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83
282화. 승자 독식 (2)
유리는 당황했다.
분명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아야 하는데?
그런데 어째서 1.5m 정도가 모자라는 걸까?
‘아린이 내 생각보다 더 무거운가……?’
하지만 어깨에서 전해지는 무게감을 자신이 잘못 느꼈을 리는 없었다.
그리 고민하던 유리는 곧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 맞다, 풍각!’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깜빡하고 있던 사실.
그건 바로 자신의 다리에 도합 100㎏짜리 각반이 채워져 있다는 거였다.
그걸 깜빡하고 도약할 거리 계산을 잘못해 버린 것.
하지만 팔자 좋게 마냥 눈만 끔뻑일 수는 없었다.
지금도 시시각각 몸이 밑으로 꺼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유리뿐만이 아니었다.
놀란 아린이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악!”
등 뒤에서 고막이 따갑게 울리는 비명에 유리는 곧장 대처법을 생각해 냈다.
사실 그 대처법이랄 것도 별거 없었다.
도약 거리가 1.5m 정도 모자란다?
‘모자람은 채우면 그만!’
그리고 지금 유리에게는 그에 딱 맞는 게 있지 않은가.
턱-.
아린의 발목을 강하게 잡은 유리는…….
“읏차!”
훙-.
그대로 그녀를 휘둘렀다.
마치 어깨에 걸쳐 놓았던 젖은 수건을 휘두르듯.
“에끄으에에에에!”
놀란 아린이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는 가운데, 그녀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보여 주었다.
“끼에에에!”
눈물 콧물을 줄줄 흩날리면서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밧줄을 부여잡은 거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팔 힘만으로 줄을 잡아당기며 잽싸게 절벽을 기어오르기까지 했다.
“오? 이거 재밌네?”
아린 덕분에 추락도 면하고, 그녀의 발목을 부여잡고 편하게 절벽으로 올라온 유리는 낄낄거렸다.
“이야, 죽을 뻔했잖아?”
그 태연함에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할딱거리던 아린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했다.
“야 이, 나쁜 노마아아아앙!”
“프흐흐.”
“웃지 마아! 웃지 말라고!”
“클클클.”
“으아앙! 꽃다운 나이에 물고기 밥이 될 뻔했어! 으허어엉.”
“이게 다 네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그랬던 건데?”
“무, 무, 무슨 소리야! 나 안 무거워! 안 무겁다고오오!”
풍각을 깜빡 잊고 계산하지 못한 본인 잘못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아린의 탓으로 돌려 버린 유리.
그는 대성통곡을 하기 일보 직전인 아린을 가뿐히 무시하고 활짝 열린 마왕성의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어서 들어오라는 듯한 검은 동혈.
‘아마 성 안에서 단체로 진을 치고 있겠지?’
애초에 그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율리아가 이렇게 시간을 번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은가.
이를 본 유리는 피식거렸다.
“날 기다린다고?”
응, 안 가.
그 문으로 안 들어가면 그만이야.
유리는 아직도 징징거리고 있는 아린을 다시 어깨에 들쳐 멨다.
이제 그녀는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짐짝 취급을 받으며 코를 훌쩍일 뿐.
그사이 유리는 고개를 들어 성을 올려다보았다.
‘저기네.’
율리아가 지정한 공주의 감금 장소는, 일전에 자신이 납치 후 감금당했던 곳과 똑같았다.
‘이제는 탈출이 아니라 저길 다시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게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빤히 고개를 들고 있던 유리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탁-.
돌출된 부위 하나 없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벽을 마치 평지처럼 밟고 날아오르는 신기(神技).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몸놀림이었지만, 이제 유리에게는 별 특별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너무도 손쉽게 건물 외벽을 박차고 오르는 유리.
그가 성의 꼭대기에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도착한 창문을 보고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이렇게 쉽게 들여보내 준다고?’
무언가 격렬한 저항 정도는 있을 줄 알았더니만?
살짝 든 의아함을 뒤로하고, 유리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통과했다.
그렇게 들어선 너른 실내.
곧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에는 자신을 비롯한 괴츠, 그리고 여러 공주들이 잡혀 있던 장소.
분명 그때와 같은 공간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일전에 마왕의 의자가 자리했던 단상.
그곳에는 의자 대신 열린 철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포진한 서슬 퍼런 눈빛의 수십 명.
하나같이 수준급의 기운을 폴폴 풍기기에 유리는 저들이 율리아가 고르고 고른 최정예라 확신했다.
‘간단해서 좋네, 저걸 뚫고 저 철창 안에 공주를 넣으면 된다는 거잖아.’
단숨에 용도를 확인한 유리가 철장 인근에 자리한 율리아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뭐야? 난 거창한 환영 인사라도 준비했을 줄 알았더니만?”
