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86
285화. 백룡고 (1)
율리아와 악수를 나누며 유리는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해 보니 이거 제법 괜찮은 기회네.’
안 그래도 그도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기수를 잡아 족치다가는 언젠가는 그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대련을 하는 시간보다 대련 상대를 찾는 데 하루 대부분을 허비할 터.
하여 유리는 이번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보고자 마음먹었다.
‘판을 좀 크게 그려 볼까?’
이후 유리는 이번 일에 관해서 율리아와 꽤 오랜 시간 협의를 나눴다.
“소원? 그런 불확실한 조건을 걸겠다고? 그게 받아들여지겠어?”
“그냥 소원이면 안 되겠지만, 이런저런 제약을 건 소원이면 받아들여지겠지.”
“그 제약이란 건 겉으로는 까다로워 보이는데 사실상 별 효용은 없는 제약이어야겠네?”
“역시, 척하면 척이네!”
“알았어. 그것도 생각해 볼게.”
유리가 율리아를 향해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한 가지 조건을 또 추가했다.
“아, 맞다! 이번에 판 짤 때,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 전부 섞어서 비등한 전력을 가진 4개 조로 나눠서 판 좀 짤 수 있겠어?”
“판을 짤 때? 너와 싸울 우리 측 진영을 그렇게 만들어 달라는 거야?”
“맞아.”
“내가 왜? 굳이 그런 제약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는데?”
“제약이라고 할 것도 없잖아? 인원만 나누면 되는 건데. 선배한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흥, 진짜 꼭 이럴 때만 선배래.”
“아무튼 내 요구 조건은 그거 하나뿐이야. 그것만 해 주면 나머지는 그쪽이 어떤 제약을 걸어오든 토 달지 않고 전부 수용할게.”
“…전부? 정말?”
“응, 전부.”
“너한테 불리한 내용일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 얼마든지 해 봐.”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답변에 율리아의 눈빛이 굳어지고.
그녀가 서늘한 경고를 날렸다.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 * *
“프흐흐, 이거 후회되네. 이렇게 쉽게 이길 줄 알았으면 이것저것 다른 조건도 왕창 걸어서 잔뜩 뜯어냈어야 하는 건데.”
회상을 끝낸 유리가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
연신 히죽거리는 그의 조롱에 율리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작게 투덜거리는 것뿐이었다.
“…재수 없어.”
크게 반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율리아도 이번 싸움의 승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졌으니… 인정해야지.’
유리는 정말로 4개의 진영만 맞춰 주는 것만 빼면 자신이 제시하는 모든 제약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진영 4개를 나눈 것도 딱히 그에게 유리한 조건이 아닌, 단순히 귀찮은 일을 율리아에게 처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유리는 자신이 완벽하게 짠 판을 뒤집었다는 뜻.
“…진짜 재수 없어.”
한껏 짜증을 담아 꿍얼거리는 율리아를 보고 유리는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꼴을 보자니 더 놀렸다가는 정말로 크게 삐질 듯싶었다.
‘뭐, 그래도 이번 판을 짜는 데 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그만 놀려야겠네.’
이번 판은 유리와 율리아가 공동으로 계획했지만, 그걸 전면에 나서서 직접 실행에 옮긴 건 율리아였다.
모든 계획이 어긋나지 않게 치밀하게 조율한 것 역시 그녀.
다만 그래도 모든 게 율리아의 예상대로 된 건 아니었고, 중간중간 유리가 즉흥적으로 끼어든 적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협상 과정에서 난데없이 안드레스가 끼어들어 원주회의 탈퇴를 요구한 것 역시 원래 계산에는 없던 일이었다.
‘뭐, 그것도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일이 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소원 하나’를 추가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 쪽이 더 부담을 짊어지는 조건을 율리아가 제시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상황.
저쪽에서 강한 조건을 제시해야지 자신이 백룡고 말고도 추가로 조건을 덧붙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드레스가 원주회 탈퇴 조건을 추가로 덧붙이니 소원 들어주기를 조건으로 얹기가 더 수월해진 편이었다.
