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63
262화. 보상 (3)
유리가 흘리는 서늘한 살기에 흠칫한 무치가 눈치를 보며 스리슬쩍 입을 열었다.
“그… 장례식도 안 치렀다니깐요?”
애초에 장례식을 안 했는데 조의금이 걷히겠는가.
하지만 이미 ‘조의금’이란 단어 자체에 꽂혀 버린 유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여간, 이래서 잘해 줘 봤자 아무 소용 없다니까. 친구가 죽었다는데 조문 오는 새끼가 어떻게 하나도 없냐!”
유리는 연신 작게 구시렁댔다.
잘 들어 보면 그 꽁알거림의 대부분이 50기에 대한 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접시를 노리고 다가오는 아린의 손을 젓가락으로 탁탁 쳐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손을 부여잡고 한 입만 달라고 칭얼거리는 아린.
물론 유리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꺼져, 이거는 절대 안 돼.”
무려 4개월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다.
이걸 빼앗길 유리가 아니었다.
잽싸게 음식물을 입에 욱여넣기 시작한 그를 구경하던 테레시아가 아까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래서… 너, 진짜 뭐 하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퀘스트 끝난 지 한참 됐잖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이들도 유리만을 바라보았다.
테레시아의 질문은 그들도 모두 궁금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저 녀석은 이제껏 무얼 하다가 한 달 만에 나타났단 말인가.
자신에게 쏠린 강한 의혹 어린 시선에 유리는 씹던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별거 아니란 투로 답했다.
“아, 그거? 원래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네.”
“…어쩌다 보니?”
“응.”
“그게 한 달 동안 잠적해서 걱정시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듣는 사람으로선 어이가 없는 답이었지만, 유리가 한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코끝을 긁적였다.
‘나도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걸?’
애초에 자신이라고 그 빌어먹을 탑에 오래 있고 싶었겠는가.
유리도 한시라도 빨리 영역을 체화하고 상쇄까지 완벽하게 익혀 탑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또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유리의 크나큰 오판이었으니.
‘…제대로 감 잡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지.’
영역을 다루는 건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연습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자신이 코코의 궐련을 잘라 낸 게 초심자의 행운이었음을 유리 스스로 인정했을 정도였으니…….
그 어려움과 까다로움은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다만 유리가 영역을 숙달해 나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코코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너… 왜 이렇게 잘하니?]유리 입장에서는 제대로 감도 못 잡고 허덕거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진도가 영 지지부진했었다.
그러나 코코가 보기에 유리가 영역에 적응해 나가는 속도는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느리긴 뭐가 느려! 영역을 열고도 적응하는 데에만 몇 년씩 걸리는 애들이 태반인데!]새롭게 열린 초월적인 감각.
그건 지금껏 일반적인 감각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는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하여 적응 기간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하긴, 애초에 그 가짜 영역을 다루던 너니 적응이야 금방 하겠지만…….]하지만 유리에게는 그런 적응 기간 따위가 없었다.
그는 영역을 열자마자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양, 바로 또 하나의 감각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물론 새로운 감각의 적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도 있을 터.
그처럼 단번에 영역을 통한 감각에 적응한 이도 있을 것이다.
다만 코코가 진심으로 경악한 점은 유리가 영역을 ‘움직이고’ 있다는 거였다.
[뭐? 이게 뭐가 어려운 일이냐고? 하아…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들으렴. 영역을 다루는 과정은 보통 개화, 고정, 담농의 3단계로 나뉜단다.]영역을 갓 개화한 단계.
이때에는 영역을 자의적으로 펼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고.
다음 단계에서는 이를 일정 범위에 고정시켜 일종의 ‘영역장’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역장에 농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담농이었다.
[영역끼리의 충돌에서 상쇄는 피할 수 없이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란다. 그러나 상쇄가 일어나는 속도는 조절할 수 있지.]두 영역이 충돌했을 때, 농도가 옅은 영역이 더 빨리 사라지고, 짙은 농도의 영역이 나중에 사라진다.
그 차이가 비록 1초 남짓한 시간일지라도, 공인 7단 이상의 고단수들에게는 상대의 목을 베어 내고도 남을 시간이리라.
다시 말해 ‘담농’이란 그 차이를 이용해 함정을 파는 일이었다.
