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05
304화. 흑과 백 (6)
지독한 유리의 살기.
이에 놀란 군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 녀석… 갑자기 왜 저러냐?”
그에 대한 답은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제리에게서 나왔다.
“군터, 너 외동아들이냐?”
“그렇습니다만?”
“그럼 모르겠군.”
“예?”
“형제, 자매, 혹은 남매간에는 한 가지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뭡니까, 그게?”
군터의 되물음에 제리는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형과 언니, 그리고 누나나 오빠들은 말야, 자기가 동생을 후드려 패고 괴롭히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게 있지.”
“……?”
“바로 남이 자기 동생 건드리는 거.”
“…그런 게 있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래서… 난 저 녀석의 마음을 알 거 같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제리의 모습에 군터는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군터의 시선이 죽은 동기의 얼굴에 닿았다.
그가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비록 경쟁하는 사이라고는 하여도… 이들은 이렇게 죽어선 안 되는 거였다.’
그가 느끼기에 이번 일에 휘말려 죽은 이들은 명백하게 개죽음을 당한 거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일행을 이끄는 유리가 저들의 죽음을 무시하는 것 같았기에, 그 결정에 묵묵히 따랐을 뿐.
죽은 기수들의 시신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무력함에 이를 악물고 그저 외면하고 달렸다.
자신 역시 유리의 힘에 기대는 나약한 처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유리가 말하였다.
저들을 구하러 가자고.
군터는 그 결정에 크게 반색했다.
“난 동의한다.”
비록 자신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마는 최선을 다하리라.
군터가 그리 자긍심에 다짐하는 사이, 율리아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물어 왔다.
“괜찮겠어? 만약 우리의 예상대로 지하 5층에서 죄수가 풀려나는 거라면…….”
그녀의 우려에 유리는 단호히 답했다.
“알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그래도 되도록 구할 수 있는 녀석들은 구해 보자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유리 본인도 놀라고 말았다.
‘뭐… 나답지 않긴 하네.’
솔직히 말해 선배든, 후배든, 동기든 간에, 그들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또한, 죽은 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유리에게는 그저 타인의 죽음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가슴 속에서 치민 짜증과 분노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감정에 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후드려 패다가 정이라도 든 건가?’
어쩌면 그게 가장 정확한 분석일지도 몰랐다.
저들의 죽음에 슬퍼해 주는 것까지는 무리일지라도.
대신 복수를 약속하는 맹렬한 분노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름 동고동락했던 이들의 죽음에 분노하여 줄 수 있을 정도의 관계.
유리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요람의 기수들과 그 정도의 거리감이 형성된 모양이었다.
“강요는 안 한다. 따라올 사람만 따라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미 결정을 내린 군터는 유리의 옆에 섰다.
이후 테레시아를 비롯한 기존 일행 역시 덤덤한 얼굴로 유리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유리가 무슨 결정을 내린다고 한들 따를 준비가 되었다는 듯한 태도.
그다음은 괴츠였다.
“본인 역시 이번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는바… 최선을 다해 보겠소이다.”
결연한 표정의 괴츠까지 유리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서자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내가 빠질 수 없잖아?”
그렇게 율리아까지 동의하며 최종 결론이 나자 유리가 방향을 틀며 선언했다.
“자, 이제부터는 우리가 흰둥이들을 사냥할 차례다.”
유리의 사냥 선언에 그의 뒤로 따라붙은 이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한 명의 소녀가 전신에 상처를 입고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공포로 떨려 오는 눈동자.
이를 악물고 달리는 그녀의 어깨에는 48기를 상징하는 초록 견장이 부착되어 있었다.
허억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쉰 소녀는 이내 한 곳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아…….”
그녀는 앞을 막아 선 벽을 보고 좌절했다.
‘아, 안 돼……!’
하얀 악마를 피해 도망친 끝이 막다른 길이라니.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하얀 악마에게 몰이사냥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소녀는 이를 악물고 검을 들었다.
그 잔인한 악마에게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력하게 당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마지막이라면 발악 한 번은 해 봐야지 않겠는가.
각오를 다진 소녀는 막다른 벽을 등지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벅-.
정면의 꺾인 모퉁이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 온다!’
하얀 악마가 오고 있었다.
자신을 집어삼키기 위해!
덜덜덜-.
소녀는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으로 검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저벅-
그사이 또 한 번 들려온 발소리.