그 당시 생각에 유리가 히죽거리며 웃고 있으니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슬쩍 말을 걸어왔다.
“…권터를 끌어들이는 데 쓴 미끼, 네 약점이란 거… 정말로 알려 준 거지? 그자한테?”
그리 묻기는 했지만, 율리아는 이미 유리가 그러했으리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유리의 약점이란 게 그냥 권터를 끌어들이는 말뿐인 미끼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유리라고 해도 자신을 적대하는 이에게 약점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 교활한 녀석이라면 그 상황마저도 이용하기 위해 약점을 알려 주었겠지.’
정확히 말하면 ‘가짜 약점’을 알려 주었으리라.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율리아의 눈빛에 유리는 피식거렸다.
그러면서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적을 상대하는 순간에 있어 사람이 언제 가장 여유로워지고, 때론 과감해지는지 알아?”
이를 듣자마자 율리아의 눈에 ‘역시!’라는 감정이 드러났으니.
그녀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적의 약점을 쥐고 있을 때.”
율리아의 미소를 마주한 유리의 입꼬리도 음흉하게 뒤틀렸다.
“비록 지금은 딱히 쓸 일이 없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아주 결정적인 순간… 예를 들면 이번 무룡 대전이라든가?”
“글쎄?”
두리뭉실하게 말끝을 흐린 유리의 눈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에 율리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독하네.’
아마 권터는 꿈에도 모르고 있으리라.
백룡고를 내주고 얻어먹은 것이 달콤한 사탕이 아닌, 언제 터질지 모를 작은 폭탄임을.
그리고 권터가 이를 알아차릴 때는 아마도…….
‘폭발에 휘말렸을 때겠지.’
율리아는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유리의 잔머리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 * *
시간을 조금 거꾸로 거슬러.
막 초여름에 들어섰던 어느 날.
대륙 그 어느 곳보다 푸르름이 가득한 땅의 경계 지역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드디어 빠져나왔군!”
검디검은 흑의.
허리에 메인 폭이 넓은 검.
흉측하게 뭉개진 왼쪽 눈.
자못 험악한 인상의 그는 다름 아닌 흑검병단의 부단장인 듀란 비코비치였다.
듀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허…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하늘인지.”
울창하고 그늘진 땅을 벗어나, 나뭇잎 하나 보이지 않는 말끔한 창공에 듀란의 하나뿐인 외눈이 적잖이 감동한 빛을 띠었다.
그가 양팔을 벌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스읍-.
“역시 바깥 공기는 다르단 말이지.”
듀란의 말은 그저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비록 아직 그가 서 있는 곳도 열대기후인 탓에 후덥지근하였으나, 과할 정도로 습기를 머금은 ‘대수림’과 비교하면 산뜻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꼬맹이 하나 때문에 시작된 임무.
그 덕분에 대수림을 헤집고 다녀야 했고, 그도 모자라 깐깐하기 짝이 없는 골족의 비위까지 맞춰야만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으니 정신적으로 이만저만 시달린 게 아니었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대수림을 빠져나왔으니 밖의 공기가 유달리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지사.
‘꼬장꼬장한 난쟁이들한테 해방된 기념으로 가는 길에 시원하게 한잔해야겠군!’
벌써부터 눈앞에 시원하고 거품이 흘러넘치는 황금빛 맥주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꿀꺽-.
그렇게 듀란이 마른침을 삼킨 순간.
스스스슥-.
지면에서 갑자기 십여 개의 그림자가 불쑥 치솟으며 듀란을 에워쌌다.
고오오오-!
순식간에 사방에서 조여 오는 묵직한 기세에 듀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냐? 니들?”
그를 에워싼 이들.
그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듀란과 똑같은 복장을 한 흑검병들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요람에서부터 듀란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이들이었다.
부하들이 난데없이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자신을 둘러싸자 듀란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안 비키냐?”