어디는 농도가 옅고.
어디는 농도가 짙고.
그 크기와 형태 등.
상쇄의 시간 차를 이용한 자신만의 싸움터를 구성하는 작업.
그게 공인 7단 이상의 고단수들이 상쇄를 일으켜 싸우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그 정도 경지까지 도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거였다.
보통 담농의 경지에 이르는 데에만 짧게는 몇 년.
그리고 담농에 적응하는 데까지 또 십수 년이 걸린다.
그런데 저 유리 홀랜드란 녀석은 너무도 기괴했다.
[영역장도 고정 못 시킨 녀석이 영역을 움직여 농도 차를 만들어 내는 건… 어려운 게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엊그제 겨우 개화를 한 녀석이 벌써부터 담농의 경지에 들 기미가 보이니 코코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코코의 입장이고.
‘영역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류를 다루는 게 더 어려운데?’
마류로 펼친 위:영역을 다뤄 왔던 유리로서는 영역을 움직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의로 영역을 개방하고 이를 고정된 영역장으로 만드는 것이 더 어려웠지.
그렇게 지난 6월, 한 달여간 있었던 일을 짧게 회상한 유리.
그는 자신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건 사실이니까.”
설명을 회피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좌중도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대신 아린이 살짝 눈을 빛내며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지옥 난이도는 어땠어? 얼마나 어려웠어? 응?”
지옥 난이도.
과연 얼마나 어려웠기에 유리가 그곳에 그리 오래 묶여 있었단 말인가.
다른 이들도 이를 궁금해했기에 유리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이에 그는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어려움 난이도는 어땠는데?”
“어? 우리가 어려운 난이도 들어간 거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가장 먼저 탑에 들어갔잖아?”
“니들이야 뻔하지 뭐, 그래서 어려움 난이도는 어땠는데?”
“움, 우리는…….”
유리의 질문에 아린은 짤막하게 자신들이 겪은 어려움 난이도를 설명해 주었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할지 모를 퀘스트였기에 테레시아와 무치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특수한 함정이 설치된 1층 미로.
각층마다 배치된 한계를 시험하는 과제들.
그리고 마지막 9층에서는 4명씩 짝을 이뤄 흑쇄진을 익히고 공인 5단급 흑검병 조장을 상대하는 시험이라고 했었다.
이를 들은 유리는 씰룩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꼴랑?”
“…….”
“꼴랑 그거? 이야, 니들 이번 퀘스트 아주 거저먹었네?”
그 얄미운 이죽거림에 군터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를 본 유리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지옥 탈출 무용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잘 들어, 이 몸은 말야…….”
* * *
고든은 집무실의 중앙에 열중쉬어 자세로 선 코코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럴 리가요. 후후.”
부정하는 말과 달리 그녀의 입꼬리는 기분을 대변하듯 연신 씰룩거렸다.
이에 고든에게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지?”
“이미 알고 계시면서 뭘 물으시는 건지?”
“…얼굴이 반들반들한 걸 보니 잘 놀다 온 모양이로구나.”
고든의 말마따나 코코의 얼굴빛은 너무도 환했다.
쌓여 있던 짜증과 욕구가 말끔하게 해소된 듯 상쾌한 낯빛.
이를 고든이 한참이나 말없이 노려보자 코코는 슬쩍 딴청을 피우며 물었다.
“할 말 끝나셨으면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아직 안 끝났다.”
“칫.”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는 코코.
단장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상당히 예의가 없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고든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다만 그도 코코의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올해, 죄의 미궁을 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죄의 미궁’이란 말에 코코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걸… 열라고 하신 겁니까? 그분께서?”
“그래.”
“대상은요?”
“요람의 전 기수.”
“검주께서 도련님을 아주 혹독하게 키우시려나 봅니다? 그게 아니면 다른 녀석 때문인가?”
코코의 눈에 언뜻 즐거움이 스쳤다.
이를 본 고든은 싸늘한 눈빛을 보였다.
“그분의 의중을 어쭙잖게 잣대질하려 들지 마라.”
“네.”
“알았으면 죄의 미궁을 열 준비를 하거라.”
“예… 엣?!”
