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26
325화. 보물 창고 (2)
어둠에서 나타난 노인은 요한이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를 보고 유리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저 꼬질꼬질한 모습이 이리도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이것도 3년 만이니까 반가운 거겠지?
그런 생각에 그는 다시금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요한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 유리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졌다.
“뭐야, 영감 왜 이렇게 비쩍 곯았어? 엄청 작아졌네?”
그런 유리의 물음에 탁한 고성이 터져 나왔으니.
“옘병, 내가 작아진 게 아니라 네놈이 무식하게 커진 거다!”
짜증 난다는 얼굴로 유리를 올려다보는 요한.
그 모습에 유리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노친네가… 이렇게 작았던가?’
예전에는 그토록 커 보였었는데.
이는 단순히 자신이 키가 컸기 때문에 작아 보이는 걸까?
아니면 조금씩 요한의 강함을 따라잡고 있기에 그토록 커 보이던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유리는 버럭 성질을 내는 요한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내가 돌아온 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안 그래도 수료까지 한 달 정도가 남은 시점.
요한에게 어찌 연락을 취해야 할지 고민했던 유리였다.
그러니 요한이 때맞춰 찾아온 것에 신기한 건 당연지사.
그런 유리의 물음에 요한은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콧방귀를 꼈다.
“어떻게는 뭘 어떻게냐. 그냥 나도 요람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네놈이 나타난 걸 알게 된 거지.”
이에 유리가 요한의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되물었다.
“볼일? 영감이 요람에?”
“것보다, 어떻게 된 거냐. 3년 동안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야 기어 나온 게야?”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요한.
하지만 유리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니, 정확히는 자랑할 게 너무 많아서 요한이 말을 돌린 걸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게 옳았다.
“아, 영감. 잘 들어 봐. 내가 3년 동안 뭘 했냐면……!”
유리는 요한에게 지난 3년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친구들에게 했던 이야기보다 더욱더 자세히.
오히려 그들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새하얀 괴조를 화신으로 부리는 명인이라…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화신 덕분이지.”
“역시 귀걸이를 뺀 게로구나.”
“그 상황에서 안 빼고 배겨?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누가 뭐라더냐? 그런데 이제는 화신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응. 아무리 불러도 안 나타나더라고. 원인이 뭘까?”
유리의 질문에 요한의 미간이 살짝 모여들었다.
‘진명로를 먹고 화신이 변하였다고 했던가.’
여러모로 일반적인 화신과는 동떨어진 유리의 화신.
이에 요한은 깊이 고민하여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네놈의 화신은… 우화 단계에 들어간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우화 단계? 그거 벌레가 번데기에서 껍데기 벗는 거 말하는 거 아냐?”
“그래, 맞다. 네놈의 화신도 지금 그런 번데기 상태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녀석의 모습은 분명 달라져 있었는데? 그럼 이미 변태 과정을 마친 거 아닌가?”
“네놈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명인들과 그 경우가 다르다. 그러니 너에게 일반적인 상황은 맞지 않겠지.”
요한은 마저 설명을 이었다.
“이건 내 생각이다만… 어쩌면 나를 포함한 다른 명인들도 너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너와 다른 점은 영혈이 닫혀 있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영감 말은… 일반적인 명인들이 영혈을 뚫는 사이, 화신이 우화 과정을 끝내고 완전체가 된다는 거야?”
“혹은 영혈을 뚫어 내는 과정이 화신의 번데기를 벗겨 내는 일일지도 모르고.”
요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리가 물었다.
“그럼, 이제 난 뭘 하면 좋은 건데?”
그 물음에 요한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이놈이 날로 먹으려 드네?”
“내가 뭘?”
“잊었냐? 요람에 들어오기 전 내가 네놈에게 내준 숙제가 뭔지를?”
“숙제? 아!”
유리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을 해 보였다.
‘맞네, 그랬었지.’
확실히 기억났다.
[어디 한번 열심히 고심해 봐라. 과연 어떤 걸 쌓아야지 네놈의 화신이 제대로 된 형상을 지니게 될지]과연 자신이 무엇을 토대로 쌓아야지, 남들과 같은 화신을 만들 수 있을지.
그걸 찾는 게 바로 요한이 내준 숙제였다.
유리가 기억난 듯싶어 보이자 요한이 혀를 찼다.
“쯧, 운 좋게 네놈의 화신이 변하기는 했다만… 넌 아직 그 원인조차 모르고 있지 않더냐?”
“…그렇기는 하지.”
