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48
348화. 투자 (5)
검주가 쌓아 온 100여 년의 시간.
아린의 답을 들은 유리가 덤덤히 되물었다.
“어째서?”
“검좌를 얻기만 한다면 검주가 기반을 다져 온 100년의 시간만큼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검주를 꺾고 검좌 찬탈에 성공했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에서 시작한다면 검주의 업적만큼 도달하는 데 최소 검주가 쏟아부은 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검주의 모든 것, 즉, 그가 쌓아 온 시간을 고스란히 이어받게 된다면 무려 100년이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될 터.
심지어 일반적인 사람도 아니고 검주라는 희대의 절대자가 쏟아부은 100년이다.
그 가치는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리라.
하여 아린은 검주의 모든 것이 그가 쏟아부은 시간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아린의 의견에 유리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랑 생각이 비슷하네.”
“비슷? 그럼 네가 생각하는 검주의 모든 것은 뭔데?”
“검주.”
“검주?”
“배고프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린과 뽀삐를 향해 유리는 조금 더 정확히 답을 줬다.
“검주라는 이름 그 자체가 그 늙은 괴물의 모든 것일 거다.”
“그 말은…….”
“배고프다?”
어렴풋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아린과 뽀삐.
유리는 짜증 섞인 조소를 머금었다.
“검좌 찬탈? 지랄하고 있네. 내가 검주를 꺾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들, 세상 사람들은 나를 검주의 후계자쯤으로 생각할 거다.”
검주를 꺾어 봤자, 검주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기에 사람들은 유리 홀랜드란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언을 붙일 거다.
제2의 검주.
혹은 2대 검주라고.
“그게 무슨 찬탈이냐? 검좌 계승이지.”
하여 유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요한의 죽음 이후 계속된 깊은 고찰.
그 끝에 유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난 허울뿐인 찬탈이 아닌… 정말로 빼앗을 생각이다. 엔라이트 제국을 무너뜨린 검주가 황좌를 빼앗아 그만의 제국을 만들었듯이.”
“……?!”
“나 역시 검주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검좌를 빼앗을 거다.”
그건 단순히 검주 개인과의 대결이 아닌, 검주가 이룩한 거대 세력과의 싸움이 될 거다.
사실상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꼴.
하지만 이미 확고하게 결심이 선 것인지 유리의 표정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말했지? 내가 가려는 곳은 길이 없다고. 그래서 만들어 가야 한다고.”
그가 친구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이게 내가 만들어 가려는 검좌 찬탈의 길이다.”
유리의 이야기에 아린과 뽀삐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어째서 유리가 ‘검좌를 차지한다’가 아닌 ‘검좌를 빼앗겠다’라고 표현한 것인지 확실히 이해했다.
또한, 그가 어째서 그토록 과감하게 세 가지 품목에 투자를 할 수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배고프다…….’
‘유리는…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아린은 고민해 봤다.
대체 그는 언제 이런 생각을 했던 걸까.
요한의 죽음 이후 끼니조차 걸러 가며 두문불출하던 그때?
모두가 요한의 죽음으로 유리가 슬픔에 잠겨 있다고 여기던 그때였나?
그래, 아마도 필시 그때였을 거다.
다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유리는 슬픔에 잠겨 있던 게 아니었다.
‘유리 넌… 답을 찾고 있었던 거구나.’
그는 그때부터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던 거다.
자신만의 답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답을 찾았고, 굳게 결심하였으며, 확신을 얻은 거다.
안정기에 접어든 검주의 시대에 자신이 혼란의 불씨가 되리란 확신을.
“유리 네가 식량, 철, 황금… 그 세 가지를 다루는 상품에 투자를 한 것도 그래서였던 거야?”
검주로 인해 세상 곳곳에서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검주의 시대가 열렸으나.
오히려 역설적으로 검주라는 절대자로 인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정도의 거대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유리가 돌아다니며 투자를 한 세 가지 종목은 바로 그런 검주의 시대 덕분에 수십 년간 안정세를 보이는 종목들이었다.
‘유리는… 그 안전성을 노리고 투자를 한 게 아니었어!’
그는 안전성이 아닌 세 가지 종목의 공통점을 노리고 투자를 한 거였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무조건 약동하는 종목들!’
