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70
269화. 폭탄 돌리기 (4)
유리는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
양팔을 쭉쭉 위로 당기는 그의 얼굴에는 개운함이 가득했다.
“아, 이제야 좀 운동한 거 같네.”
기숙사 한 동과 수많은 48기를 걸레짝으로 만들었건만, 이조차 유리에게는 고작 수련의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법 만족스러운 성과가 있었기에 그는 상당히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4년 차부터는 달라.’
요람과 시간이 거르고 걸러 만들어 놓은 정예들이어서일까.
그들이 쓰는 마체술은 꽤 상급의 마체술이었으며, 그 이해도와 깊이 또한 하위 연차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권터가 없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남아 있는 48기만으로도 유리는 제법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괴츠.
그는 일반적인 기수와는 확연히 달랐다.
‘변태이기는 해도 실력은 알짜야.’
최근 들어 변태끼도 싹 빠진 거 같고, 진지하게 수련을 해서일까?
무룡대전 때보다 실력이 확연히 늘어난 게 보였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환영검은 유리조차 쉽사리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고차원의 것.
‘이거 진짜… 괜찮은데?’
처음에는 클라리스의 투정에서 비롯됐지만, 하면 할수록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리는 벌써부터 다음이 기대되었다.
‘4년 차가 이 정도니… 5년 차는 더 쓸 만하겠지?’
원래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한 기수씩 공략하려 했건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에 전부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럼, 다음은 이쪽인가?”
눈을 빛낸 유리가 신난 발걸음으로 폴짝폴짝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몇 시간 뒤.
쿠그긍-!
5년 차 거주 구역이 자리한 북도(北島)의 남쪽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
펜촉이 거친 종이를 긁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고즈넉이 울렸다.
사각사각-.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규칙적인 소리.
하지만 펜을 놀리는 이는 전혀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살짝 핏발이 선 눈동자.
까칠해 보이는 피부.
대충 보아도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그리 피곤해 보이는지는 책상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사락-.
높은 서류의 탑에 또다시 추가되는 한 장의 종이.
그제야 그녀는 펜대를 놓고 짧게 기지개를 켰다.
우득- 우드득-.
장시간 굳어 있던 근육과 뼈를 풀어 주는 이는 다름 아닌 듀란 비코비치의 부관이었다.
본명은 엠마 그린.
그리고 듀란 휘하의 부하들에게 ‘엄마’라 불리는 존재.
그녀는 현재 장기 출장 중인 듀란을 대신해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부단장 대리인’이었다.
엠마는 굳은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하게 검을 휘둘러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부단장의 업무 대리인이 되고 근 몇 달간, 검보다 펜을 더 많이 잡아 왔었다.
물론 그전에도 부단장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수없이 많은 업무를 처리해 오긴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듀란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원래도 일이 많은 엠마인데, 거기에 듀란의 업무까지 얹어지니 앓는 소리를 내는 것도 당연지사.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벌써 부단장의 공백이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엠마도 알고 있었다.
엘릭서를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 만큼 듀란이 금방 돌아오지는 못하리란 것을.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부단장이 오기 전까지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집어 들 때쯤.
쿵쿵-.
강하게 문 두들기는 소리에 엠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또 무슨 일이지.’
평소와 다르게 노크 소리가 거친 것이, 어쩐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노크 소리가 거칠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용무가 있는 이가 다급하다는 것을 뜻할 테니 말이다.
“들어오세요.”
한숨 섞인 엠마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검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엠마가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긴급으로 올라온 정보입니다.”
그리 답하며 흑검병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엠마에게 전했다.
돌돌 말린 종이를 펴 그 내용을 빠르게 읽은 그녀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
순간 자신이 뭔가를 잘못 읽었나 싶은 엠마.
몇 번이고 종이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은 그녀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으니.
“3, 4, 5년 차… 거주 구역… 반파(半破)?”
엠마의 두 눈에 아찔함이 깃들었다.
* * *
사흘 뒤.
드드드-.
잘게 떨려 오는 건물의 진동.
이에 반쯤 부서진 문 뒤에 바짝 붙어 숨죽인 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경직된 표정.
연신 꿀렁이는 목젖.
그건 누가 봐도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긴장해 겁에 질린 이가 다름 아닌 47기의 서열 1위, 수잔 리플리임이 알려진다면 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그러나 지금 수잔에겐 남들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또… 또 왔어?!’
쿠궁-!
드드드-!
쉼 없이 들려오는 소음과 진동.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명과 악에 받친 괴성.
그 모든 건 며칠 전 ‘그 괴물’의 방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날’도 그랬었다.
쾅-!
[한판 붙자!]산산이 부서져 나뒹구는 현관문.
난데없이 들려온 외침.
그리고…….
[5년 차 거주 구역에 다른 연차가 들어오면 안 된다는 규칙 있냐!] […우린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만?] [어차피 할 거였잖아? 다른 새끼들도 날 보자마자 다 그 소리부터 하더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도무지 영문을 모를 괴상한 헛소리.
그와 함께 괴물의 공격이 시작됐다.
거기에 가장 먼저 휘말린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우연히 기숙사에 남아 있었던 수잔이었다.
[오? 이게 누구야, 독쟁이년 아냐?] [너, 너는……?!]괴물의 내면에 깃든 흉흉한 살기를 직접 마주했던 수잔.
이미 유리에게 ‘진짜로’ 살해당할 뻔했던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리가 이를 그냥 보내 줄 리 있겠는가.
