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84
283화. 승자 독식 (3)
고요한 적막.
조금 전까지 격한 싸움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유리가 철창을 닫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좌중은 겨우 이성이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정신적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어……?”
“지금… 어떻게 된 거지?”
맹렬하게 몰아치는 공격 속.
유리는 그저 걸었다.
느릿느릿, 너무도 천천히.
그러면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기는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흑쇄진의 맹공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그 어떤 공격도 유리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유리를 막아 세우는 것조차 실패했다.
그 사실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넘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나름대로 유리를 잘 알고 있다는 마왕성의 일원들조차 다르지 않았다.
테레시아, 군터, 뽀삐, 무치.
가장 오랜 시간 유리와 부대껴 온 그들이었기에.
그런 자신들조차 유리의 제대로 된 실력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율리아였다.
“말도… 말도 안 돼…….”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자신이 만든 흑쇄진이 어떤 위력인지.
‘그건 오직 유리 홀랜드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흑쇄진이었어!’
그간 수집한 유리의 정보를 바탕으로 직접 흑쇄진을 개량하고.
모든 상황과 능력을 계산하여 손수 최정예를 선별했다.
오로지 유리를 상대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흑쇄진은 절대 이리 쉽게 뚫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특히 그 상대가 유리라면 더더욱!
‘유리를 상대하기 위해 모든 걸 맞췄는데…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상황을 부정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율리아 특유의 냉정한 이성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 뿐.
결국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정보가… 잘못되었던 거구나.”
유리의 성장세가 남다르기에 그에 관한 정보 갱신을 빠르게 하고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보를 갱신하는 것보다 유리의 성장 속도가 더 빨랐던 모양이다.
율리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동시에 그녀는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금 전 상황은… 기이해.’
흑쇄진의 위력은 결코 얕잡아 볼 게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설계했으니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건 뭐지?’
어째서 자신이 만든 흑쇄진으로 유리를 막을 수 없었던 거지?
유리는 어떻게 흑쇄진을 그토록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걸까?
그리고 율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찾아냈다.
그녀가 찾은 답이 홀린 듯 입에서 흘러나왔다.
“…영역?”
솔직히 너무 말이 안 되는 가정이라 답을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되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그래, 영역이라면… 그거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져!’
그 절대 감각의 권역이라면?
자신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 초감각의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개량된 흑쇄진 속을 산책하듯 걸어 나간 그 모습이 완벽히 납득된다.
이에 율리아가 멍하니 단상 위의 유리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7단… 공인 7단이 된 거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위가 조용한 탓에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는 곧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니.
“공인 7단이라고?! 저 녀석이?”
“말도 안 돼! 우리 아버지도 겨우 도달한 경지인데?!”
“이 무슨… 터무니없는 괴물 새끼냐…….”
다른 누구도 아닌 율리아의 입에서 나왔기에 모두가 그 말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렇게 단상 아래서 퍼져 나가는 술렁임을 지켜보던 유리가 강하게 땅을 내디뎠다.
쿵-!
묵직한 울림이 좌중의 이목을 잡아끌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유리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내가 이긴 거 같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꾹 다무는 사람들.
그 정적이 승복의 표현임을 알아차린 유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까지 마왕성… 니들이 단체로 시위하던 그곳에 집결해. 그때 내 소원을 말할 테니까.”
통보에 가까운 말을 남긴 유리는 그대로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렸다.
“…….”
“…….”
그렇게 모두가 유리가 떠나간 자리만을 멍하니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을 때.
훌쩍-.
“나 좀 꺼내 줘요…….”
철창을 부여잡은 아린의 애원만이 정적 속에 서글프게 떠돌았다.
* * *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권터가 마왕성 인근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절벽을 넘어 빠르게 사라져 가는 유리의 뒷모습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유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그의 입술이 달싹였으니.
“공인 7단… 절대 영역의 경지.”
조금 전, 유리가 흑쇄진을 상대로 보여 준 그 움직임.
