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7
26화. 삼절 (5)
6개월 전, 유리가 처음으로 패배의 아픔을 깨달은 날.
솨아아아-.
시원한 빗소리가 동굴 안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요한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깔렸다.
유리에게 질 수밖에 없는 대련을 시킨 이유.
패배의 비참함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절실함 등.
유리는 요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또한, 그가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즈음.
스륵-.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신 지고 싶지 않다고 했더냐?”
유리가 혼자 중얼거렸던 작은 다짐.
이를 질문으로 던진 요한이 자신의 검을 집어 들고 걸어 나갔다.
저벅저벅-.
내리는 빗줄기가 요한의 머리와 어깨를 적시고.
후드득-.
비를 맞으며 젖은 땅 위에 선 요한이 유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도 그랬다.”
25년 전, 요한의 나이 마흔.
같은 나이의 검주는 세상을 제패했다.
검주가 했다면 자신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요한은 검주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검주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다고 여겨지던 천재의 도전.
공인된 일인자와 이인자의 맞대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검좌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설레발을 치는 호사가까지 나타났다.
엄청난 관심 속에 벌어진 세기의 대결.
그 결과는… 도전자의 무참한 패배였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던 이의 패퇴는 잠시 잊고 있던 검주의 존재감을 재확인시켰다.
그가 어째서 검주라 불리는지.
또한, 검주가 어떻게 세상을 거머쥐었는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릿해졌던 검주의 존재감이 그 대결로 인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검주의 존재감에 시달린 건 요한이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해 본 적이 있더냐? 평생을 매달려 기어올라도 정상은 다다를 기미조차 안 보이고… 자칫 발이라도 헛디뎠다가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질… 그런 절벽.”
첫 패배의 절망에 빠진 요한에게는 검주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비참함, 무기력함,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안겨 준 검주.
그날의 패배 이후 요한은 거대한 벽이 되어 버린 마음속 검주를 넘어서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마음이 꺾이지 않기 위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기 위해 홀로 분투했다.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심상의 검주를 꺾어 낸 요한은 다짐했다.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절대,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뼈에 새겼지.”
이후 그는 지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자신이 가진 무기를 더욱 갈고닦아 검주와 싸울 준비를 했다.
그렇게 10년.
준비를 마친 요한은 또 한 번 검주를 향해 검을 겨눴다.
이에 검주는 웃었다.
[재밌군. 나와 검을 맞대고 살아남은 건 네놈이 처음이었지만, 마음이 꺾이지 않은 것도 네놈뿐이구나.]검주는 너무도 즐겁게 요한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성사된 두 번째 대결에서 요한은 모든 것을 불태웠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은 것이다.
그 결과…….
“또 져 버렸지. 지랄 맞을 정도로 비참하게. 푸흐흐.”
10년의 노력과 다짐이 무색하리만치 패배는 너무도 허망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쏟아 낸 탓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요한.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대로 검주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최후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검주는 요한의 목숨 대신 다른 것을 가져가 버렸다.
서걱-.
요한의 오른쪽 무릎 밑에서 피가 솟구치고.
[과연 이번에도 마음이 꺾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그날, 요한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던 다리 한쪽을 잃었다.
[만일 네놈이 그 꼴로도 지금보다 더 빠르게 달릴 자신이 생긴다면… 다시 날 찾아오거라. 이건 그때 돌려주마. 흐하하.]검주는 잘라 낸 요한의 다리를 챙겨 들고 웃으며 떠나갔다.
실로 굴욕적인 패배.
거기에 다리까지 잃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요한은 이전처럼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음에도 난 검주에게 닿지 못했다. 웃기게도 그게 되레 내게 길을 제시해 줬지.”
요한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리 갈고닦아도 절대 검주를 넘어설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찾아 헤맸다.
검주를 이길 방법을.
“그 괴물이 추구하는 건 극강과 극쾌에 기반을 둔 파괴다. 검주보다 힘이 강하거나, 혹은 빠르거나… 둘 중 하나쯤은 넘어선 이가 있을지는 모르나… 그 두 가지를 모두 넘어선 존재는 단언컨대 없다.”
극강(極强)과 극쾌(極快).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자신과 같은 꼴이 날 테고, 두 가지 모두 검주를 넘어서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 괴물을 잡을 수 있을 거 같으냐?”
스릉-.
요한이 검이 뽑아 조용히 앞으로 내밀었다.
트득 트득-.
은빛 검신에 맞고 튕겨 나가는 맑은 물방울을 바라보며 그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검주의 화신은 붉은 화염을 품은 레드 드래곤이지.”
라이먼트 대륙의 전설에서 레드 드래곤은 힘과 파괴를 상징하는 괴물이었다.
참으로 검주다운 화신이라고나 할까?
“전설에 의하면 레드 드래곤의 불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한다. 너무 강하고 빨라 막을 수도, 꺼뜨릴 수도 없다는 그 불을 어찌 상대할 수 있을까?”
조금 전부터 요한은 계속해서 유리에게 검주를 상대할 방법을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유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풀었던 문제를 되풀이하여 재검토하는 것뿐.
“내가 떠올린 해답은 간단했다. 바로…….”
살짝 말끝을 흐린 순간, 요한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슥-.
서서히, 마치 춤을 추듯 빗줄기 사이를 노니는 검.
예기를 발하던 검은 어느 순간 그 형체가 사라지고.
사륵-.
요한의 주변으로 은빛 궤적만이 남았다.
* * *
요한의 검이 그러했듯, 유리의 검 역시 빗속을 노닐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검의 형체가 사라졌다.
대신 넘실넘실 유리의 주변에 생겨나는 은색의 선.
그건 너무도 잔잔하고 아름다워, 누군가 허공에 은색의 실로 그림을 그려 낸 게 아닐까 싶었다.
