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1
30화. 반신 (3)
고개를 틈과 동시에 레이첼은 볼 수 있었다.
백경의 뒤편 저 멀리.
가히 폭포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물보라를 동반한 채 다가오는 한 척의 나룻배를.
‘…뭐?’
레이첼의 사고가 정지됐다.
순간적으로 오류가 발생한 그녀의 뇌는 매우 힘겹게 자신이 본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바로…….
‘백경이… 따라잡히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라 자신하던 백경이 볼품없는 나룻배에 따라잡히고 있다는 사실을.
‘마, 말도 안 되는?!’
레이첼이 강하게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에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킨 나룻배는 백경의 바로 뒤편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부화와와와아아아아앙! – 쌔앵!
무려 10m 높이에 달하는 물보라를 뿌리며 두 척의 백경 사이를 지나갔다.
후드드드드-.
나룻배가 일으킨 물보라가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레이첼의 머리를 적셨다.
“어……?”
“그…….”
물벼락을 맞았지만, 레이첼과 승조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멍하니 나룻배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경악하고 말았다.
‘버, 벌써 저만큼이나!’
조금 전 옆으로 지나친 것 같건만 나룻배는 어느새 족히 200m는 멀어져 있었다.
정말이지 경악스러운 속도.
그리고 괴상한 나룻배가 도망치고 있던 수적선에 가까워진 순간.
“어디 느려 터진 잡것들이 이 어르신의 앞에서 알짱거리느냐? 썩- 꺼져라!”
번쩍-.
우렁찬 외침과 함께 새하얀 빛이 뿌려졌고.
쩌적-.
거대한 수적선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으아아악!”
“크악!”
살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수적들.
부화와와아앙!
반으로 쪼개지는 수적선 사이로 나룻배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
남은 건 기괴한 나룻배가 만든 물거품과 완파된 수적선의 잔해.
그리고.
“흐하하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아아아아!”
광기로 가득한 메아리뿐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레이첼이 쥐어짜듯 의문을 토해 냈지만, 이에 답을 줄 존재는 없었다.
모두가 그저 이미 작은 점이 되어 버린 나룻배를 홀린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백경을 앞지르고 수적선까지 갈라 버리며 사라진 의문의 나룻배 붕붕이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붕붕이를 밀던 유리는 강물 위에 시체처럼 누워 하늘을 바라는 중이었다.
‘더는… 못 가… 때려죽여도 못 가…….’
밤잠을 포기하고 내달린 게 며칠이던가.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진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유리의 눈에는 허망함이 깃들어 있었다.
“헤…….”
그는 웃었다.
새하얀 재가 되어,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날릴 듯한 미소.
사실 유리는 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헤헤헤…….”
헤픈 웃음에 허탈한 음성이 섞여 나왔다.
“글렀네……?”
입도일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하루하고 반나절.
그리고 요람까지는…….
“헤헤헤헷.”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꼬박 3개월이 걸릴 거리가 남아 있었다.
“헤헤…흐헤헤!”
모든 것을 포기한, 실성한 웃음소리에 맞춰 유리가 물살에 떠내려갔다.
동동동-.
물살에 떠내려가는 유리를 붙잡은 건 그의 허리에 메인 밧줄이었다.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물살을 거스르며 유리가 딸려갔다.
촤아악-.
그 끝을 쥐고 있는 건 요한이었다.
“허허, 월척이로구나.”
마치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꺼내진 유리.
흐느적 흐느적-.
나룻배로 건져진 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유리는 마치 한 마리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거렸다.
그 기괴한 모습에 요한이 인상을 팍 썼다.
“뭐 하는 게냐?”
요한의 물음에 유리가 꿈틀대며 답했다.
“영감…….”
“왜.”
“난… 그른 거 같아.”
“넌 원래 글러 먹은 놈이었다. 그나마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만든 게 바로 이 몸이시고.”
“…염병할 영감탱이. 지금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이제는 대거리할 기운도 없었기에 유리는 그저 요한으로부터 등 돌려 누울 뿐이었다.
“다 틀렸어… 전부 글렀어…….”
무릎을 끌어안고 나룻배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유리.
벽을 보며 꿍얼거리는 그 모습은 심히 궁상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람 입도라는 목표로 죽을 둥 살 둥 헤엄쳐 왔건만, 모든 게 허망하게 바스라졌으니 아무리 유리라고 해도 상심이 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나… 요람 들어가고 싶었는데… 근데 못 들어가네? 헤헤, 헤헤헤…….”