그 의미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건 다른 아닌 권터 그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리가 보여 준 그 신기와 같은 움직임은 최근 권터가 도달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바로 그 경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말해 아직 자신이 나아가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그 유리 홀랜드가 먼저 도달하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꾸득-.
권터가 으스러질 듯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는 곧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런 권터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밝게 빛났으니.
권터의 두 눈에 깃든 빛.
그건 희망과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권터가 그런 빛을 머금게 된 건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찾았다.’
바로 이번 관찰을 통해 유리 홀랜드의 약점을 찾아냈기 때문.
‘분명하다. 그게 유리 홀랜드의 취약점인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리 홀랜드를 쫓아다니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벌이는 중요한 전투는 모두 지켜보았다.
그 결과, 그는 유리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전투 상황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공격 박자는 일정해진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거라 여겼지만, 계속 보다 보니 확실히 느껴졌다.
어느 순간 유리의 공격이 일정한 박자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그가 승리를 자신하며 상대를 깔볼 때라는 것도.
‘그건 아마 유리 홀랜드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습관일 거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습관이라면 누군가 지적해 주지 않는 이상 교정할 수도 없을 거다.
그리고 그 습관이 언젠가는 유리 홀랜드에게 치명적이 독이 될터.
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는 기회가 되어 주리라.
권터는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백룡고 출입 권한 하나를 내주고 유리 홀랜드의 약점을 얻었다라…….’
처음 율리아가 그리 제안을 해 왔을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하였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정말 유리 홀랜드의 약점을 찾게 되었으니 권터는 자신이 손해를 본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고 여겼다.
유리 홀랜드의 약점을 찾은 것은 물론 현재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영역을 다루는 게 미숙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 역시도 영역을 개화한 게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는 소리겠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지금은 비록 유리 홀랜드가 앞서 있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 정도 차이면 머지않아 따라잡을 수 있을 터.
“…이번 무룡대전이 기대되는군.”
그리고 올해 연말이 된다면 그와 자신의 위치는 뒤바뀌리라.
권터는 그리 확신했다.
* * *
유리가 지정한 당일.
수백 명의 사람이 북쪽 숲의 마왕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나같이 울상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결코 행복한 미래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하나둘씩, 요람의 모든 기수가 타도 유리를 외치던 바로 그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 빨리빨리들 오라고, 이 패배자 새끼들아!”
잔뜩 신이 난 유리가 있었다.
“이따위로 느려 터졌으니까, 니들이 진 거라고!”
“…….”
이런 날은 지각조차 안 하고 먼저 나와 몰려드는 기수들을 향해 연신 조롱을 날리는 유리.
그는 자신을 쏘아보는 이들을 향해 낄낄거렸다.
“왜? 꼽냐? 꼬와?”
“…….”
“꼬우면 지질 말든가?”
“…….”
“1 대 400으로 붙었는데도 졌어? 이야, 나라면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닐 텐데. 크흐흐.”
수백 명을 상대로 연신 거들먹거리며 놀리는 유리.
그의 행태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수백 명은 참았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저 새끼가?!’
‘참자, 참아!’
‘저 정신 나간 놈이 대체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소원을 빌기 전까지는 참는 거다!’
괜히 여기서 발끈하여 미친놈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자신들이 짊어질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수백 명이 부들부들 떠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던 유리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 소원을 말할 시간인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은 흠칫거렸다.
이번 대결에서 유리가 내건 조건.
바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는 그 조건!
비록 여러 제약이 걸린 소원권이라고는 하여도 그걸 비는 놈이 저 정신 나간 놈이기에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모두가 유리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가 무슨 소원을 말해 올지.
그렇게 좌중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마침내 유리의 입이 달싹였으니.
“내 소원은 간단해. 앞으로 거주 구역의 분배는 내가 정한다.”
“……?”
처음 유리의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어진 유리의 설명을 듣고는 좌중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자, 그럼 거주 구역을 내가 어떻게 분배할 거냐? 별거 없어, 나랑 대련을 한 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조가 현재 5년 차가 사용하는 거주 구역을 이용하는 거야. 무려 한 달 동안!”