유리는 다름 아닌 자신이 만들어 낼 미래에 투자를 한 것이다.
“내가 오늘 투자한 돈은 요람의… 아니, 검주가 가진 재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겠지만…….”
유리가 미소 지었다.
“그걸로 시작할 거다.”
그의 미소에 묘한 열기가 깃들었다.
“재밌잖아? 검주에게서 받아 온 돈으로 검주를 쓰러뜨릴 기반을 마련한다는 게?”
“……?!”
유리의 미소를 마주한 뽀삐와 아린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유리와 달리, 오늘 유리의 존재감이 너무도 크고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리…….’
유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린의 두 눈에 결심의 빛이 깃들었다.
***
다음 날.
애초에 일행과 오후부터 같이 움직이기로 했기에 유리는 실로 오랜만에 늦장을 부릴 수 있었다.
화사한 햇살이 들어오는 빛의 궤적을 보아하니 이미 점심 무렵에 가까워진 모양.
“흐아아암… 음?”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던 유리는 방문 앞에 놓인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 문틈 사이로 집어넣은 듯, 바닥에 나뒹구는 쪽지.
이를 주워 살핀 유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 볼일 있어서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나 떼놓고 가지 마!!!!!!]쪽지에서 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그 녀석답지 않게 갑자기 웬 쪽지?”
원래라면 같이 가자고 찡찡 댈 녀석인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신 옆 침대에 아직도 퍼질러져 있는 뽀삐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그만 일어나 돼지 새꺄! 해 지기 전에는 다 사야 하니까!”
***
유리와 뽀삐가 숙소에서 투닥거리는 사이.
아린은 거대한 건물을 마주하고 있었다.
“후우…….”
크게 숨을 몰아쉰 그녀가 바라보는 건물은 다름 아닌 어제 다녀간 중앙은행.
이를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보던 그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린의 눈에 결연한 빛이 감돌고.
“좋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웅성웅성-.
볼일을 보는 수많은 사람을 지나친 그녀는 어제 유리가 그러했듯 한적한 직원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어김없이 들려온 사무적인 인사에 아린은 탁자 위로 은색의 패를 하나 올려놓았다.
“제 이름으로 5년 전에 맡겨 놓은 돈을 찾으러 왔어요.”
“그러시… 응?”
다시금 사무적으로 답을 하려던 직원은 아린이 올린 패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패나 용병패와는 달리 원래부터 아린이 소지하고 있던 패.
거기에 적힌 이름을 본 직원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그 설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닙니다! 돈을 찾아가신다고 하셨죠? 잠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빠르게 관련 서류를 뒤적거리던 직원은 아린이 맡긴 금액을 보고 놀라 물었다.
“이 중에… 얼마나 찾아가실 생각이십니까?”
그 물음에 아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전부요.”
“전부 말입니까?!”
“되도록 빨리 처리해 주세요. 다른 곳도 들를 데가 있어서.”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아린의 요구에 직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런 귀빈이 왜 일반 창구에서 찾고 난리야!’
신분도 신분이거니와 맡겨 둔 금액만 해도 당장 귀빈 전용 창구로 가도 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말단 직원이 뭘 어쩌겠는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일단 그래도 보고는 해야겠지?’
일정 금액 이상이 빠져나가는 건 반드시 상부에 보고를 해야만 했다.
하여 직원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졌다.
그로부터 30여 분 뒤.
은행을 빠져나온 아린은 델리 아가스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한참이나 거침없이 걸어간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투자장이 열리는 장소.
은행에서 나와 투자장까지, 아린은 어제 유리와 함께 다녀간 곳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유리처럼 가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은품을 뜯어내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확고하게 정한 것인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앞으로 향했다.
그렇게 아린이 도착한 목적지는 이번에도 어제 유리가 투자를 한 세 곳 중 하나였다.
“흐아아암… 응?”
오늘도 어김없이 지루한 표정으로 가판을 보고 있던 직원.
그는 어제 찾아온 검은 머리 청년의 일행이 등장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 투자를 했으면 철회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려면 대리인이 아니라 투자자 본인이 오셔야 하는게 예의고요.”
“네?”