‘나, 나오는 순간 바로 공격을 날려야 해!’
그게 자신이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터.
저벅-.
다시금 들려온 발소리에 소녀는 마른침을 삼켰고.
저벅-.
‘다음이… 기회야!’
이어진 발소리로 거리를 가늠한 그녀가 조용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지, 지금!’
그렇게 소녀가 막 공격을 날리려는 찰나.
툭-.
곧이어 들려온 건 발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투드르르-.
무언가가 굴러온 소리였다.
“어……?”
소녀는 모퉁이에서 굴러나온 둥근 물체를 보고 놀라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건 다름 아닌…….
‘…머리?’
자신을 사냥하던 하얀 악마의 머리였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굳어 있는 사이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백의를 걸친 육신이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곧이어 널브러진 시체 옆으로 등장한 한 사람.
“좋아, 또 한 명 발견.”
검을 늘어뜨린 채 나타난 그를 보고 소녀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유리… 홀랜드?”
요람의 기수로서 저 얼굴을 몰라볼 리가 있겠는가.
유리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서 있는 소녀를 향해 말했다.
“따라와.”
그리 크지 않은 덤덤한 말투.
명령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바로 뒤돌아선 모습은 사뭇 냉담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소녀는 어째서인지 유리의 그런 행동에 너무도 안심되었다.
“어… 으, 응!”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니, 굳이 깊게 알 필요도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그녀가 알고 있으면 될 건 하나뿐.
그건 바로…….
‘날… 구해 줬어!’
유리 홀랜드가 자신을 구원하였다는 사실이었다.
* * *
지하 2층.
흑의를 걸친 다섯 명과 백의를 걸친 한 사람이 뒤엉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카가강-.
쉼 없이 맞부딪히며 불똥을 튕겨 내는 무기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곧장 치명상으로 이어질 공격이 끊임없이 상대방을 향해 쏟아졌다.
숨 막히는 혈전.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싸움의 형세는 팽팽했다.
백의를 걸친 백검병은 자신을 상대하고 있는 기수들의 실력에 감탄했다.
“제법이군. 고작 2년 차에 불과하건만, 이 정도 실력이라니.”
기수 다섯 전원이 붉은 견장을 차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이제 2년 차일 터.
그런데 4년 차나 5년 차도 아닌 것들의 실력이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이들의 합공 실력이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자를 합공하는 일에 상당히 익숙한 듯싶은데? 요즘 요람에서는 이런 합공법도 알려 주나?”
그런 백검병의 품평에 클라리스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지랄, 알려 주기는 개뿔! 이게 다 목숨 걸고 익힌 거다!”
그의 걸걸한 욕설에 백검병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실력은 괜찮은데 반해 예의는 전혀 그렇지 못하군. 요람에서 예절 교육은 안 시키나?”
그걸 들은 넬리가 피식 코웃음을 날렸다.
“이 아저씨가 뭘 모르시네? 우리한테 예의는 사치라고요.”
그걸 슐레만과 이반이 이어받았다.
“그따위 걸 신경 쓸 시간에 어떻게 하면 칼침을 한 번이라도 더 놓을지 연구하는 게 이득이라고.”
“예의와 인성이 실력에 반비례한다는 걸 몸소 보여 주고 있는 녀석이 있어서 말이지.”
그런 50기의 비웃음에 백검병은 서늘한 살기를 줄줄이 뿜어댔다.
“그런가? 그렇다면 너희가 배우지 못한 예의를 내가 알려 줄 수밖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검병의 공세가 더욱 거칠게 변했다.
안 그래도 간신히 버티고 있던 기수들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균열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약한 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푸슥-.
“악!”
백검병의 검이 파나의 어깨를 스쳤다.
원래는 가슴을 노렸으나 파나가 재빨리 피해 낸 덕에 어깨를 스친 일격.
그래도 비록 스쳤다고는 하나 상처가 꽤 깊었기에 손에 힘이 빠진 그녀는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파나!”
그런 파나를 보호하고자 달려든 이반.
하지만 그건 백검병이 의도한 상황이었다.
‘걸렸군.’
비릿한 미소를 지은 백검병.
“안 돼!”
“이반!”
동기들이 다급히 경고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었다.
그걸 알아차린 건 이반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성급했다!’
애초에 백검병이 파나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달려들 정도로 시간을 준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 시간이면 얼마든지 파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테니까.
‘파나는 미끼였구나!’
그녀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달려들기를.