“그러니 마저 찾아봐라. 어째서 너의 화신이 그리 변한 것인지. 그 이유를 찾아야지만…….”
요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비로소 그 힘이 온전히 너의 것이 될 테니.”
그 당부에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요한이 눈에 힘을 풀었다.
“그래서… 추락한 뒤로는 어떻게 된 거냐?”
“아 맞다!”
유리가 환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스르륵-.
허공에서 생겨난 황금빛 칼.
아니, 정확히는 토막 난 검에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뭐냐?”
“크흐흐. 이건 말이지…….”
가슴을 쭉 편 유리가 기고만장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렇게 마침내 오른이의 이야기를 꺼내니 요한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른팔 하나가 둥둥 떠다닌다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이건만… 마나 로드까지 가르쳐 줬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마나 로드의 체계였다.
“허… 2개의 마나 핵을 다루는 마체술이라니. 심지어 그중 하나는 영혈의 마나 핵이라고?”
일평생 마체술을 다루고, 수많은 마체술을 접해 온 그였지만 그러한 유형의 마체술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여 유리를 바라보는 요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너… 알고 있는 게냐?”
“뭐가?”
“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는 애초부터 영혈에 존재하는 마나 핵을 위한 운용법이다.”
“이야, 그걸 벌써 눈치챘어?”
“그리고 그건… 네놈처럼 날 때부터 영혈이 열린 이들이 존재하였다는 뜻이기도 하지.”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알고 있겠구나.”
“뭘?”
“그 정도의 특이한 체질이라면 분명 혈족을 통해 계승되었을 거다. 다시 말해… 그 능력을 좇다 보면 네 뿌리를 알 수 있다는 거다. 너의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
요한의 이야기에 유리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난 또 뭐라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부모 이야기를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하고 있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은 유리는 화제를 전환했다.
“아, 그리고… 영감 이게 혹시 무슨 글자인지 알아?”
그러면서 그는 바닥에 오른이가 마지막으로 쓴 글자를 적어 나갔다.
이를 유심히 본 요한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호오? 이게 뭐냐?”
“영감도 모르는 글자야?”
“아니, 난 알고 있지. 다만 이 글자를 어디서 봤냐고 묻는 게다.”
“아, 그 글자가 이거 이름이래. 오른이가 알려 줬어.”
그리 말하면서 유리는 요한에게 토막이 난 검을 들어 보였다.
이에 요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으니.
“왜? 뭔데?”
유리의 재촉에 요한이 입을 열었다.
“이 문자는… 고대 동방 문자의 진본이다.”
“진본?”
“지금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고대 동방의 문자는 오랜 세월 속에 조금씩 변형되어 온 것들이다. 때문에 그 원형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지.”
“그럼 영감을 이걸 어떻게 알아본 건데?”
“레드너 가문의 마체술 역시 고대 동방의 진본으로 적혀 있으니까. 많이는 몰라도 어느 정도 읽을 수준은 된다. 특히 이런 간단한 문자라면 말이지.”
그러면서 요한은 유리가 적은 글자를 톡톡 가리켰다.
이에 유리가 어서 알려 달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요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월루(月淚).”
“월루?”
“달의 눈물이라는 뜻이다.”
“달이 눈물…….”
요한의 설명에 유리는 ‘달의 눈물’을 연신 되뇌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릿속에 새기듯 황금빛 검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를 거둬들였다.
스르륵-.
삽시간에 액체로 화해 사라지는 검.
방금 막 이름을 알게 되었음일까.
그 황금빛의 액체가 이제는 정말로 달의 눈물처럼 보였다.
그렇게 유리가 월루를 흡수한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툭-.
“마셔라.”
유리의 무릎 앞에 병 하나가 놓였다.
“…응?”
자신이 준 술병을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는 유리를 보고 요한이 뚱한 눈빛을 보냈다.
“안 먹고 뭐 하냐?”
“이걸 왜 먹어야 하는데?”
“축하주다.”
“뭔 축하주? 뭘 축하하는 건데?”
“네놈의 생환? 그게 싫으면 성인이 된 걸 축하하는 거라고 하자. 이미 2년이나 지났지만.”
“흠…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이 이유, 저 이유 가져다 붙이는 느낌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에라이, 새꺄! 어른이 주면은 그냥 주는 대로 좀 처마셔라! 처음 먹는 것도 아니면서!”
“처음인데?”
“응?”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유리가 덤덤히 말했다.
“나 처음이라고.”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이다?”
“응.”
“…왜?”