이제는 아예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니 유리의 등이 작게 들썩였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의 눈에 즐거움이 깃들었다.
‘크흘흘, 이쯤이면 됐나?’
더 괴롭혔다가는 애가 울지도 몰랐다.
‘…이미 울고 있나?’
벽을 보고 어깨를 들썩이는 꼬락서니가 정말 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요한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휘릭 휘둘렀다.
그러자 나룻배 붕붕이가 물살을 헤치며 강기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탁-.
붕붕이가 뭍에 닿자 폴짝 뛰어내린 요한이 말했다.
“내려라.”
이에 유리가 고개를 살짝 들고 요한을 흘깃거렸다.
“똥 싸러 가?”
“…….”
“아니면 작은 거? 근데 나는 왜? 같이 싸러 가자고?”
유리가 그리 묻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요한이 나룻배에서 내린 건 ‘싸러 갈 때’를 제외하고 없었으니까.
유리의 질문에 요한이 인상을 썼다.
“그런 거 아니니까 내려라.”
“왜?”
나룻배에서 내릴 생각은 안 하고 질문만 던지는 모습에 요한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훙-.
“으앗!”
작은 돌풍이 일며 유리가 휘릭 요한의 손에 딸려 나왔다.
나룻배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유리.
“아그그, 허리야.”
그가 허리를 두드리는 사이, 요한은 나룻배를 쓰다듬었다.
“허허, 그간 고생했다. 이제 너는 네 자유를 찾아 떠나거라.”
그리 말하며 요한이 붕붕이를 밀었다.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붕붕이를 보며 요한이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손을 휘휘 내저어 주며 배웅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에 유리는 드디어 요한이 미쳤겠거니 싶었다.
‘아니, 원래 미쳐 있었는데 오늘따라 상태가 더 안 좋은 건가?’
멀뚱히 요한을 바라보던 유리는 무언가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가만… 고생은 내가 했는데 왜 붕붕이가 격려를 받아?’
밤낮으로 나룻배를 민 건 난데?
유리의 입술이 슬며시 튀어나오려는 찰나.
스륵-.
요한이 유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뒷짐을 진 요한이 주저앉아 있는 유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유리를 내려다보며 요한이 입을 열었다.
“아마, 요람에 들어가기 전 이게 마지막 수업이 될 거 같구나. 뭐, 그래도 자주 보기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내가 네놈 옆에 항시 있을 수는 없겠지.”
“무슨 소리야?”
“집중해서 들어라.”
요한의 진지해진 모습에 유리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배움의 시간만큼은 유리도 늘 진지하게 임했다.
유리가 허리를 곧추세우는 사이 요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인 9단과 명인. 그 둘의 차이는 영혈의 개방과 화신의 구현이다.”
유리 역시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다시금 들으니 와닿는 느낌이 달랐다.
‘비정상적인 영혈과 화신…….’
요한은 자신을 보고 비공인 1급 정도의 실력이라 말했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수련을 한 시간을 생각해 봤을 때 터무니없는 경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공인 1단도 되지 못한 풋내기.
그게 자신의 현 상태였다.
그런 풋내기가 명인의 전유물이라는 화신을 사용했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이제는 실감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갑자기 요한이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의문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그건 왜?”
“보통 차분히 단계를 밟아 온 이가 영혈을 개방하였다면 처음 구현한 화신일지언정 뚜렷한 형상을 지니고 구현된다. 그런데 네놈의 화신은…….”
“…….”
“화신이라 부르기 우스울 정도로 조악한 검은 덩어리일 뿐이었지.”
요한이 ‘검은 덩어리’를 입에 담은 순간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귓불을 매만졌다.
손끝에 걸리는 딱딱한 감촉.
그건 대련 내기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랄프에게 받았던 샤리라는 하늘색 보석이었다.
본격적인 수련에 앞서, 요한은 이 샤리를 귀걸이로 만들어 유리에게 건네주었다.
[이 샤리의 힘이 네 영혈을 틀어막아 내가 없어도 마나를 쌓을 수 있게 도와줄 거다. 또한 이건… 네 속에 깃든 그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기도 하지.]과거 유리는 자주 악몽을 꾸었다.
자신이 검은 괴물이 되어 날뛰며 진득한 피를 뒤집어쓰는 꿈.
이는 요한을 만나서도 계속된 현상이었다.
하지만 샤리 귀걸이를 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악몽을 꾼 적이 없었다.