그리고 그 누군가와 파나를 동시에 처리할 생각이었으리라.
‘이대로는 둘 다 당한다!’
이반은 고민했다.
이대로 파나는 포기하고 자신의 안위를 챙길 것인지.
아니면 파나를 내주고 틈을 노려 공격을 찔러 넣을지.
찰나의 순간에 던져진 선택지.
이에 이반은 주저 없이 선택을 내렸다.
“아?”
파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반?’
자신을 감싸 안은 단단한 남성의 육체.
그리고 이반의 등을 향해 다가오는 시퍼런 살기.
‘아아……!’
이반은 선택을 한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내주고 파나를 지키기로.
‘이반!’
금방이라도 이반을 꿰뚫을 듯 다가오는 백검병의 검에 파나는 속으로 절규를 내질렀다.
‘안 돼!’
파나의 머릿속에 이반의 죽음이 선명하게 그려진 순간.
슉-.
백검병의 검 끝이 돌연 방향을 틀었다.
이반의 심장이 아닌 옆에서 날아드는 무언가를 향해서.
‘…어?’
파나는 ‘날아든 무언가’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화살?’
캉-!
백검병의 검이 화살을 쳐 낸 순간, 이반은 파나를 안고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그사이 어디서인가 난입해 든 검은 인영.
파측-!
작은 뇌성과 함께 황금빛 궤적이 백검병의 육신을 나선처럼 휘감았다.
그리고.
푸슈슈숙-.
“커헉!”
피 분수에 휩싸인 백검병이 작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지켜 멍하니 지켜본 50기들.
“아……?”
“어?”
그들은 백색의 검을 늘어뜨리며 나타난 이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처럼 욕이나 저주가 아닌.
더할 나위 없이 크나큰 반가움을 담아.
“유리 홀랜드!”
“유리이이!”
마치 환호성과 같은 외침 속.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나와 이반을 보고 유리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니들 그럴 줄 알았다. 오질라게도 싸우더니만, 그게 다 사랑싸움이었네?”
그 말에 그제야 자신들이 아직도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다닥 멀어진 파나와 이반.
“왜, 왜 껴안고 지랄이야!”
“이, 이게 구해 줘도……!”
얼굴이 벌게진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사이, 곧이어 아린과 테레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하고 잠시 뒤, 서른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뭐, 뭐야?”
“저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견장을 찬 기수들의 등장에 놀란 50기들이 묻자 아린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쑥 내밀며 으스댔다.
“뭐긴 뭐야, 니들이랑 똑같은 사람들이지!”
“우리와 같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듯한 클라리스의 되물음에 테레시아가 답을 줬다.
“2층에서 유리가 구한 사람들이야.”
“유리가… 말입니까?”
“저 녀석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를 바라보는 이들.
그런 반응이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테레시아는 그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사이 뒤따르던 무리의 선두에 있던 율리아가 빠르게 유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걸로 2층은 끝인 건가?”
“어, 다 돈 거 같다.”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를 보고 율리아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제 이런 방식으로는 힘들어.”
유리 일행이 기수 구조 작업에 나선 지 2시간여.
그 짧은 시간에 2층 전역을 전부 돌 수 있었던 건 2층이 1층에 비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2층까지 내려온 기수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여 지금까지는 유리를 비롯해 빠른 기동력을 지닌 이들이 먼저 움직여 구조 활동 및 길을 트고, 일정 거리 밖에서 율리아가 구조한 사람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방식을 고수했었다.
하지만 점점 구조한 이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방식이 한계를 맞이했다.
“이대로는 우리가 네 속도를 못 쫓아가. 그리고 모인 인원에 비해 통로가 너무 협소해. 만약 습격이라도 당했다가는 대형 참사가 일어날 거야.”
“알고 있어.”
“또, 지하 2층에 이 정도밖에 없다면 나머지는 죄다 1층에 있다는 소리인데…….”
“그 많은 인원을 전부 지금처럼 줄줄이 끌고 다닐 수는 없겠지.”
“그래.”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무섭게 그녀의 눈이 반짝였으니.
“그럼, 방법을 바꿔야겠는데…….”
율리아는 유리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너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라고 묻는 듯한 눈빛에 유리는 피식 웃었다.
“1층으로 갈 거다.”
“그리고?”
“주둔지를 만들어야지.”
그 말이 정답이었던지 율리아의 입꼬리가 환한 곡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