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28
327화. 종료 (1)
요한은 멍하니 철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실이었구나.’
솔직히 유리에게 원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쉬이 믿기지 않았었다.
자신이 반 장난삼아 만든 모임이 명문가 자손들의 배나 불리는 그런 모임이 되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치부했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사실이었다는 증거가 눈앞에 버젓이 나타났다.
“이야, 야무지게도 모아 뒀네.’
그런 유리의 말마따나 철문 안 공간으로부터 진한 약 향이 흘러나왔다.
‘내가 있던 시절보다 더 공간이 넓어졌군.’
그저 몇몇이 모여 술이나 마시던 공간은 확장 공사를 한 것인지 몇 배나 넓어져 있었고.
조잡한 탁자만 존재하던 공간에는 수십 개의 선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선반의 층층에 온갖 물건이 놓여 있는 건 당연지사.
이를 본 요한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겐가…….’
유리와 투덕거리며 이곳까지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장난스럽게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요한은 유리의 추측이 틀렸기를 원했다.
‘이제 이 요람엔 나와 관련된 장소는 남지 않은 게로군…….’
애초에 5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추억 어린 장소가 남아 있기를 바란 것이 욕심이었을지도.
애써 그런 생각으로 씁쓸한 감정을 털어 내는 사이.
“흐흐흐.”
유리는 눈깔이 살짝 뒤집혀 기괴한 웃음을 흘려 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자루들을 요한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건 대체 또 언제 챙긴 거냐?”
“이 또한 이 직종의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면서 유리는 요한에게 자루 중 하나를 건넸다.
“일단 분배는 나중에 따로 할 테니까 눈에 보이는 족족 집어넣어.”
“…이거로 되겠냐?”
“걱정 마, 자루 몇 개 더 있으니까.”
그러면서 유리는 다소 볼록해 보이는 배를 툭툭 두들겼다.
아마도 거기에 자루를 돌돌 말아 넣은 모양.
그렇게 요한에게 자루는 넘긴 유리가 아낌없이 조언을 날렸다.
“공간이 모자랄 거 같으면 무조건 비싸고 좋아 보이는 것부터 먼저 챙겨!”
“…알았다.”
“혹여라도 딴 주머니 찼다간…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야.”
눈을 부라리며 경고를 하는 것까지 잊지 않은 유리.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요한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신이 나서 자루에 이것저것을 집어넣는 유리를 보고 그제야 움직였다.
가만히 서 있다가는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말이다.
이후 요한도 서둘러 원주회의 보물 창고를 돌며 쓸 만한 것들을 보이는 족족 자루에 집어넣기 시작했으니.
자루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본 요한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많기도 하구나.”
선반 곳곳에는 각종 비약과 영약, 혹은 그 재료가 되는 것들이 아주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야, 특급이다! 특급!”
저쪽에서 유리가 환호성을 내지르는 걸 보니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도 있는 모양.
그렇게 한참 동안 창고를 돌며 자루를 채워 가던 요한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고 보니…….’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이쯤이었던가?”
그리 중얼거리며 그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자신의 기억과 달라진 공간.
최대한 위치를 가늠해 본 요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흙이 아닌 석재로 뒤덮인 바닥.
이후 요한은 석재 장판을 들춰냈다.
그러고는 이내 그 밑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으니.
그 옆으로 유리가 쪼르르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요한이 고작 자루의 반 정도를 채우는 사이 모든 영약과 비약을 싹 쓸어 온 유리.
자루를 3개나 짊어진 그는 요한이 하는 짓을 유심히 관찰했다.
서걱서걱-.
요한이 직접 손에 흙을 묻혀 가며 땅을 파 내려가길 몇 분.
그의 손끝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동시에 표정이 환해지며 요한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러다 마침내.
달그락-.
요한이 땅속에서 캐낸 것.
그건 바로 꽤 오래된 듯 보이는 병이었다.
이를 본 요한이 밝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이게 아직 남아 있었구나.”
자신과 관련된 것들이 전부 사라진 줄 알았건만, 아직 남아 있었다니.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 온 물건을 보며 유리가 물었다.
“뭔데 그건?”
“보면 모르냐? 술이지.”
요한은 킬킬거리며 병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와 함께 병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으니.
[세계 최강 요한 레드너.]다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구를 쓰다듬으며 요한은 피식 웃고 말았다.
“훗날… 검주를 꺾고 세계 최고가 되는 날 따려고 이곳에 묻어 두었던 술이다.”
“그걸 요람에 묻어 둔다고? 왜?”
