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44
344화. 투자 (1)
언덕 아래,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거대 도시의 광경에 유리는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네.’
그가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여러 행정구와 영지, 도시 등을 거쳤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저 거대한 도시는 지금껏 그가 본 그 어떤 곳과도 비교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델리 아가스.’
기회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고대어를 당당히 제 이름으로 삼은 도시.
그리고 용의 요람이 작정하고 만들어 낸 경제 산업 구역.
이를 향해 유리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그의 옆에 바짝 붙어 걷던 아린이 질문을 던져 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어차피 델리 아가스까지는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하여 지금까지는 그저 잠자코 유리를 따라왔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무슨 생각인 걸까?’
보통 요람을 수료한 이들의 진로는 단순했다.
가문으로 복귀하거나.
혹은 속한 세력이 없다면 유력 가문의 제의를 받아 그들의 일원이 되거나.
하지만 유리는 그 어디에도 속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곧장 요람을 떠나오지도 않았을 터.
당장 그곳에서 유리가 의탁하고자 한다면 두 팔을 벌려 환영할 이들이 널렸으니, 그들 중에 골라 갔으면 됐을 일이었다.
하여 아린은 궁금했다.
과연 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유리라면 무작정 움직이지는 않을 텐데?’
그런 아린의 질문에 유리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일단…….”
그는 즐거운 눈으로 아린과 뽀삐를 바라보았고.
“내기 결과부터 청산해야지 않겠어?”
유리의 환한 미소에 두 사람의 얼굴이 썩은 사과처럼 뭉개졌다.
***
델리 아가스의 상점 거리.
그곳에는 15년 된 작은 옷 가게 하나가 있었으니.
복마전과 다를 바가 없는 델리 아가스의 상점 거리에서 작은 상점으로 15년 가까이 장사를 이어 왔다는 건 그만큼 안목과 수완이 좋다는 의미였다.
그 상점의 주인이 최고로 삼는 장사 수완이자 덕목은 손님의 기분을 추켜세워 주는 일이었다.
손님이 고른 옷이 우스꽝스러울지라도, 절대 먼지 한 톨의 내색조차 없이 최선을 다해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광대가 아플 정도의 미소를 장착하는 능력까지.
그것이 의류 판매점의 주인이 15년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런데 의류점의 주인은 실로 오랜만에 그런 아부와 거짓 미소가 필요 없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머… 세상에!”
거짓된 아부 대신 튀어나오는 건 진심이 듬뿍 담긴 감탄사뿐.
그런 점주의 앞에는 화사함을 뽐내는 푸른 머리의 미녀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다.
발목이 살짝 드러난 편한 바지.
살짝 두꺼운 블라우스에 가죽조끼.
솔직히 그녀가 고른 의복들은 예쁘기보다는 활동성에 특화된 옷들이었다.
하지만 미녀가 걸치니 그 또한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보다도 점주를 넋을 빼게 만든 건 미녀 옆에 선 청년이었다.
흰 셔츠와 온통 검은색의 평상복.
거기에 검은 옷 곳곳에 들어간 황금빛 자수가 그의 황금빛 눈동자와 어울려서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십수 년 장사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난 점주로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미남미녀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점주 입장에서만이었나 보다.
아린은 유리가 고른 옷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럴 거면 옷을 뭐 하러 사 달라고 한 거야?”
지겨운 훈련복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싶다더니, 지금 유리가 걸친 옷은 훈련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얀 셔츠에 약간의 자수 무늬가 들어간 것을 빼면 말이다.
이에 유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라고?”
“으으!”
분하다는 듯 부들거리는 아린을 뒤로하고 유리는 점주를 향해 말했다.
“지금 입을 거랑 똑같은 거로 한 벌 더 주세요. 계산은 쟤들이 할 겁니다.”
“…….”
“아줌마?”
“아… 예!”
유리의 부름에 그제야 화들짝 놀라서 부랴부랴 옷들을 챙기는 점주.
거기에서 신경을 끈 유리는 뽀삐를 바라보았다.
“넌 옷 필요 없냐?”
요람에서 가져온 훈련복을 여전히 입고 있는 뽀삐가 어깨를 으쓱였다.
“배고프다.”
“여긴 너무 비싸대.”
“배고프다.”
“자긴 어차피 옷이 자주 찢어져서 이런 비싼 옷을 살 필요 없다네?”
“배고프다…….”
“잘 늘어나고 안 찢어지는 옷이 존재했으면 좋겠대.”
