까지 코코가 자신을 맨손으로 상대해 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원래 무기 쓰는 사람한테 이제 와서 왜 무기 들었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순간에 이렇게 위압감이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코코의 주무기가 저 쌍절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는 지금까지 코코가 자신을 봐주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봐주고 있던 이에게 이제는 왜 안 봐주냐고 화를 내기도 뭐하지 않은가.
유리가 뒤로 멀찌감치 물러나 멀뚱히 서 있자, 코코가 다시 손을 까딱였다.
“안 들어올 거니?”
“음… 꼭 가야 할까요?”
솔직히 가기 싫다.
이번에 들어가면 좀… 아니, 상당히 아플 거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으니까.
반말을 섞어 말하던 유리의 말투가 대번에 공손해지자 코코는 피식거렸다.
“영광인 줄 알렴, 근 몇 년 동안 이걸 꺼내게 만든 상대는 네가 처음이니까.”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이 정도로 진심이 된 것도 오랜만이고.”
“…그러니까 굳이?”
강한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 건 기쁜 일임이 틀림없었다.
다만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다는 게 문제지만.
“하이씨…….”
길게 한숨을 내쉬는 유리를 보고 코코의 실눈에 이채가 스쳤다.
‘유리 홀랜드.’
지금까지 유리를 대하는 그녀의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요한 영감이 저 녀석에게 어떤 것을 가르쳤을지.
그리고 녀석에게 어떤 비밀이 있을지.
그것들을 파헤치기 위해 유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어린 녀석이 자신을 갉아먹은 게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양분 삼아 고작 이 짧은 시간 동안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라나 버렸다.
한순간일지라도 자신이 위협을 느낄 만큼.
‘끝날 뻔했어.’
조금 전 궐련을 단번에 태우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이 싸움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 순간 코코는 확실히 느꼈다.
유리 홀랜드란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를.
‘저건… 괴물이구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비상식적인 재능을 타고난 존재.
그래 마치…….
‘검주와 같은.’
이 세상에 둘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긴 괴물이 다름 아닌 요람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른 괴물이 만들어 놓은 보금자리를 제 둥지 삼아.
‘가만… 둥지?’
그 순간 코코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유리 홀랜드 너… 뻐꾸기 새끼였구나!’
남의 둥지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이가 주는 먹이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존재.
유리는 바로 요한 레드너가 요람에 낳아 둔 뻐꾸기 새끼였던 거다.
물론 그건 코코에게 크게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현재 그녀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인지.’
갇혀 있지는 않지만, 감금과 다름없는 요람의 생활.
단조롭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는 코코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 일상 속에 들어온 작은 괴물이 코코를 갉아먹었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욕구를 봉인한 사슬을 몇 개 끊어 냈다.
그 결과.
두근두근-.
단조로운 일상에 잠들었던 코코의 욕망을 자극하여 일깨우고 말았으니.
‘이 즐거운 걸… 벌써 끝낼 수는 없지!’
코코 로마니.
흑검병단 소속 5인의 부단장 중 1인이자.
현(現) 흑검병단에서 단장인 고든을 제외한 가장 오래된 고참 흑검병.
또한, 흑검병단 공식 서열 3위이며…….
‘조금 더 신나게 즐겨 보자꾸나!’
…전투에 미친 흑검병들조차 투견(鬪犬)이라 부르며 기피하는 여인.
바로 그 투견이, 단장인 고든조차 통제하기 힘든 사나운 개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물어뜯을 상대를 보고 침을 조금씩 흘려 댔다.
물론 그 상대가 유리인 것은 당연지사.
그나마 유리에게 다행인 점은 고든이 코코에게 채워 놓은 목줄이 아직 견고하게 메여 있다는 거였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는 코코가 눈깔이 완전히 돌지 않았다는 뜻이다.
스륵-.
살짝 입술을 할짝거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언제 올 거니?”
“고민 중입니다만?”
“조금 전에 주둥이 놀리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패기? 누가요? 제가요? 에이, 저만큼 소심한 놈이 어디 있다고?”
열심히 주둥이를 놀리면서 견적을 재 보기만 하는 유리의 태도에 코코가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이런 이런, 난 아까 그 패기에 반해서 선물을 줄까 했었는데?”
“…선물?”
“남은 50일 동안, 네가 날 즐겁게 해 주면… 내 개인적으로 좋은 선물 하나를 주마.”
