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299
298화. 진명로를 찾아서 (5)
테레시아의 진홍빛 눈동자가 유리를 빤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기는 했어.’
죄의 미궁에 들어온 자신들을 아무런 요구 조건도 없이 챙겨 주었던 유리.
처음에는 그저 무슨 꿍꿍이가 있으니 그러는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유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리는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고.
그 누구보다 단호하게 죄수들을 척살했다.
그러면서도 일행을 향해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쯤 했으면 뭐라도 내놓으라고 으스댈 법도 한데 말이다.
그건 평소의 그와는 명백히 다른 행동.
그런데 그 모든 게 한 가지로 설명이 되었다.
바로 유리가 일행들의 죽음을 걱정하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 테레시아의 이야기에 좌중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설마요?”
“배고프다!”
“저 녀석에게 그런 인간미가 있겠습니까?”
“어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당하다는 듯한 주변 반응.
그러나 누구보다 황당한 것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내가… 걱정하고 있었다고? 이 녀석들을?’
하지만 그런 황당함이 들었던 것도 잠시.
그는 테레시아의 이야기를 그저 흘려듣지 않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였나?’
계속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 편을 차지하고 있던 께름칙한 불안감.
당사자인 유리조차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흘려 넘겼던 그 감정.
죄의 미궁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그 순간 든 희미한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떠올린 순간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었네?’
살아온 삶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유리의 인간관계는 너무도 협소했다.
아니, 관계를 맺은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건 그에게 누군가와의 관계를 만들 기회도, 만들 의욕도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언제 죽을지 모를 시한부 인생.
아득바득, 아등바등 살아온 유리에게 타인이란 ‘적’ 아니면 ‘남’이었다.
그저 짧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뿐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요한과의 첫 만남 이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그에게 비로소 ‘내 사람’이라는 테두리에 넣을 인연이 생겼다.
요한, 테레시아, 아린, 뽀삐, 군터, 무치.
태어나 처음으로 이어진 관계.
하지만 정작 유리조차 지금까지 이를 인지하지 못했었다.
처음이었으니까.
나한테 이득이 되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쾌감이 들지 않는 것도.
타인과 함께하며 의심보다 편안함을 더 자주 느낀 것도.
그의 삶에 있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알지 못했으나 테레시아의 이야기를 듣고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 진짜로 얘들을 걱정하고 있던 거였네?’
마지막 진입 당시 생환율이 20%.
심지어 매년 생환율이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장소.
미궁에 진입 전 코코에게 그 설명을 듣자마자 유리는 무의식중에 혹여 이곳에서 ‘내 사람’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거다.
그건 마치 어린 자식을 물가에 내놓은 듯한 불안감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일행이 따라붙었을 때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달고 다니며 먼저 솔선수범하여 적들을 처리한 거였다.
“그래, 텟샤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유리가 볼을 긁으며 인정하자 주변 사람들은 불신 가득한 시선을 보내 왔다.
이게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냐는 눈빛들.
단, 테레시아는 예외였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우린 네 동료가 되고 싶은 거지, 보살핌받는 어린애가 되고 싶은 건 아냐.”
“이해했어.”
테레시아는 말하고 있었다.
난 너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고 싶은 거지,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건 싫다고.
그러니 믿어 달라고.
‘이건 분명 내 잘못이네.’
애지중지 감싸 품에 안고만 있는 건 동료라는 이름을 가진 관계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인형’을 품에 안은 것뿐이지.
‘내가 이 녀석들을 동료로 생각할 거라면… 나부터 믿음을 줘야겠네.’
테레시아, 아린, 뽀삐, 군터.
그동안 애매모호하고 두리뭉실하던 그들과의 관계를 ‘동료이자 친구’로 확실하게 정립한 유리.
그래서일까?
조금 전까지 탐탁지 않아 보이던 그의 표정은 맑게 개어 있었다.
* * *
출입문이 달린 동굴 안.
그리 밝지 않은 실내에 두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문을 등진 사내와 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
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 얼마나 들어왔지?”
“네 번으로 나눠서 들어 왔으니 80명 정도다.”
“그럼 앞으로 한 번이군.”
“열흘 안에 끝이 날 거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오가던 대화는 금세 멎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던 가운데.
