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61
361화. 필요악 (3)
지끈거리는 머리와 욱신대는 육신.
“끄응.”
안 아픈 곳이 없었기에 절로 앓는 소리를 내며 게리 도슨이 서서히 눈을 떴다.
‘여긴……?’
아직 초점이 완전히 잡히지 않아 뿌연 시야.
자신이 어딘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게리는 오히려 안도했다.
‘사… 살아 있구나.’
시력이 돌아오고 있다는 건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명백한 증거.
그 엄청난 붕괴 속에서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니, 실로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완전히 되돌아온 시력.
게리는 자신이 축축한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녀석들은?’
감옥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채 식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만 살아남은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 요란한 상황에서 제 목숨 하나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었을 테니까.
그가 그렇게 씁쓸한 얼굴이 된 찰나.
“깼어?”
갑자기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
이에 게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네놈!”
게리의 시선이 닿은 곳.
쇠창살 너머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유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대체 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간 게리는 유리의 멱살이라도 잡아 보려고 손을 내뻗었지만, 그건 그저 의미 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의 손은 유리에게 닿지 못하고 허무히 허공을 내저었다.
하여 게리는 쇠창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해 달라는 거 다 해 줬잖느냐! 그런데 뭐가 불만이어서!”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자신들을 그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단 말인가!
억울해하는 게리를 보고 유리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는 니들은 죄지은 사람만 골라서 죽이고 주머니를 털었냐?”
“그, 그건…….”
게리는 바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맞는 말이다.
산적질을 일삼은 자신이 이제 와서 무엇을 논하겠나.
‘그저 우리가… 저자보다 약하기에 당한 것일 뿐.’
그것이 검주의 시대이지 않은가.
쇠창살을 잡은 손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렇게 축 늘어진 게리가 작게 항변했다.
“난 그래도… 우리는 그리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재물은 털었어도… 최소한의 적정선은 지켰단 말이다.”
그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유리는 피식거렸다.
“남을 죽일 독심이 없었던 건 아니고?”
“…….”
“너, 겁쟁이네?”
유리의 시선이 닿자 게리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어째서인지 그에게 모든 게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
이에 주먹을 꾸욱 말아쥔 게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게 어때서! 그저 살아남고 싶어서 눈치 좀 보고 살아온 게, 뭐가 나쁘단 거냐!”
“…….”
“내가 얼마나 욕심 안 부리고 살아왔는데! 산적질을 업으로 삼은 놈 중에 나보다 소탈한 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소탈한 산적이라… 참 안 어울리는 표현이네.”
어찌나 흥분했는지 잘 익은 문어처럼 벌게진 게리의 머리.
이를 본 유리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말야… 난 너 같은 겁쟁이가 그리 싫지는 않아. 그런 놈들은 최소 자기 분수를 알거든. 선을 넘으면 제 목줄이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교육시킬 필요도 없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떠십니까?”
난데없이 던져진 물음.
이에 한쪽 어둠에서 다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흠… 산적답지 않은 자로군.”
“들어 보니, 괜찮은 거 같소.”
“난 찬성이오.”
그들은 다름 아닌 하이브 3대 가문의 가주들이었다.
“제가 그랬죠. 마음에 쏙 들 거라고?”
그들의 등장에 유리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면 게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잘 들어, 너에게 살길을 제시해 줄 테니까.”
영문을 몰라 하는 게리를 바라보는 유리의 기억이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
제법 길게 이어지는 침묵.
그 속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유리의 말을 해석하기 바빴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산적들과 전략적 제휴?’
‘지금 보상안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쉽사리 저 말의 의도가 짐작 가지 않았다.
축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유리가 뒤처리를 맡았던 두 가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살아남은 산적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건…….”
“대충 절반 정도는 될 텐데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확신에 찬 어조에 두 가주가 놀라 서로 눈을 마주쳤다.
놀랍게도 유리의 말처럼 살아남은 산적들의 수가 절반 정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걸 어찌?”
“그야 당연히 제가 일부러 그 정도만 살아남게 조절했으니까?”
“그,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함정을 설계한 것도 저고, 그 위에 산적들을 배치해 세운 것도 저니까요. 추락 깊이, 낙하 지점 등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건… 뭐, 일도 아니죠.”
유리가 무척이나 쉽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뒤처리 현장에서 온 두 가주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알론은 다른 부분에서 놀라는 중이었다.
“그대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살릴 사람은 살리고 죽일 사람만 죽였다는 말로 들리오만? 내가 정확히 들은 게 맞소?”
알론의 이야기에 좌중의 눈이 동그래졌다.
“허?”
“그렇군!”
누구를 어떻게 떨어뜨릴지 설계할 수 있다면 분명 알론이 언급한 것과 같은 일도 가능하리라.
이에 유리는 살짝 미소를 보였다.
“이해가 빠르시네요. 아니면 눈치가 빠르신 건가?”
아무래도 제리의 눈치는 부친 쪽에서 물려받은 건가 보다.
잠시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을 흐트러뜨린 유리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일부러 산적들을 절반만 남겨 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그 이유가, 산적들과의 제휴를 말하는 거고?”
“맞아.”
불쑥 끼어든 제리의 물음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알론이 미간을 모으며 질문을 던졌다.
“대체 원하는 게 뭐요? 그게 그대가 원하는 보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일단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세요. 그러면 제가 원하는 보상이 무엇인지 알게 될 테니까.”
“…알겠소.”
알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유리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 유리가 입을 열었다.
“들어 보니 이 하이브의 역사가 제법 깊다던데, 맞습니까?”
“그렇소.”