“검주를 꺾으면 얼마든지 이곳에 드나들 수 있지 않겠냐? 그래서 이곳에 묻어 둔 게지. 나중에 검주를 꺾은 뒤, 당당히 이곳에 들어와 꺼내 가려고.”
검주를 꺾고 세계 최강이 된다면 자신을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때가 된다면 얼마든지 이 술을 꺼내 갈 수 있으리라… 그때는 그리 여겼었다.
“그런데 그걸 까먹고 있던 거야?”
그런 유리의 질문에 요한의 눈가에 씁쓸함이 번져 갔다.
“그러게… 이걸 까먹고 있었구나. 그 긴 세월을…….”
아무리 노력을 해 보아도.
아무리 발악을 해 보아도 검주를 꺾지 못했다.
점차 꿈에서 멀어진 시간이 길어지니 자연스레 묻어 둔 술병에 대해서도 잊고 지내 왔던 것.
요한은 슥슥 닦은 술을 자루 안으로 조심히 넣으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다 챙긴 거냐?”
“대충은.”
“대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주 싹 다 챙겨 놓고서는. 아무튼, 다 챙겼으면 자루 하나만 넘겨라.”
“자루는 왜?”
“내 몫을 달라는 거다.”
“여기서 분배하자고?”
“싫으냐?”
“아니, 좋지!”
자루 하나를 넘겨도 요한은 1개 반, 자신은 2개가 된다.
이걸 유리가 거절할 리 있겠는가.
그가 희희낙락 웃으며 요한에게 자루 하나를 넘겼다.
다른 2개의 자루보다 좀 작은, 그리고 어쩌면 그 내용물도 다른 자루에 비해 부실하리라.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요한은 딱히 유리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네놈도 그 많은 것을 한 번에 다 때려 먹지는 못 할 테고… 그 전부를 취하려면 며칠은 걸리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오마. 할 얘기도 있고 하니… 그동안 몸보신이나 잘하고 있어라.”
“어딜 가려고?”
“있다, 그런 게.”
어물쩍 답을 넘기며 씨익 웃은 요한은 그대로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유리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여전히 빠르네.”
그래도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격차가 큰 모양이다.
조금 전에도 요한이 사라지는 모습을 흐릿하게 본 정도가 전부.
‘그래도… 조금씩 따라잡고 있다.’
예전이었다면 흐릿한 정도가 아닌 아예 움직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요한이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좇을 정도는 되지 않는가.
유리는 그 사실에 큰 즐거움을 느꼈다.
“그나저나…….”
그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 영감탱이, 정리도 안 하고 튀었네?”
파 놓은 흙과 석재 장판.
아무래도 이를 정리하는 건 자신의 몫인 듯싶었다.
* * *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어느 날.
“…올해는 유난히도 눈이 잦구나.”
랄프는 열린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새하얀 눈발을 보고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살짝 위를 향했으니.
“…손님이로군.”
밀려든 먹구름은 눈만 몰고 온 게 아닌 모양이다.
손님의 존재를 눈치챈 랄프는 그대로 난로에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저 손님이라면 분명 들어오자마자 춥다고 난리 칠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러면서 두 개의 찻잔도 꺼내 놓았다.
물론 그 찻잔을 채울 술도 함께 말이다.
그렇게 랄프가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을 즘.
쾅-!
큼지막한 소리와 함께 문이 시원하게 열렸다.
“이놈아! 나 왔다!”
머리와 어깨에 소복이 눈을 쌓은 요한이 성큼성큼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흐, 춥다!”
한겨울 계곡물에 들어간다고 해도 태평할 그가 엄살을 피우며 난로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면서 랄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여기 속 뜨끈하게 만들 거 뭐 없냐?”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요한의 행동에 랄프는 익숙하게 술병과 잔을 들고 갔다.
그리고 잔을 가득 채워 건네며 물었다.
“이 날씨에 웬일이쇼?”
랄프에게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켠 요한.
“크흐-!”
독주로 인해 목구멍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 그가 입술을 한 번 훔치고 답했다.
“웬일을 무슨.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러 왔지.”
“…어디 아프오?”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이딴 개소리를 할 작자가 아닌데?
…라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읽히는 눈빛에 요한의 목소리가 대번에 퉁명해졌다.
“거, 가끔 얼굴 좀 보러 올 수도 있는 거지. 에잉, 쯧. 야박한 놈.”
“됐고, 용건이나 말하슈. 설마… 이번에도 뭘 또 뺏으러 온 거요?”
잔뜩 경계하는 눈빛에 요한의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오늘은 안 뺏는다.”
“…….”