아린의 통역을 들은 유리는 뽀삐를 조금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요람 시절에도 누구보다 자주 훈련복을 갈아 치운 게 바로 뽀삐였다.
거인화만 했다 하면 툭 하고 찢어 먹으니 말이다.
아마 건량을 사 먹는 거 다음으로 뽀삐가 가장 포인트를 많이 소모한 게 훈련복이었을 거다.
‘쟨 앞으로도 옷값이 꽤 들어가겠네.’
물론 그걸 자신이 신경 쓸 건 아니었지만.
자신은 내기 보상만 챙기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유유자적, 싱글벙글 웃으며 옷 보따리를 챙겨 의류점을 나선 유리.
그는 뒤에 선 아린과 뽀삐를 보며 물었다.
“그래도 제법 돈이 있었나 보다?”
요람에 들어갈 당시, 거지나 다름없는 꼴에 고작 검 한 자루가 전부였던 유리.
그가 수료하며 가지고 나온 것도 훈련복과 검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그와 달리 아린과 뽀삐는 요람에 들어가며 맡겼던 짐들을 돌려받으며 수중에 금전이 제법 있었다.
다만.
“꽤 있었지…….”
“배고프다…….”
뽀삐와 아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홀쭉해진 주머니를 흔들었다.
잘그락잘그락-.
묵직했던 주머니의 소리가 확연히 가벼워졌다.
이를 본 유리가 웃으며 물었다.
“아직 좀 남았지?”
“응.”
“그럼 따라와.”
“어디 가는데?”
새 옷을 입고 먼저 앞장선 유리가 질문에 답을 줬다.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볼일만 보면 되도록 빠르게 떠날 생각이야.”
“볼일?”
아린의 되물음에 유리는 우뚝 멈추어 섰다.
서서히 몸을 돌려 아린과 뽀삐를 응시하는 유리.
그의 눈빛은 요람을 떠난 이래 가장 고요했다.
“네가 물었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응, 그랬지.”
“나도 물어보자.”
“…….”
“니들, 날 어디까지 따라올 작정이냐?”
그의 진지한 물음에 아린과 뽀삐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졌다.
“…유리?”
“배고프다?”
그들은 단번에 깨달았다.
유리의 질문이 단순히 목적지를 묻는 게 아님을.
바로 자신들의 관계에 관해 묻고 있음을 말이다.
굳어 버린 친구들의 표정을 보며 유리가 마저 입을 열었다.
“난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갈 생각이야.”
“…….”
“아니, 정정할게. 난 길이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갈 거다. 아무것도 없는 울창한 밀림과 같은 곳을 헤집고, 나만의 길을 만들어서라도.”
“…….”
“그래도 따라올 거냐?”
유리의 물음에 아린 역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네가 가려는 그곳이… 어딘데?”
이에 유리는 간단히 답했다.
“정상.”
“정상?”
“검좌를 빼앗을 거다.”
유리의 답변에 아린과 뽀삐의 동공이 흔들렸다.
“…….”
“…….”
“…….”
델리 아가스의 북적이는 대로변.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갈 길을 위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그 길 위에서 유리와 아린, 뽀삐가 서로를 마주했다.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그들 사이에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아린은 유리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그 누구보다 눈부신 재능을 지닌 유리.
그런 그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유리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니 아린은 심경이 복잡했다.
‘유리는…….’
검좌 찬탈.
그 부절검 요한 레드너조차 실패한 업적.
그 말로가 어땠는지는 아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의문이 들었다.
‘유리라면…….’
과연 자신의 소중한 친구라면.
이 눈부신 재능을 지닌 천재라면 가능할까?
검좌 찬탈에 성공할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아린의 답은 ‘모르겠다’였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강렬한 욕망이 들었으니.
‘보고 싶어.’
그녀는 간절히 보고 싶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유리 홀랜드라는 존재가 정상에서 찬란히 빛나는 그 순간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다.
하여 아린은 그리 어렵지 않게 유리의 물음에 답을 줄 수 있었다.
“따라갈래.”
흔들림이 없는 아린의 목소리.
그리고.
“배고프다.”
아린과 비슷한 고민을 했던 건지, 뽀삐 역시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아린의 해석이 없어도 유리는 뽀삐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유리는 다시금 물었다.
“따라오겠다고? 개고생 길인데?”
“응.”
“배고프다.”
“후회 안 하겠어?”
“응!”
“배고프다!”
거듭되는 되물음에도 친구들이 망설임 없이 답하자 그제야 유리도 굳은 얼굴을 풀고 웃어 보였다.