콰가가가-.
붉은 궤적을 그리며 살벌하게 떨어져 내리는 무치의 공격과 유리의 주변을 장악한 환상 같은 은빛 그림.
둘은 너무도 대비되었기에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치의 붉은 창이 유리의 머리 위에 다다른 순간.
사르륵-.
유리의 주변으로 내리던 빗방울이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것도 잠시, 멈췄던 빗줄기가 천리를 거슬러 역행했다.
솨아아-.
지면에서 하늘로, 빗줄기가 거꾸로 올라가는 기현상이 유리의 주변에서 발생했다.
그와 함께 무치의 붉은 창이 은빛 궤적에 닿았고.
[내가 떠올린 해답은 간단했다. 바로…….]유리는 그날, 요한이 알려 준 ‘괴물의 불’을 상대하는 법을 따라 읊었다.
[괴물의 불을 되돌려 주는 거지.]“괴물의 불을 되돌려 주는 거지.”
그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무치의 창과 닿은 은빛 궤적이 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내리찍는 창날을 상단 막기로 저지한 유리.
푸항!
둘 사이에서 강한 바람이 터져 나왔고, 유리를 중심으로 흙바닥에 동심원 물결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커다란 폭음, 마나의 충돌로 발생할 충격파 등.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무치의 공격을 받아 낸 유리는 너무도 편안해 보였다.
1초 뒤, 유리의 검이 서서히 무치의 창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치의 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드릉- 드릉-.
유리의 검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무치의 창이 묘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드릉- 드릉-.
“어?!”
마치 뱀처럼 꿀렁이는 창에 무치는 당황했다.
그러나 무치에게는 불행하게도 그게 시작이었다.
드드드드-.
꿀렁임은 더욱 심해졌고, 종내에는 거친 진동으로 변했다.
“으, 으아아?!”
10여 년간 창을 잡으며 단련한 굳은살과 악력으로도 버티지 못할 만큼 거세진 진동.
이를 보며 유리가 웃으며 말했다.
“팔 부러지기 싫으면 놓는 게 좋을걸?”
드드드-.
거세지는 진동에 무치는 유리의 말이 단순한 경고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건… 놓아야 해!’
본능이 알아차린 거다.
이대로 잡고 있다가는 단순히 팔만 부러지고 말 정도가 아니란 것을.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무치가 창을 놓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은 실로 훌륭한 판단이었다.
지이이잉-.
무치가 손을 놓았음에도 창은 붉은 기운을 머금고 허공에서 미친 듯이 떨어 댔다.
그러다 마침내 창이 머금고 있던 붉은 기운이 역으로 폭사됐다.
콰아앙-.
정확히 무치가 서 있던 방향으로 날아간 붉은 기운은 직선거리에 놓여 있던 숲을 휩쓸었다.
우직- 우지끈.
그렇게 무려 12그루의 거목을 작살내고서야 붉은 기운이 흩어졌다.
* * *
랄프와 요한의 시선은 붉은 기운이 휩쓸고 지나간 현장에서 떨어질 줄 몰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 랄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유리가 보여 준 것은 숱한 경험을 가진 그조차 처음 보는 거였기 때문이다.
‘날아간 붉은 기운은 분명 냉벽 쪼개기의 마나인데… 그걸 되받아친 저 기술은 뭐지? 흘리기?’
마체술의 여러 기술 중에 상대방의 힘을 흘려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어 기술이 있었다.
처음에는 유리가 보여 준 게 그런 흘리기의 일종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냉벽 쪼개기는 흘릴 수 없다.’
아무리 무치가 사용해 위력이 크게 줄었다고 해도 냉벽 쪼개기는 손쉽게 흘려 보낼 수 있는 성질의 기술이 아니었다.
냉벽 쪼개기를 흘려 보려다 압사당한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피하거나 더 강한 힘으로 되받아치거나.
냉벽 쪼개기를 상대하는 방법은 그 두 가지뿐이었다.
애초에 랄프는 유리가 뇌익을 이용해 힘으로 되받아칠 거라 예상했다.
그게 랄프가 꼼수까지 쓰며 의도한 바였으니까.
그런데 웬걸?
유리는 검을 들어 냉벽 쪼개기를 막았다.
백번 양보해 유리가 냉벽 쪼개기를 흘렸다고 해도, 그 자세에서 흘린 힘의 방향은 지면을 향해야 했다.
한데, 냉벽 쪼개기의 힘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분명 냉벽 쪼개기의 힘을 중간에 틀었다.’
아무런 준비 자세도 없이, 냉벽 쪼개기의 힘을 받아친 거다.
방향까지 자유자재로 바꿔 가며.
‘그건 마치… 상대의 힘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해 되돌려 준 것 같지 않은가?’
도무지 자신의 상식선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자 결국 랄프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 괴상한 기술을 만들어 낸 존재에게.
“저건… 대체 뭐요?”
랄프의 질문에 요한은 살짝 허탈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삼절(三絶)…….”
레드너 가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건 뇌익을 창시한 5대 가주였다.
그 뒤로 쭉 레드너 가문에는 운보와 뇌익, 두 가지의 절기만이 존재했다.
다른 명문가에 수십 개씩 존재한다는 검술, 권술 등의 무기술은 구태여 만들지도, 수집하지도 않았다.
이 두 절기를 응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만으로도 레드너가는 최강의 가문이라 칭송받았다.
그렇게 5대 가주 이후 수백 년.
레드너 가문이 배출한 불세출의 천재에 의해 또 하나의 절기가 탄생했으니.
괴물의 불을 상대하겠다는 집념으로 만들어진 세 번째 절기.
세상 모든 흐름을 다스릴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미완성의 기술에 요한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마류(魔流).”
마(魔)의 흐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