건성으로 고든의 명령에 답하려던 코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걸 왜 제가 준비하나요! 죄의 미궁이라면 듀란 녀석이 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그 듀란이 지금 없으니까.”
“…….”
그제야 코코는 듀란이 엘릭서를 구하러 밖에 나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살짝살짝 수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다른 애들 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다른 한가한 애들!”
“이 요람에서 가장 한가한 게 바로 너다.”
“…….”
“부단장 중에 한 달씩이나 농땡이를 칠 정도로 한가한 녀석이 너 빼고 또 누가 있을까.”
“…….”
“알아들었으면 더는 토 달지 말고 차질 없이 준비해라.”
지금껏 상쾌했던 코코의 얼굴에 슬쩍 짜증이 차오르는 것을 본 고든은 뒷말을 덧붙였다.
“듀란이 일찍 오면 교대해 줄 테니 그만 입 삐죽거리고 열심히 준비나 하거라.”
“…그 멍청이가 언제 돌아올지 알고.”
“대답.”
“…네.”
“나가 봐라.”
고든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코코는 가볍게 경례하고 뒤돌아섰다.
그렇게 막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코코를 고든이 불러 세웠다.
“팔은 왜 그 모양이냐?”
“아, 이거요?”
고든의 시선을 느낀 코코는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팔을 슬쩍 들어 보이며 웃었다.
“고양이 새끼… 아니, 뻐꾸기 새끼가 제법 앙칼지더라고요. 발톱도 꽤 날카롭고.”
그 말을 남긴 코코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곧장 집무실을 떠나갔다.
한편, 그녀가 사라진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고든은 흥미롭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코코 로마니에게 상처를 남겼다라…….”
* * *
유리의 지옥 탈출 무용담이 거의 막판에 다다랐을 즘.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들이 결국 참지 못하고 차례대로 끼어들고 말았다.
그 시작은 테레시아였다.
“…그러니까, 기관 돌파 퀘스트의 7성급보다 어려운 함정이 깔린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폭탄까지 터졌다고?”
다음은 무치였고.
“그, 그러고 나서 4층에서는 흑검병 셋과 싸웠단 말입니까? 그것도 흑쇄진을 사용하는?”
그다음은 군터였으며.
“한 층마다 흑검병이 한 명씩 추가됐고, 6층에서는 아예 조장급에 일반 흑검병 둘이 나왔다?”
이어진 건 아린의 목소리였다.
“8층에서는 6단급 조장에 흑검병 넷이라고? 그런데 그걸 하루 만에 다 통과해서 9층에 올랐다고? 정말?”
그리고 마지막은 뽀삐.
“배고프다?”
물론 그걸 통역한 건 아린이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층에서는 코코 님이 나왔냐고 하는데?”
“그것도 그렇군.”
“그러게, 갑자기 9층에서 매점 아주머니가 왜?”
아린을 비롯해 테레시아 등도 코코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1년 차의 할인 판매 상점을 지키는 일개 흑검병으로 알고 있었을 뿐.
하여 곧 이어진 유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코코 씨 부단장이래.”
“……?!”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코코의 정체.
특히 3년 차가 되어서야 코코의 정체를 알게 된 테레시아가 가장 크게 놀라고 말았다.
“부, 부단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대체 왜 상점 따위를?!”
“몰라, 성질 더러운 할망구니까 사고라도 쳤나 보지.”
유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테레시아가 무언가를 깨닫고 다급히 물었다.
“그럼… 너 어떻게 탑에서 나온 거야? 9층에서 코코… 아니, 부단장이 있었으면 거길 무슨 수로 통과한 거야?”
그녀의 질문에 다른 이들도 모두 유리만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말처럼 코코가 정말로 부단장이라면 그녀는 공인 9단급의 절대 강자라는 뜻.
그런 존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곳을 대체 무슨 수로 통과한단 말인가.
그런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유리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에이, 당연히 그 무식하게 쎈 아줌마를 어떻게 이기냐?”
“그럼?”
“그냥 옷깃이라도 스치면 보내 준다기에, 깔끔하게 한칼 먹이고 빠져나왔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좌중은 그저 고요히 유리만을 바라볼 뿐.
한참 동안 이어지던 적막 끝에 모두의 심정을 대표해 군터가 입을 열었다.
“구라 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