“내가 말했지? 힘들다고 찡찡대면 버리고 간다고. 그러니 각오해라.”
“응응!”
“배고프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을 등지고 유리가 손짓했다.
“따라와.”
그렇게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는 유리의 뒤로 아린이 쪼르르 따라붙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는 거야?”
“아까 오면서 봐 둔 곳.”
“거기가 어딘데?”
델리 아가스가 초행이면서도 성큼성큼 거침없이 걸어가는 유리.
그는 한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며 답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신분증을 만들 수 있는 곳.”
“신분증? 그거 그냥 용패를 내면 되는 거 아냐?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각 영지와 도시를 출입하기 위해 필요한 신분증.
보통은 한 영지에서 정착하면 발급해 주는 영지민 증명패나, 어떠한 가문에 속함을 증명하는 명부패가 이에 해당했다.
또한, 요람의 수료생에게 주어지는 용패 역시 훌륭한 신분증이었다.
델리 아가스로 들어오는 데 용패를 제시했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았던가.
“델리 아가스는 요람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야. 그러니 신분증으로 용패를 제시해도 별문제가 없었지.”
“그럼 다른 곳에서는 용패를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거야?”
“아니,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다른 신분증을 만들 필요가 없는 거잖아?”
“만들어야 해. 어지간해서는 용패를 신분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니까.”
“어째서?”
“내가 먼저 말한 문제는 용패가 신분증으로 사용될 수 있냐 없냐를 따지는 게 아냐. 용패를 신분증으로 사용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문제를 말했던 거지.”
“……?”
“맛있는 냄새가 나는 요리에는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잖아?”
“아!”
“배고프다!”
그제야 아린과 뽀삐는 유리의 설명을 이해했다.
‘그 뜻이었구나! 용패의 등급이 문제였어!’
최상급인 백룡패를 가진 아린과 뽀삐.
그리고 세상에 몇 존재하지 않는 흑룡패까지.
세 사람이 지닌 용패의 등급은 하나같이 너무 높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까먹고 있었어. 용패의 원래 용도가 추천장이란 걸!’
용패는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이기 이전에 한 사람을 요람에 입도 시킬 수 있는 추천장.
높은 등급의 추천장일수록 입도생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니, 요람을 목표로 하는 가문에게 상위 등급의 용패는 귀한 보물이었다.
그리고 요람을 목표로 하는 가문의 힘과 세력이 약할 리는 없을 터.
‘괜히 용패를 아무렇게나 내보였다가는…….’
분명 이런저런 분란을 일으킬 여지가 있으리라.
‘거기다 유리의 용패는 흑룡패지.’
수많은 용패를 확인하였을 델리 아가스의 출입 관리 초병들조차 유리의 흑룡패를 쉬이 알아보지 못했었다.
이곳이 이럴진대 다른 도시나 영지는 어쩌겠는가.
유리의 용패를 알아보지 못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알아보면 그건 그것대로 난리가 날 테고.’
그제야 아린은 유리가 새로운 신분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동시에 그녀는 유리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 어디서도 통용될 수 있는 신분증이라면…….’
그만큼 공신력이 있는 단체에서 발급해 주는 신분증일 터.
아린의 머릿속으로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는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 용병 협회 – 델리 아가스 지부]‘정답!’
새하얀 건물과 깔끔한 간판.
그 이름을 확인한 아린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우리 용병 등록하러 온 거구나! 신분증을 만들러?”
아무도 답을 해 주지 않았지만, 잔뜩 신이 난 아린은 팔짱을 낀 채 흐뭇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영지나 도시 간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신분증을 비교적 쉽게 발급해 주는 게 용병 협회니까? 와아… 나 용병은 처음인데!”
기대감에 살짝 상기 된 아린을 지나치며 유리가 말했다.
“반의반만 맞았어.”
“엥? 반도 아니고 반의반은 뭐야?”
“일단 용병 등록을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야. 난 이미 용병 등록이 되어 있거든.”
“…….”
“그리고 단순히 신분증이 필요해서 너희를 용병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야.”
“그럼?”
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리가 용병 협회의 문 앞에 서며 답했다.
“말했잖아? 정상으로 갈 거라고.”
유리가 문고리를 잡으며 아린과 뽀삐를 향해 반쯤 고개를 돌렸다.
“난 용병단을 만들 거다. 그래서…….”
살짝 미소 지은 유리의 옆모습이 아린과 뽀삐의 두 눈 가득 담긴 순간.
“용병왕이 될 거다.”
유리가 힘차게 세계 용병 협회의 문을 잡아당겼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