“……?!”
“그다음으로 점수가 높은 조가 4년 차 거주 구역을 쓸 거고, 그다음이 현재의 3년 차 거주 구역… 마지막으로 꼴등을 한 조는 북쪽 구역에서 지내게 되는 거지.”
“무, 무슨?!”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거주 구역 재탈환의 기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줄 테니까. 모두에게 공평히! 쉽게 말해 거주 구역 재배치 대결이라고나 할까?”
그 말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유리와 대련을 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 5년 차 중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걸 우리가 용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왜 안 되는데?”
“뭐?”
“기수 전체 중 80% 이상이 들어 줄 수 있는 소원이면 된다며? 이게 들어주지 못할 소원인가?”
“그…….”
“뭐가 문제인 거지? 거주 구역을 옮기는 거? 아니면 나랑 대련하는 거? 그것도 아니면 조별로 나랑 대련하는 거?”
유리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어제까지는 잘만 했잖아? 나 이겨 보겠다고 잘만 편 먹고 싸웠으면서? 그럼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유리의 물음에 불만을 토로한 5년 차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대신 3년 차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대련을 통해서 네가 점수를 준다면 5년 차 선배님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텐데? 그럼 지금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잖아?”
“뭔 소리야? 내가 언제 연차별로 묶어서 조를 짠다고 했냐?”
“뭐……?”
유리가 좌중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당연히 모든 연차를 뒤섞어서 공평하게 4개의 조로 짤 생각인데? 아니, 짜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이미 한 번 4개 조로 짰었잖아, 얼추 엇비슷하게?”
“…아!”
“그걸 그대로 가면 되겠네.”
그제야 유리가 말하는 게 어제 사용한 4개의 진영임을 깨달은 좌중은 술렁거렸다.
그리고 술렁거림이 이어질수록 기수들의 표정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전반적으로 4, 5년 차의 기수들은 유리의 이야기에 불만 섞인 표정을 지은 반면.
반대로 1, 2, 3년 차의 기수들은 상당히 혹하는 얼굴이었다.
‘이거 잘만 하면… 우리도 노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잖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상위 연차면 모를까 더 나빠질 게 없는 하위 연차들에게 유리의 소원은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자, 우리 이제 연차 따위가 아닌 진짜 실력으로 대우받는 요람으로 거듭나 보자고!”
“……!”
마나가 담긴 유리의 목소리가 하위 연차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1~3년 차는 물론, 4년 차 몇몇도 유리의 이야기에 은근슬쩍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한편 그걸 지켜보고 있던 율리아의 머릿속에 과거 유리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아, 맞다! 이번에 판 짤 때,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 전부 섞어서 비등한 전력을 가진 4개 조로 나눠서 판 좀 짤 수 있겠어?]이를 떠올린 율리아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당시 저 녀석이 왜 그런 요구를 하나 했더니만…….
“…당했네.”
귀찮은 일을 자신에게 대신 처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니.
어이없다는 듯한 미소를 흘리며 유리를 바라보는 율리아.
그녀의 두 눈에는 어째서인지 작은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 * *
유리가 모두에게 소원을 빈 그날 밤.
파랑새 사무실의 창문으로 검은 인영이 찾아 들었다.
덜컥-.
달빛을 등지고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 율리아가 인상을 구겼다.
“왜 자꾸 멀쩡한 문을 놔두고 자꾸 창문으로 드나드는 건데? 문으로 다니라고 했잖아!”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에 야밤을 틈타 창문을 넘은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은밀한 밤손님은 창문을 타고 찾아오는 법이야.”
태연히 답하며 창문턱에 쪼그리고 앉은 유리.
그런 그를 향해 율리아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좋겠네?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어서?”
그녀의 퉁명한 목소리에 유리는 배시시 웃었다.
“내가 그랬지? 승자가 전부 먹는 거라고.”
그리 답하는 유리의 머릿속으로 과거 율리아와 나눴던 대화의 장면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