듀란이 험악한 얼굴로 으르렁거리자 흑검병 중 한 명이 결연한 얼굴로 나섰다.
“못 가십니다.”
“뭐?”
“지금 분명 다른 곳으로 빠지실 생각이시지 않았습니까? 임무가 끝났으니 한잔하시겠다는 생각이시겠죠.”
마치 속내를 읽는 듯한 정곡에 듀란이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히 가슴을 펴며 말했다.
“왜? 내가 그러면 안 되냐?”
그 말에 곧장 답이 돌아왔다.
너무도 단호한 답이.
“네, 안 됩니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다.”
“그래도 안 됩니다.”
“니들, 이거 하극상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 새끼들이, 당장 비켜라.”
“차라리 저희를 죽이고 가십시오!”
이미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듯한 부하들의 눈빛에 듀란도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리 말하면 내가 못 죽일 거라 생각하느냐.”
스오오오-!
금방이라도 피 보라를 일으킬 듯, 듀란의 살기가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는 곧 이어진 흑검병의 이야기에 씻은 듯 사라졌으니.
“이대로 부단장님이 딴 길로 새신다면… 그리고 그걸 저희가 막지 못했다는 걸 엠마 부장님이 아신다면!”
“어?”
“…엠마 부장님께 죽도로 까일 바에는… 차라리 부단장님 손에 죽는 게 100배는 더 편안합니다.”
“…….”
“저희를 죽이십쇼!”
진실함이 가득 담긴 그 외침에 다른 흑검병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절절함을 느낀 듀란도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대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것들… 엠마가 붙여 놓은 첩자 새끼들이었군.”
어쩐지 혼자 가겠다는 걸 아득바득 우겨서 잔뜩 딸려 보내더니만.
잡일이나 시켜 먹으라고 딸려 보낸 것들인 줄 알았더니, 자신이 딴 길로 샐 것을 염려해 엠마가 붙여 놓은 감시역들이었다.
듀란이 그리 허무한 표정을 지으니 그를 둘러싼 흑검병들의 절실한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요람으로 바로 복귀하시지 않을 생각이시라면… 차라리 저희를 베고 가십쇼!”
진짜로 죽이라는 듯 목을 쭉 빼내는 흑검병들의 모습에 듀란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됐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알았으니 가자.”
결국 듀란은 시원한 맥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술 좀 마시겠다고 정예 흑검병들을 전부 베어 낼 수도 없거니와…….
‘늦으면 그 녀석이 어지간히 달달 볶아 댈 테니.’
자신을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느라 지금쯤 바짝 독이 올랐을 엠마.
그런 그녀의 무호흡 잔소리는 듀란으로서도 조금 두렵기 때문이었다.
“젠장, 가자, 가!”
그렇게 ‘엘릭서’를 구하는 임무를 맡아 장기 출장을 떠나 있던 부단장 듀란 비코비치.
그가 임무를 완수하고 요람으로의 복귀 여로에 올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대륙의 모처.
작은 촛불 빛이 퍼지는 탁자 위.
사각사각-.
새하얀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종이 위에 여러 개의 문자를 만들어 냈다.
[듀란 비코비치 요람 복귀 중.]빠르게 움직인 펜촉이 다음 줄로 넘어가서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가각-.
곧이어 유려하게 움직인 하얀 손이 세 번째 글귀를 완성하였으니.
[작전 재개.]탁-.
뾰족한 펜촉이 힘 있게 마침표를 찍어 눌렀다.
* * *
드르르륵-.
어두운 공간, 기괴한 소리와 함께 높은 곳에서 작은 빛이 떨어져 내렸다.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지면이 울리고.
그와 함께 드러난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여러 개의 쇠사슬에 매달린 커다란 금속 상자였다.
빛은 바로 그 금속 상자의 작은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미동도 없던 커다란 금속 상자.
끼이이익-.
마침내 그 측면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옘병, 드럽게도 흔들리네!”
바로 큼지막한 램프를 든 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