이에 유리가 뚱한 얼굴로 답했다.
“정말 좋은 선물 맞습니까요?”
“우리 서로에게 믿음을 가져 보지 않으련?”
“믿음을 갖기에는 제가 이미 뒤통수를 너무 많이 처맞아서.”
“싫으면 말고.”
그 말에 유리가 냉큼 말을 바꿨다.
“싫다고는 안 했습니다만?”
어차피 싫든 좋든, 언제까지 이렇게 뻗댈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코코와 맞부딪혀야 할 터.
그런데 알아서 선물을 준다고 하니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유리로서는 오히려 좋았다.
“뭐, 그럼 제발 좋은 선물이기를 기대하며…….”
의욕이 생긴 그가 코코를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푸른 뇌전.
그사이 코코는 궐련에 불을 붙였다.
치익-.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을까.
파칙-!
한 줄기 굵은 뇌전이 위로 솟구치며 유리를 집어삼켰다.
이를 본 코코의 미소가 짙어졌다.
‘날 갉아먹으려는 거니?’
처음에는 그런 유리가 발칙하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얼마나 귀여운 녀석이란 말인가.
‘얼마든지 내주마!’
대신 양껏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날 즐겁게 해 주렴!’
아까보다 더!
지금까지보다 더더욱!
활짝 웃은 코코가 유리를 마주해 달려들었다.
그로부터 잠시 뒤.
빠악-!
박 터지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고.
곧이어 9층이 떠나가라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뜨아아악!”
* * *
백일탑 퀘스트 65일 차.
“아우…….”
벌에 쏘인 듯 퉁퉁 붓고, 이마에는 커다란 혹을 달고 있는 존재가 얼굴에 하얀 연고를 덕지덕지 처발랐다.
골족의 최상급 외상 회복약이란 이름에 걸맞게 몇 분 만에 부기와 혹이 가라앉는 효과를 보여 준 연고.
그 결과 되찾은 원래의 얼굴은 우리가 익히 아는 유리였다.
“아쓰스…….”
그는 터져 버린 입안에까지 연고를 바른 뒤, 속옷만을 남겨 둔 채 옷을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근육질의 몸.
다만 전신에 수없이 들어찬 울긋불긋한 피멍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머금게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연고를 바르고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아고, 삭신이야.”
이 지긋지긋한 탑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날로부터 무려 15일이 흘렀다.
그리고 유리는 투견의 욕망을 깨운 대가로 매일같이 지금과 같은 꼴로 하루를 마무리해야만 했다.
만약 탑으로 출장 오는 간이 상점에서 회복약을 구매할 수 없었다면.
그리고 일전에 먹은 힘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유리는 하루가 아닌, 몇 주를 꼼짝없이 요양만 했을 것이다.
그는 아릿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사정없이 두들겨 패네.’
맨손의 코코도 강했지만, 쌍절곤을 든 그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기회를 노려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
유리는 발광석이 박힌 천장을 바라보며 조금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큰일이네…….”
회심의 한 수였던 위:영역은 먹혀들지 않고.
코코는 무언가 발작 버튼이 눌린 것인지 두 눈에 옅은 광기를 띤 채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은 35일.
그 안에 어떻게 해서든 수를 만들어 코코에게 한 방 먹여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거기다 유리를 더욱 암담하게 만드는 일이 최근 벌어졌다.
스륵-.
슬쩍 상체를 일으켜 세운 유리.
그가 정좌하며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의 육신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퍼져 나오며 기하학적인 선을 그려 냈으니.
바로 광혈이었다.
스스스-.
그렇게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광혈 상태에서 내부를 관조하던 유리가 번쩍 눈을 뜬 순간.
그에게서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안 되네.”
지금까지 유리가 누린 광혈의 효과는 크게 3가지였다.
소모된 정신력과 체력, 그리고 마나를 일시적으로 회복시켜 주는 것.
그중 마나는 비록 회복되는 양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숨겨 둔 비수와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광혈을 펼쳐도 마나가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대체 왜?’
처음에는 탑에 들어와 광혈을 남발하여 생긴 부작용이라 여겼다.
그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어 며칠 동안 광혈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마나 회복의 효과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혹시 조금 더 기다리면 정상화되려나?’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보면 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 유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못 쓸 패라면 더는 연연하지 말자.’
지금까지 코코와의 싸움에서 유용하게 쓰이던 패였지만, 이제는 못 쓰니 미련을 버려야 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쓸 수 있는 패로 승리할 수 있는 조합을 만들어야 할 터.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유리.