[에이, 벌써부터 도망치면 재미없지.]그리고 그게, 그날 수잔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변해 있었다.
5년 차 고급 기숙사의 상징과도 같았던 하얀 대리석 바닥은 폭격이라도 받은 듯 여기저기 깨져 있었고, 그도 모자라 이상할 정도로 듬성듬성 비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멀쩡한 문짝과 창문은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벽과 천장이 무너져 있었다.
고작 몇 시간 기절한 사이에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기숙사.
이에 수잔은 후회해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끝마치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저 괴물이 이리 미쳐 날뛰는 건지는 모른다.
다만 ‘수료 임무’를 최대한 늦게 완료했다면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후회했던 수잔은 오늘 또다시 후회하고 말았다.
“정말로… 또 왔어!”
그날은 그래도 한 번이면 끝나겠거니 싶었다.
그냥 어쩌다 맞은 날벼락 같은 거라고.
자신이 운이 없었던 것뿐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한데, 세상에 이게 웬걸?
저 미친 괴물은 그날 이후 매일같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듣기로는 이 미친 짓을 벌이는 이유가 수련 때문이란다.
단지 본인의 수련을 위해 매일 같이 이 짓거리를 하는 거라는데…….
‘그건 다시 말해…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다는 거잖아!’
정말로 요람 생활 말년에 무슨 액운이 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
“…진짜 일찍 돌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자신은 이미 한 번뿐인 수료 임무를 완료했고, 그로 인해 이 지옥에서 벗어날 기회를 잃었는데.
지금은 그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다른 동기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수잔이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 때.
콰즉-.
갑자기 그녀가 기대어 있던 나무 문을 뚫고 손이 튀어나왔다.
그와 함께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
“…찾았다.”
너무도 익숙한, 이제는 두렵기까지 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깨달은 수잔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콰즈즉-!
“아, 안 돼애애!”
곧 새하얀 손에 붙잡혀 끌려가는 그녀의 절규만이 애처로이 메아리쳤다.
* * *
툭툭-.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며 밖으로 나서는 유리.
그렇게 밖을 빠져나온 유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이제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어진 기숙사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5년 차의 모습.
이를 응시하는 유리의 눈에 묘한 빛이 서렸다.
‘역시… 줄었어.’
5년 차가 수료 임무를 위해 외부에 파견 나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왜 5년 차 인원이 이것밖에 안 되냐며 같은 5년 차를 족쳐서 알아낸 정보였다.
그래서 현재 5년 차 기숙사에 남아 있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인원이 줄었네.’
날이 갈수록, 첫날 기습적으로 쳐들어왔을 때보다 계속해서 사람이 줄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5년 차만의 사정이 아니었으니.
3, 4년 차 역시 첫날에 비하면 거주 구역에 있는 인원이 현저히 줄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도망을 친 것이리라.
‘뭐, 당연한 거지.’
솔직히 자신 같아도 항거할 수 없는 적이 올 걸 알고 있다면 일단은 피하고 볼 것이다.
그걸 알고도 여전히 도망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유리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그렇단 말이지.’
묘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무너진 기숙사를 뒤로한 채 떠나가는 유리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들떠 보였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7월 말에 접어들었다.
* * *
어둡다.
그리고 답답했다.
후욱후욱-.
잘 쉬어지기는 하나, 전혀 시원하지 않은 숨.
이에 그는 자신의 얼굴에 무언가가 씌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루 같은 건가?’
얼굴에 닿는 거친 느낌.
이는 썩 좋지 않은 질의 자루임이 틀림없었다.
일단 거기까지 알아낸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팔다리가 묶였다.’
그것도 의자에 앉혀진 상태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걸 보니 묶은 이의 솜씨도 전문가급이리라.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던 그는 이내 탈출을 포기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대체… 내가 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거지?
어느 틈에?
‘분명 잠자리에 든 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특별할 게 없는 하루였다.
아니, 근래 들어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즐거웠기에 매일이 특별하기는 했었다.
앞으로도 늘 지금만 같기를 기원할 만큼 특별하지만 특별하지는 않은 하루.
오늘도 그러했다.
‘아니, 오늘이 맞기는 한 건가?’
아무튼, 어제인지 오늘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도 이상할 정도로 피곤했기에 얼마 안 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눈을 떠 보니 딱 지금 이 꼴인 거지.’
젠장할, 맙소사. 어릴 때도 안 당해 본 납치를 다 커서 당하다니.
그로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두려울 따름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날 납치했을까?’
최근 들어 조금 풀어졌다고는 해도 납치 따위를 당할 정도로 풀어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토록 허무히 납치당했다면 분명 특수한 술수가 있었을 터.
예를 들면…….
‘…약이라든지?’
솔직히 그게 아니면 자신이 그토록 깊게 잠들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별로 한 것도 없이 유난히 극심했던 피로감이었다.
‘문제는 대체 언제 약에 당했느냐인데…….’
그런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저벅저벅-.
앞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발소리.
그 수를 헤아려 본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둘이 아니다?!’
발소리로 보아 자신을 납치한 이들은 족히 열 명에 가까웠다.
이에 그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을 때.
푸슥-.
얼굴을 덮고 있던 검은 자루가 벗겨졌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
곧 빛에 순응한 그가 자신을 납치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납치범들의 정체에 바짝 얼어붙고 말았으니.
“…너냐?”
“요람에 똥물을 뿌린…….”
“…그 더러운 새끼가?”
클라리스는 자신을 죽일 듯 내려다보는 선배들의 눈빛에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