“…어제 한 투자를 철회해 달라고 부탁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아닌데요?”
“크, 크흠! 그렇습니까? 그럼 무슨 일로……?”
“당연히 투자를 하려 왔죠.”
“고객님께서 말입니까?”
“네, 제가요.”
“…….”
가판의 직원은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그러고는 포기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밀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계약서부터 작성하시죠.”
“좋아요.”
밝은 얼굴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아린을 보고 직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제 그 청년이나 이 여인이나.’
정말이지 고집이 보통이 아닌 듯싶었다.
그리 만류했는데도 또 투자하러 오다니.
“다 했어요.”
“이리 주십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아린이 내민 계약서를 받아 든 직원.
그는 계약서에 쓰인 액수를 보고 눈을 끔뻑이다가 정색했다.
“…계약서에 장난을 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장난요?”
직원이 손가락으로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톡톡 두드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액수를 기재하는 건 상호 간에 신뢰의 문제를…….”
직원이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탁-.
아린이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이에 직원은 눈을 끔뻑이다가 넋 나간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채, 직원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
그건 바로 10,000골드라고 적힌 수표였다.
‘가… 가짜인가?’
설마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가짜가 아니었다.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진짜 수표가 확실했다.
그건 자신의 안목을 걸고 자신할 수 있었다.
‘진짜라고…? 지, 진짜 1만 골드라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직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고이 아린에게 돌려준 그는 후다닥 뛰어갔고 곧이어 60대의 남성과 함께 돌아왔다.
다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땀을 뻘뻘 흘리는 60대 남성은 아린 앞에 고개를 숙였다.
“기, 기다리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저는 마농가(家) 델리 아가스점의 책임자 로던 마농입니다. 오늘 투자를…….”
자신을 책임자라 밝힌 이가 구구절절 떠들어 대려 하니 아린이 손을 들어 말을 끊어 냈다.
“저 시간 없어요, 얼른 투자 절차나 마무리 지어 줘요.”
“무, 물론입죠!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왜요?”
“어째서 이런 거금을 저희 상가에 투자하시는 건지… 연유를 좀 알 수 있겠습니까?”
1만 골드.
그건 마농가 같은 대형 상가조차 무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러한 돈을 자신들의 상품에 투자를 하겠다니.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책임자의 물음에 아린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그냥… 친구를 믿고 한번 투자해 보려고요.”
아린은 친구가 만들어 갈 미래, 그 격랑에 편승해 떠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시각.
델리 아가스를 돌며 여행에 필요한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들이고 숙소로 향하는 유리와 뽀삐.
“배고프다?”
거대한 가방을 멘 뽀삐가 왜 자기 가방만 유달리 크냐는 불만 섞인 눈빛을 보내 왔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의 평범한 가방 2개를 짊어진 유리에 비해 뽀삐는 거의 사람 몸통만 한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뽀삐의 불만 제기에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야, 돈도 내가 냈는데 넌 적어도 짐이라도 많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배고프다!”
“그리고 새꺄, 우리 짐 절반 이상이 다 네가 처먹을 것들인데, 양심 있으면 짐꾼 노릇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확 씨, 굶겨 버릴라.”
유리의 엄포에 뽀삐가 콧김을 킁- 뿜어내며 소리쳤다.
“배고프다앗!”
삭-.
그러고는 유리의 짐까지 잽싸게 빼내어 자기의 양어깨에 걸치는 게 아닌가.
“배고프다아!”
“쯧.”
앞으로 모든 짐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듯 우락부락한 이두근을 뽐내는 뽀삐.
그 뻔뻔함에 유리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으니.
“너, 거기서 뭐 하냐?”
숙소의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아린은 드디어 돌아온 유리와 뽀삐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유리이이이, 뽀삐이이이! 왜 이제 와! 나 떼 놓고 간 줄 알았잖아아앙!”
양팔을 벌려 두 사람을 향해 쪼르르 뛰어오는 아린.
잘그락- 잘그락.
그런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각각 1만 골드씩을 투자했다는 3개의 증표가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
다음 날 아침.
“유리이이이이, 우리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배고프다아아?”
칭얼거리는 아린과 뽀삐를 향해 유리는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닥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