“준비하기는 했었지, 갑자기 손님이 예정보다 일찍 찾아오지만 않았다면 준비한 걸 제대로 보여 줬을 텐데 말이지.”
율리아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1층부터 시작해 곳곳에 전력이 배치되고, 각 창문마다도 궁수들을 붙여 유리의 침입에 대비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급하게 전력을 집결시키다 보니 그처럼 완벽한 배치는 못 하게 된 상황.
‘그래도 핵심 전력은 전부 집결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유리가 모든 난관을 격파하고 최종 구역에 도착했을 때를 대비해 모은 50인의 정예.
사실 이번 계획에서 핵심 구성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 안에 테레시아를 비롯해 군터, 뽀삐, 무치까지 포함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슥- 훑어보던 유리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응?”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풍기는 진형 배치.
그 느낌을 어디서 받았는지 떠올리느라 유리가 인상을 쓰자 1열에 있던 제리가 그걸 보고 으스댔다.
“놀랐냐?”
“응……?”
“아무렴, 처음 봤겠지.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흑쇄진이란 거다, 요 녀석아! 흑검병들이 쓰는 바로 그 흑쇄진!”
“오오, 세상에! 그렇구나!”
의기양양한 제리를 보고 유리가 가볍게 손뼉을 쳐 줬다.
‘어쩐지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더라니, 흑쇄진이었군.’
다만 이렇게 많은 이들로 펼치는 흑쇄진은 처음인지라 바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이에 유리는 굳은 얼굴로 턱을 쓸었고.
그걸 본 제리가 히죽거렸다.
“그래, 아무리 너라도 이 순간은 긴장할 수밖에 없을 거다.”
이에 유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개소리야. 내가 긴장 같은 걸 왜 해?”
“좋아, 흑쇄진의 위력을 겪어 보기 전까지… 얼마든지 여유를 부려라.”
과할 정도로 자신감을 내비치는 제리를 보고 유리는 조소를 날려 주었다.
“야, 너희 그거 알아? 내가 지금까지 머리로 상대해 주느라 이렇게 오래 걸렸던 거지. 내가 몸을 썼으면 이 대결은 진즉에 끝났어.”
유리와 율리아 간에 있던 수 싸움을 모르는 좌중은 단순히 저 말이 허세라 여겼다.
하여 대다수가 콧방귀를 꼈다.
“웃기고 있네. 긴장해서 굳어 버린 게 다 보이는구만.”
“아, 이거? 이건 그냥 딴생각 좀 하고 있던 거뿐인데?”
그 말 그대로였다.
유리의 표정이 굳어진 건 긴장이 아닌 고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간단했다.
과연 자신의 전력을 어디까지 써야 할지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어쩔까?’
지금까지.
이 마왕성의 최종 구역까지 도달하면서 유리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자신에게 끈덕지게 따라붙는 어느 한 시선 때문이었다.
‘이걸 어디까지 보여 줘야 하나?’
아니, 따지고 보면 그 시선을 의식해 일부러 의도적으로 전력에 제한을 둔 것이었다.
그렇게 보이게끔 말이다.
‘영역을 전개하면 너무 쉽게 뚫을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쩔쩔매는 것도 영 아닌 거 같고.’
그 중간쯤 어딘가.
지금까지 자신이 보인 모든 연기가 그에게 진실로 보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보여 주고 어디까지 숨겨야 할까?
‘지금까지처럼 영역을 개화한 걸 숨겨?’
짧은 고민을 이어 가던 중 유리의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이걸 굳이 숨길 필요는 없잖아?’
어쩌면 자신이 공인 7단에 오른 건 이미 그도 알고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얼마 안 가 알게 될 거다.
요람은 그의 집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애써 굳이 자신이 공인 7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다.
‘다만 숙련도는 다르지.’
자신이 영역을 개화한 것도 모자라, 담농의 경지까지 도달해 자유자재로 상쇄를 다룬다는 것은 그도 모를 것이다.
코코라면 거기까지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럼 답은 정해졌네.’
공인 7단에 오른 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영역을 전개하는 데 있어선 미숙함을 보인다.
거기까지가 유리가 계산한 ‘완벽한 연기의 수준’이었다.
툭툭-.
발끝으로 가볍게 땅을 디딘 유리.
그가 정면을 응시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네.’
지금까지 율리아와 자신의 싸움은 머리 대 머리, 수(數) 대 수(數)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힘 대 힘.
무력과 무력의 충돌이 자신과 율리아의 마지막 결전이 될 터.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이 싸움에서 유리는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빨리 끝내자.’
괜히 율리아와 수 싸움을 해 보겠다고 열심히 머리를 쓴 탓에 골치가 아팠다.
얼른 끝내고 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유리.
그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한 걸음.
이후는 보폭이 서서히 커졌고.
마침내 그는 달리고 있었다.