상황이 나아진 건 확실하나 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덩어리의 괴물이 여전히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만약 샤리 귀걸이가 없다면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리란 것을 말이다.
유리가 귀걸이를 만지는 것을 본 요한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네 화신이 제대로 형상을 갖추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냐?”
질문을 들은 유리는 귀걸이에서 손을 떼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글쎄? 내가 이상한 놈이라서? 남들은 차곡차곡 쌓아 올린 토대로 영혈을 열고 화신을 구현하는데 나는 그 과정을 전부 건너뛰었잖아?”
“호오?”
“아마 화신을 구현하는 과정이 비정상적이라 비정상적인 화신이 생겨난 게 아닐까?”
“그럼 다른 이들이 쌓아 올린 토대가 뭘 거 같으냐? 대체 무엇을 토대로 쌓아 올려야 정상적인 형상을 지닌 화신을 구현해 낼 수 있다고 보냐?”
“…….”
이번 질문에 유리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의 이번 질문은 어느 누군가에는 모든 걸 바치고서라도 듣고 싶은 답일지 몰랐다.
그 정도로 난해한 문제였다.
따라서 요한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어린 천재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기다렸다.
그사이, 유리의 머릿속에 수많은 선택지가 오갔으니.
‘토대, 토대라…….’
육체에 쌓아 올린 정순한 마나가 토대일까?
혹은 수양하여 얻어 낸 정신력?
아니면 지식과 지혜?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을 겪으며 얻은 경험?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 끝에.
고민이 이어지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유리의 붉은 입술이 마침내 달싹였다.
“바람… 아닐까?”
바람(wish)이란 유리의 답.
이를 들은 순간, 요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바람?”
“응, 혹은 소망? 원하는 거? 대충 그런 느낌이랄까?”
“왜 그리 생각했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과연 어떤 걸 토대로 쌓아야 할지.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 봤어. 내가 처음 화신을 꺼냈을 때가 어땠는지.”
이는 다른 이들은 쓸 수 없는.
오직 비정상적이긴 하나 이미 영혈이 열려 있고, 화신을 꺼내 본 유리만이 접근할 수 있는 문제 풀이 방식이었다.
요한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땠냐?”
“내가 처음 화신을 꺼냈을 당시, 그때의 난…….”
유리가 화신을 처음으로 꺼낸 건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 짓밟히던 날이었다.
유일한 안식처가 불타고, 알고 지내던 이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유리는…….
“…세상 모든 걸 죽이고 싶었어.”
유리는 자신이 품은 검은 괴물이 어린 시절의 살의가 빚어낸 괴물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성숙하고 미욱했던 살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한부 삶을 깨달으며 흩어졌다.
살의보다는 생존의 욕구가 더욱 커진 거다.
“내 첫 바람은 누군가의 죽음이었어. 그런 바람에서 태어난 내 화신은 살의가 사라지며 완성되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덩어리진 형상으로 남게 된 게 아닐까?”
제 생각을 담담히 말하며 유리는 요한을 응시했다.
이 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그가 요한이 알려 주길 바라며.
이에 요한은 눈웃음 지었다.
“그러냐?”
“내 생각이 맞아?”
“글쎄다? 맞을까? 아닐까?”
“……?”
잘 나가다가 이게 뭔 개똥 퍼먹는 소리냐는 듯한 유리의 표정.
이를 마주한 요한이 히죽거렸다.
“누군가는 일평생을 바쳐 가며 얻고 싶어 하는 답을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니냐?”
“…그럴 거면 뭐 하러 물어봤어?”
“왜긴, 이 질문이 네놈에게 주는 숙제니까 그렇지.”
“…….”
“어디 한번 열심히 고심해 봐라. 과연 어떤 걸 쌓아야지 네놈의 화신이 제대로 된 형상을 지니게 될지. 그게 과연 네가 말한 ‘바람’이란 게 맞을지.”
“…객관식으로 답 알려 주면 안 돼?”
“객관식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니면 힌트라도.”
“쯧,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이건 네놈 혼자서 풀어내야만 의미가 있는 숙제니.”
“쳇.”
요한이 던진 ‘화신을 만들어 내기 위한 토대’란 화두.
이는 유리가 어쩌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일지 몰랐다.
홀로 풀어 내야지만 의미가 있는 문제.
때문에 요한은 화두만 던질 뿐 유리가 스스로 답을 구하길 원했다.
다만…….
“뭐, 힌트는 못 줘도 이 숙제를 풀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는 알려 줄 수 있지.”
“보상?”
보상이란 소리에 유리의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