문을 바라보고 선 이가 또다시 먼저 물었다.
“기분이 어떻지?”
“무슨 기분?”
“무려 20년 만에 집으로 갈 수 있게 된 기분 말이다.”
“글쎄…….”
흐린 말끝 속에 어딘가 모를 허망함이 담겨 있었다.
“밖에서 산 세월보다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더 오래되었으니… 이제는 여기가 집처럼 느껴지는군.”
“그건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군.”
문을 바라본 이의 목소리가 살짝 냉랭해졌다.
이에 문을 등진 이에게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걱정 마라, 내 뿌리는 잊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뭐, 그래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 앞으로 여유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좀 기쁘군.”
“듣기로는 넌 여기서도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던데? 늘 잠만 잤다던가?”
“그쪽이 뭘 모르는군. 그게 바로 위장(僞裝)이란 거다. 그 덕분에 이런 근사한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던 거고.”
“근사하다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장소다만?”
그리 답하는 사내의 주변으로 부러진 화살, 깨진 금속 조각들이 즐비했다.
그런 투정에 문을 등진 사내가 피식 웃었다.
“위험하기에 안전한 거다. 아무도 찾는 이가 없으니까. 거기다 여기에 들어온 녀석들이 줄줄이 죽어 나간다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거든. 원래 그런 곳이라.”
그 말을 끝낸 문을 등진 사내가 몸을 돌려 걸었다.
이후 문에 손을 댄 사내.
“그럼 투정은 그만 부리고 얌전히 있으라고.”
“어차피 할 것도 없다.”
살짝 짜증이 섞인 말을 무시한 사내는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그 순간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밖의 풍경이 보이니.
환한 달빛 아래, 문을 나선 사내가 입은 흑검병의 의복이 드러났다.
* * *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통로에서 신발 하나가 불쑥 빠져나왔으니.
곧 온전히 입구를 통과해 빛 속으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유리였다.
“흠… 딱히 위층이랑 다른 건 없는데?”
사흘 전, 테레시아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은 이후 부지런히 움직인 유리 일행.
이후 그들은 지하 3층의 죄수들을 모조리 청소하고 오늘에서야 헤어졌다.
유리는 지하 4층으로.
나머지 일행은 지하 2층으로.
유리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2층에 출몰하는 죄수는 3, 4단급.’
그렇다면 일행 개개인에게는 어쩌면 좀 위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걔들이 뭉친다면 4단급 둘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
개인이 아닌 그들 전부를 상대하는 건 지하 2층 죄수들의 실력으로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유리는 고개를 내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뭐,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할 때는 아니다만은…….”
지하 3층이 5, 6단이면 지하 4층에는 공인 7, 8단이 모여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이 또한 확실한 건 아니었다.
‘혹시 모르지, 공인 9단도 이곳에 있을지도.’
느낌상 공인 9단급은 5층에 머물 것 같았으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
하여 유리는 행동 지침을 정했다.
공인 7단급 죄수를 만나면 조지고.
공인 8단급 죄수는 대충 견적 좀 보다가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공인 9단급을 보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튀기로.
그렇게 결정을 한 유리는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조심, 살금살금.
흡사 유령처럼 유리의 신형이 소리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 * *
사흘 뒤.
우물우물.
육포를 씹어 삼키며 유리는 이동하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여유 있는 걸음걸이.
그러나 그의 눈빛은 매섭게 주변을 훑는 중이었다.
‘개미 새끼 하나 없네.’
위층을 돌며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지하 3층에서 그가 처리한 죄수들은 고작 열아홉 명.
그게 수십 년간 요람에 가둔 죄수의 전부라면, 당연히 지하 4층에 갇힌 죄수의 수는 더 적을 것이라고.
거기다 4층 내에서도 죄수 간에 분쟁 같은 게 일어났을 수도 있으니.
‘어쩌면 4층 이하로는 갇혀 있는 죄수가 없는 게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그래서 다른 애들랑 같이 내려올 생각을 하긴 했던 건데…….’
그런데 정말로 3일 내내 발바닥에 땀나게 돌아다녀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지 않자 유리는 자신의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아무도 없는 거 아냐?”
그렇게 중얼거리며 모퉁이를 돈 순간.
“응?”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건…….’