그에 맞서 50인의 흑쇄진이 마치 생물처럼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은 짐승과도 같은 합격진의 움직임.
이를 마주한 유리는 겁도 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푸르고 예리한 발톱이 유리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군터 새끼네.’
깔끔한 검격.
그리고 성실함과 정직함이 느껴지는 검로는 요즘 삐돌이로 등극한 군터의 것이었다.
카강-!
유리가 이를 쳐 내자 좌우에서 거대한 힘이 밀려들었다.
‘이건 근육 돼지 형제고.’
상대를 쪼개는 파괴적인 도끼 창.
상대를 뭉개는 위압적인 방패.
요람에서 힘이라면 1, 2등을 다투는 이들이 동시에 유리를 노리고 힘을 합쳤다.
이에 유리는 맞서지 않고 앞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름다운 장미의 정원이었다.
사라락-.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소리 속에 붉은 장미의 꽃잎이 나풀나풀 유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변태의 검이 그새 더 화려해졌네?’
약간의 감탄과 함께 괴츠의 장미 꽃잎들이 유리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쉬익-.
만개한 장미꽃 밭에서 검은 뱀이 튀어나왔다.
유리가 몸을 틀어 보았지만, 흑사는 그를 기필코 물겠다는 듯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이에 피식 웃은 유리.
‘집요하다고, 텟샤.’
검은 뱀에 맞서 유리의 검이 만들어 낸 새하얀 뱀이 나아갔다.
카가강-.
흑사와 백사가 뒤엉키며 그 속에서 불똥이 튀었고.
힘에서 밀린 흑사가 다급히 물러났다.
이에 유리가 테레시아의 그림자를 쫓으려 하였지만, 이내 그녀는 허깨비처럼 훅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유리에게 테레시아를 쫓을 여유는 없었다.
곧 사방에서 온갖 공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게 얼마나 살벌하던지 유리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아린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히끅!”
이런 근접전에는 익숙하지 않은 아린.
그녀는 연신 딸꾹질을 하다가 안색이 창백해져 눈을 꼬옥 감았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싶었기 때문이다.
반면 유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전부 확인했다.
또한, 수시로 바뀌는 진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거… 흑쇄진 맞아?’
분명 그 틀은 흑쇄진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자신이 알고 있던 흑쇄진이란 개념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
‘이런 합격진을 그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다고는 쳐도… 익혀 내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자신을 에워싼 50인은 마치 다년간 합을 맞춰 온 듯 능수능란하게 고난이도의 흑쇄진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흑쇄진의 중심축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율리아를 본 순간, 유리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이 많은 사람이 그 짧은 시간 만에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대형 흑쇄진을 익혔나 싶었더니만, 그냥 율리아 꼭두각시들이었잖아?’
흑쇄진에 대해 통달하고 있는 건 율리아 하나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그녀가 사용하는 마병술에 육신의 통제권을 넘겨주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거였다.
‘쩨리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했더니만, 이래서였군.’
분명 급조한 것이 분명한 흑쇄진이었지만, 그 완성도는 유리가 겪은 그 어떤 합격진보다 뛰어났다.
그 위력마저도 말이다.
이러니 제리뿐 아니라 모두가 자신감에 차 있던 거였다.
‘뭐, 그건 그렇고… 적당히 어울려 준 거 같으니 슬슬 끝낼까?’
자신을 보는 누군가의 시선에 뒤통수가 뜨끈뜨끈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그가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다는 뜻.
하여 유리는 보여 주기로 했다.
진:영역 전개.
광폭하게 휘몰아치는 검은 사슬 속.
유리가 앞으로 나아갔다.
저벅-저벅-.
그건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뇌전을 동반한 극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고 평온한, 보통의 것보다도 느린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유리에게 닿지 못했다.
군터의 정교한 발톱.
뽀삐의 위압적인 뭉개기.
무치의 파괴적인 쪼개기.
괴츠의 화려한 환영.
테레시아의 집요한 찌르기.
수잔의 잔혹한 독.
안드레스의 용맹한 사자.
그리고 율리아가 모두의 힘을 하나로 엮어 만든 검은 사슬마저도.
그 어떤 것도 유리를 막거나 속박하지 못했다.
겨우 산책하듯 걷는 그를 말이다.
다만.
‘아, 여기서 잠깐 한 번 삐끗해주고.’
간혹 가다가 유리는 멈칫멈칫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도 그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턱-.
감옥이 자리한 단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는 철창 앞에 서서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얽혀 들었으니.
경악, 불신, 부정, 허무, 허탈.
유리는 그러한 눈빛을 즐기듯, 자신과 눈이 마주친 좌중을 오연히 내려다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말했지? 내가 몸을 썼으면 이 대결은 진즉에 끝났을 거라고.”
그 말과 함께 아린을 철창 안에 내려놓고.
철컹-.
모두가 보란 듯이 철창의 문을 굳게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