“이 새끼가 눈깔에 힘 안 풀지? 확 씨, 그냥!”
“…….”
“안 뺏는대도! 오늘은 주러 온 거다!”
그런 요한의 말에 랄프의 눈빛이 더욱 미심쩍게 변했다.
이에 더는 설명하기 귀찮았는지 요한은 메고 온 자루에서 술병을 꺼냈다.
“받아라.”
“뭐요, 이게?”
“기억하냐? 내가 요람에 다닐 적에 만든 모임이 하나 있었던 거?”
“그걸 모를 리가. 원… 흠… 원, 뭐였는데… 이것도 나이를 먹으니 잘 기억이 안 나는구려.”
“원 없이 마시고픈 주당들의 회동.”
“아아, 그랬었지! 선배가 졸업한 다음인가 다다음 해인가 내가 회장직을 맡기도 했었고.”
그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랄프의 얼굴에도 작은 즐거움이 번져 나갔다.
이를 본 요한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모임이 아주 재밌게 변해 있더구나.”
그리 운을 뗀 요한이 자신이 보고 겪은 원주회에 관해 랄프에게 알려 주었다.
잠시 뒤.
이를 전해 들은 랄프도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 술이나 퍼마시려고 만든 그 모임이 그리 변했단 말이우?”
“그러게나 말이다.”
“흠… 설마 그 녀석 짓인가?”
턱을 쓸며 문지르는 랄프가 원주회의 변화에 무언가 감을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요한은 더는 깊게 캐묻지 않았다.
‘이젠… 나와는 연이 없는 일이다.’
추억은 추억일뿐.
요한은 더는 그 추억에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 간섭한다면 애써 찾은 추억이 흐려질 터.
하여 그는 옛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 묻어 둔 술병을 거기서 꺼내 온 것이기도 했다.
“뭐 하냐? 받아라.”
“그래서, 그게 뭔데 날 주는 거요?”
“요람을 수료할 적에 검주를 꺾으면 마시려고 그 회동 장소에 묻어 두었던 술이다.”
“…이게 말이오?”
랄프는 조심스럽게 술병을 받아 들었다.
그제야 그는 [세계 최강 요한 레드너]라는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요한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요?”
“그냥.”
그리 말하면서 요한은 자신의 찻잔에 술을 따라 빠르게 비웠다.
그러고는 어딘가 모르게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너한테 얻어먹은 술을 이걸로 갚는다고 생각해라. 아, 그리고…….”
부스럭-.
요한은 자루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이것도 받아라.”
“이거는 또 뭐요?”
“잡탕 만든다고 꿔 갔던 영약 갚는 거다.”
“그때 그거 조화신수 만들어지면 주기로 했지 않소?”
“아, 그거? 다 썼다.”
배 째라는 식으로 코를 후비적거리는 모습에 랄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조화신수를 주리라 기대도 안 했으니… 이거라도 받는 게 어디인가.’
그리 애써 자위하며 요한이 준 물건을 집어 든 순간.
랄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흐음? 이거 요람에서 만드는 비약 아닌가? 이게 어디서 난 거요?”
“어디서 나긴. 그걸 알아서 뭐 하게.”
“선배 설마… 도둑질이라도 했소?”
단숨에 핵심을 찔러 온 랄프의 말에 요한은 순간 움찔 경직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요한의 경직이 풀렸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흑검병단을 털다니!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슈!”
랄프의 외침에 묘하게 안도한 요한이 버럭 소리쳤다.
“아, 거길 털어서 가져온 거 아니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 이건 진짜 먹어도 뒤탈 없어!”
“…정말이유?”
“거, 일일이 따지지 말고 그냥 넣어 둬, 이 새끼야!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놈이라서 가장 튼실한 거로 챙겨 준 거니까!”
그리 성질을 내면서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벌써 갑니까?”
“지금부터 돌아다닐 곳 많다. 청산할 빚이 좀 많아야지.”
요한은 자신의 자루를 툭툭 두드려 보였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 그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연 순간.
“랄프.”
이놈, 저놈, 이 새끼, 저 새끼가 아닌 정확히 이름을 부른 요한.
그가 비스듬히 뒤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보면 선배가 아니라… 형님이라 불러라.”
그 말에 놀란 랄프의 눈동자가 커진 순간.
휘오오-.
조금 전까지 요한이 서 있던 문 앞에는 겨울의 찬바람이 눈송이 몇 개를 품고 회오리치고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요한.
그렇게 그가 남기고 간 술병과 비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랄프가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궤적.
이를 좇는 랄프의 눈동자에 서글픈 분노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