그곳에는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하 4층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발견한 흔적.
하지만 그건 사람이 산 생활의 흔적이 아니었다.
바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뭐, 그것도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라면 흔적이다만은.’
유리는 사방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전투의 흔적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거… 엄청나네.’
천장과 벽을 훑은 깊은 검상.
사람 두어 명은 너끈히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온 사방에 치즈처럼 송송 뚫려 있었고.
심지어 코끼리도 지나갈 듯 싶은 구멍이 수십 미터 길이로 뚫려 있었다.
실로 어마무시한 전투의 흔적.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견에 봐도 자신보다 실력 높은 이들이 벌인 전투.
‘이걸 전부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도 유추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이건… 사냥의 흔적이다.’
강자가 약자를 사냥하며 생겨난 흔적들.
물론 사냥감이 맹수였기에, 그 맹수가 사냥꾼에게 저항하며 이런 흔적이 남은 것이리라.
‘저기서 최초로 맞붙고 이쪽으로 이동했다.’
유리는 흔적을 따라 걸었다.
‘여기서 뿌리친 건가?’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니네, 사냥꾼이 곧장 따라붙었어. 맹수는 곧바로 떨쳐 버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흔적을 따라 걸으면 걸을수록 유리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오래전에 새겨진 싸움의 흔적은 더욱 격해졌고, 마침내 절정에 다다랐다.
이에 유리는 탄식했다.
‘강하다.’
사냥감이었던 맹수.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흩뿌린 것이라 추측되는 검흔은 유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 자리에 있는 게 나였다면… 이 공격을 받아 내지 못했을 거다.’
유리는 인정했다.
자신이었다면 이 공격을 절대 받아 내지 못했을 거라고.
그와 함께 유리의 시선이 중간에서 뚝 끊긴 검흔에 닿으며 경직됐다.
‘그런데 사냥꾼은 이 정도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막아 냈다. 그것도 손쉽게.’
쫓기던 사냥감의 실력은 놀라웠지만, 사냥꾼의 수준은 경악할 수준이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런 의문을 뒤로하고 유리는 나머지 흔적을 살폈다.
‘여기서 끝인 건가?’
주변에 다른 흔적은 없었다.
그건 이곳에서의 싸움이 이 절정의 한 수로 결판이 났다는 뜻.
그리 결론을 내린 유리의 시야에 또 다른 흔적이 잡혀 들었다.
‘무언가 질질 끌린 자국.’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기어간 자국이었다.
유리는 홀린 듯 그걸 따라 걸었고, 이내 모퉁이를 돌았다.
그 순간 그는 두 개의 다리뼈를 발견했으니.
“흠…….”
살짝 숙여 다리뼈를 살핀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건… 허벅지쯤에서 잘려 나간 거네.’
뼈의 단면은 누가 봐도 말끔하게 절단된 느낌이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어가는 사냥감을 쫓아온 사냥꾼.’
분명 그가 사냥감의 다리를 잘라 버렸을 터.
그리 확신한 유리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보이는 긴 핏자국.
그건 사냥감이 다리가 잘린 채로 기어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자국은 또 길게 이어져 또 다른 모퉁이로 꺾여 들어갔다.
유리가 이를 따라 모퉁이를 돈 순간.
“…어?”
그가 다시금 멈춰 섰다.
놀란 듯한 유리의 시선이 닿은 곳.
거기에는 새하얀 백골 사체가 엎어져 있었다.
물론 고작 백골 따위에 유리가 놀랄 리가 있겠는가.
그가 놀란 진짜 이유.
그건 바로 백골 사체의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때문이었다.
‘저거 설마?!’
두근거리는 심장에 유리가 서둘러 달려갔다.
그는 곧장 백골을 발로 쓸 듯이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찾았다.”
그곳에 있었다.
지면에 살짝 파묻힌 수정과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황금빛 구체가.
그건 전해 들은 진명로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이건 들었던 것보다도 훨씬 영롱한 빛을 띠고 있지 않은가.
“이게… 진명로?”
3주 넘게 지하 3층을 전부 돌았음에도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진명로를 4층에 들어와 단 3일 만에 발견하다니.
유리는 흥분한 얼굴로 진명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수정체에 닿은 순간.
우웅-.
어딘가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