그는 곧 눈을 반개하여 코코와의 싸움을 무한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리깔린 유리의 황금색 눈동자.
이는 탑에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더 심유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 * *
백일탑 퀘스트 69일 차.
차라랑-!
쇠사슬이 마찰하는 소리.
후훙-.
그리고 쌍절곤이 공기를 뭉개며 다가오는 소리에 유리는 뒷골이 섬뜩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몸을 뒤로 젖혔다.
‘ㄱ’자가 된 유리의 얼굴 앞으로 코코의 왼손이 빠르게 지나쳤고.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쌍절곤이 원반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훙-!
위기에서 벗어난 유리는 곧장 사선으로 코코를 올려 베었다.
하지만.
카강-!
어느새 나타난 코코의 쌍절곤이 유리의 검을 후려쳐 버리는 게 아닌가.
그 반발력을 이용해 튕겨진 검을 그대로 꺾어 코코의 상체를 노린 유리.
하지만 귀신같이 나타난 쌍절곤이 회전하며 원형의 방패처럼 검을 막아 냈다.
그렇게 할 일을 마친 쌍절곤이 빙그르르 회전하여, 코코의 오른팔을 타고 어깨와 목을 지나 왼손에 쥐어졌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본 유리는 혀를 내둘렀다.
‘쌍절곤, 시발… 존나 까다롭네!’
코코의 쌍절곤은 그야말로 변화무쌍의 극치였다.
어떨 때는 2개의 단봉으로 휘둘러지고.
어떨 때는 1개의 중단봉이 되기도 하며.
갑자기 쇠사슬 길이만큼 쭉 늘어나지를 않나.
회전하기도, 직선으로 날아들기도, 무기를 휘감기도 했다.
정말이지 예측 불허의 기괴한 움직임.
유리는 그런 코코의 쌍절곤에 겨우겨우 반응하고 있었다.
물론 전부 다 반응하는 건 아니었다.
퍽-.
쌍절곤이 왼쪽 허벅지를 가격했다.
“큭!”
유리는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렇게 쌍절곤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유리는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렇게 쌍절곤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는 맞을 것을 예측했기에 최대한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순히 신음을 흘리는 게 아닌 뼈가 부러져 나갔을 터.
그리고 그런 유리를 보고 코코도 속으로 감탄했다.
‘얘, 진짜 뭐니?’
물론 지금 코코가 전력을 다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유리와 자신은 아예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그녀의 쌍절곤은 일개 공인 6단급이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나마 유리처럼 반응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최소 영역을 연 공인 7단급은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그 점이 바로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었다.
‘얘, 영역 아직 못 열었을 텐데?’
영역조차 열지 못한 녀석이 영역을 연 것처럼 움직인다?
세상에, 진짜 대체 뭐 하는 괴물 새끼란 말인가.
‘이게 진짜 대체 무슨 원리인 거지?’
50일 차.
유리가 저것을 처음 보여 준 순간부터 지금까지 코코는 녀석을 열심히 관찰해 왔다.
하지만 도저히 유리가 펼치는 저 신들린 움직임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간단한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다만 진짜 영역은 아닌 듯싶어 ‘가짜 영역’이라 임시로 부르고는 있었지만.
‘저건 단순히 가짜 영역이라고 부를 게 아니야.’
가짜이되 가짜는 아니다.
저건 어쩌면 새로운 경지일지도 몰랐다.
‘상쇄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영역이라…….’
상쇄.
이는 절대 감각 영역끼리의 충돌로 인한 소멸을 칭하는 말이었다.
2개 이상의 영역이 겹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
그로 인해 공인 7단 이상의 싸움에서는 얼마나 농밀한 영역을 지녀, 상대의 감각 영역을 얼마나 빠르게 상쇄하냐가 승패를 가르게 된다.
그것이 현시점 고단수들이 대결하는 기본 상식이었다.
그런데…….
‘유리 이 아이가 지금 이 상태에서 감각의 영역을 터득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현재 저 가짜 영역을 통해 마치 영역을 연 것처럼 움직이고 있는 유리였다.
그런 와중에 녀석이 진짜 영역을 열게 된다면?
그로 인해 상대의 영역을 상쇄할 수 있게 된다면?
‘…아?!’
그 미래를 상상한 코코는 소름이 돋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