“술은 원래 성인이 되어야 마실 수 있는 거잖아?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는 건 못된 짓인데?”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네놈 새끼 입에서 그딴 말이 처나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던 놈이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그런 요한의 어이없다는 시선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솔직히 말하면… 언제 뒈질지 모를 몸뚱이 탓에 골골대고 있는데 술 같은 걸 입에 댈 생각이 들었겠냐고.”
시한부 삶을 살던 어린 시절에는 몸에 좋은 것만 찾아 먹고 다니기도 바빴다.
또한 워낙에 술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인간들을 자주 봤기 때문일까.
제어력을 잃게 만드는 술을 본능적으로 멀리해 왔었다.
혹여라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괴물이 튀어나올까 봐서.
하지만.
‘…이제는 괜찮겠지.’
시한부를 벗어난 지 오래됐고.
이제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괴물이 튀어나올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녀석이 튀어나오면 영감탱이가 알아서 해 주겠지.’
눈앞의 노인네라면 자신이 작정하고 화신을 풀어놓아도 알아서 정리해 주리라.
하여 유리는 난생처음으로 술이란 것을 먹어 볼 생각이었다.
이에 살짝 심장이 두근거렸다.
‘뭔가… 어른이 된 기분이네.’
분명 나이상으로는 성인이 지나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딱히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어른들만 마시던 술을 처음으로 마시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런 유리의 기분을 눈치챈 것인지 요한이 피식 웃었다.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다. 그러니 한 모금 쭉 들이켜 봐라.”
“영감.”
“왜.”
“새거 없어? 이거 영감이 먹던 거 아냐?”
“이 새끼가…….”
유리는 부들부들거리는 요한을 보고 킬킬거리고는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뜨겁게 목구멍을 달구는 액체.
그러나 유리는 멈추지 않고 이를 들이켰다.
꼴꼴-.
제법 시원하게 술을 들이켠 유리가 술병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요한이 킬킬거렸다.
“처음이라면서 제법이로구나. 그거 꽤나 독한 놈인데?”
“마실 만한데? 좀 목구멍이 뜨겁기는 하지만.”
“클클, 이딴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 거냐? 처음 마시는 놈들은 죄다 그딴 소리를 하더만.”
“그래? 난 오히려 왜 마시는지 알 거 같은데.”
“왜?”
“맛있는데? 맛으로 먹는 거 아냐?”
“…정말? 그게 맛있다고?”
“응. 달달한데?”
그의 답변에 요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너, 정말 처음 마시는 거 맞냐?”
“맞다니까.”
“흐음…….”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던 요한이 이내 다시 피식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넌 주당이 될 운명인 모양인가 보다. 그 싸구려 독주를 맛있다고 하다니.”
“원래 술맛이 다 이런 거 아냐?”
“세상 모든 술이 맛있다면 주당이란 말이 왜 있겠냐. 너도 나도 술맛을 즐길 터인데.”
그리 말한 요한의 얼굴에 한 줄기 추억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지. 술맛도 모르면서 주당을 자처하며… 회동도 만들고.”
“회동? 영감이 그런 걸 주최했다고?”
“클클, 들어 본 적 없는 게냐? 원 없이 마시고픈 주당들의 회동이라고 해서 내가 요람에 다닐 적에는 꽤 유명했던 모임이다만?”
“영감이 다니던 때가 언제 적인데 그런 게 아직도 남아 있으려고. 아니, 그것보다… 술? 지금 요람에서 술을 마셨다는 거야? 그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건데?”
“흘흘, 예나 지금이나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구해지는 법인 게다. 킬킬킬.”
“뭐, 그래. 그건 그렇다 쳐도 성인도 안 된 애들이 그렇게 모여서 술 마시는 게 그리 건전해 보이지는 않는데?”
“…건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네놈의 새끼한테 불건전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어허! 내가 네놈 같은 줄 아느냐! 당연히 회동에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은 18세 이상의 성인으로 정해 놓았었지!”
“그거 분명 상황 모면하자고 방금 지어낸… 어?”
역정을 내는 요한을 게슴츠레 바라보던 유리.
그런데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에 들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가입 조건? 18세 이상의? 성인?’
거기까지 떠올린 유리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영감! 아까 그 회동 이름이 뭐라고 했지? 원…….”
“원 없이 마시고픈 주당들의 회동?”
“원 없이 마시고픈 주당들의 회동… 원 없이 마시고픈 주당들의 회동…….”
요한의 말을 조용히 되뇌던 유리에게서 작은 중얼거림 한마디가 흘러나왔으니.
“…원주회?”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