“그 긴 역사 동안 저 트위그 산맥에 산적들이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건…….”
알론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는 다른 두 가주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흠, 아마… 그런 적은 없었을 거요.”
한참 이어지던 침묵에 헌트가의 가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에 레이디버그가의 가주가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하이브라는 도시가 만들어지게 된 발단도 트위그 산맥에 자리 잡은 산적 때문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200여 년 전.
트위그 산맥 인근에 자리한 가문들이 힘을 모아 기승을 부리던 산적들을 토벌했고.
그 당시의 협력 관계가 쭉 이어져, 오늘날 하이브라는 도시의 뼈대가 된 것이었다.
그런 설명에 유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트위그 산맥은 제법 터가 좋거든요.”
“터가 좋다?”
“산적들이 자리 잡기 좋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말이오?”
“그리 많지는 않아도 꾸준히 유지되는 통행량. 이건 산맥 너머의 항구 도시로 가는 우회로가 멀기에 생긴 이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맥 인근에 형성된 세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음…….”
“아마 꾸준히 산맥을 청소했어도 계속해서 산적들이 생겨났을 겁니다.”
“정확하오.”
알론을 비롯한 가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유리가 미소 지었다.
“그거, 모두 헛짓거리였습니다.”
“허, 헛짓거리?”
“더 정확히 말하면 여러분들의 가문은 그동안 흘릴 필요 없는 피를 쓸데없이 흘려 왔다는 거죠.”
“……!”
그간 하이브라는 도시를 위해 노력해 온 세 가문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발언.
당연히 좌중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터가 좋은 곳인데 미리 선점한 동종 업계 사람들이 없다? 세상에나! 산적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명당이 또 있을까요?”
“……?!”
유리의 말을 알아들은 가주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유리는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추가타를 날렸다.
“그간 여러분들은 산맥 청소라는 명목으로 트위그 산맥의 산적들을 갈아 치워 왔던 것뿐입니다. 이전에 자리 잡고 있던 산적들을 아주 깨끗이 청소해서 새로운 놈들에게 산맥을 넘겨주었다는 뜻이죠.”
“흠…….”
“크흠!”
“음…….”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에게 유리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구나.’
‘…제법 일리가 있어.’
‘우습게도, 하이브의 역사가 저 말을 증명해 주는 셈이구나.’
주기적으로 산적 토벌을 해도 그때뿐.
짧게는 몇 년, 혹은 십여 년이 지나면 다시 산맥에 산적들이 생겨났다.
하이브라는 도시가 생긴 이래, 쭉 말이다.
그렇게 가주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잡힌 듯싶자 유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악이라고 전부 제거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
“그 말은 산적들을 트위그 산맥에 남겨 놓았어야 한다는 뜻이오?”
“아뇨.”
“……?”
유리의 단호한 어조에 가주들은 눈을 끔뻑였다.
흐름상 ‘아뇨’라는 답이 나올 순간이 아니었는데?
그런 좌중의 의문을 유리가 끊어 냈다.
“아무 산적 놈들이나 산맥에 남겨 놓아서야 쓰겠습니까? ‘제어 가능한 산적’들을 산맥에 남겨 두어야죠.”
“…제어 가능한 산적?”
“악은 악이되, 제어할 수 있는 악이라면 더 이상 악이 아닌 겁니다. 그저 조금 위험한 도구일 뿐이지. 어찌, 제 이야기에 조금 흥미가 생기십니까? 계속할까요?”
“…계속하시게.”
알론을 비롯한 가주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미소를 잃지 않은 유리는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살려 놓은 산적들을 바로 그 제어 가능한 필요악으로 써 볼까 합니다.”
“어찌?”
“별거 없습니다. 협약을 맺고 산적들의 세력을 묵인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이 산적질을 하는 것도 말이죠.”
“산적질을 묵인해 준다니! 그렇다면 행인들이 고통을 받지 않겠나!”
레이디버그가의 가주가 목소리를 높이자 유리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무차별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보다는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서 피해를 보는 게 낫죠. 가진 제물에 목숨까지 빼앗기는 것보다는 통행세 개념으로 제물 좀 빼앗기고 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그, 그렇긴 하네만은…….”
“산적들을 잘만 제어하면 오히려 행인들의 피해가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여러분이 산맥에 심어 놓은 산적들이 새로운 산적들이 유입되는 걸 막아 줄 거라는 겁니다.”
“그들이? 어째서 말이오?”
“산적들의 세계에는 구역이란 개념이 있으니까요.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는 것처럼, 한 산에 두 개의 대형 산채는 있을 수 없는 법이죠.”
유리의 말에 세 명의 가주는 저마다 자기 생각을 중얼거렸다.
“우리가 다루는 산적들이 다른 산적들을 알아서 배척한다는 말이군.”
“적을 적으로 상대한다라.”
“그 말대로만 된다면, 확실히 주기적으로 산적들을 소탕할 필요도 없겠군. 오히려 협약을 맺은 산적들의 맥이 유지되게 우리가 도와야 할 판이겠어.”
3대 가문의 가주들이 흘리는 말을 들은 제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홀렸네… 제대로 홀렸어!’
고작 몇 분 남짓한 시간 만에 3대 가주의 마음은 이미 유리가 한 제안에 완벽히 홀려 든 상태였다.
‘하긴, 저 녀석을 아는 나마저도 이리 마음이 혹하고 있으니.’
이상한 논리도 그럴싸하게 꾸며 사기를 치는 놈인데, 오늘 유리가 한 제안은 마냥 이상한 제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3대 가주와 자신의 입장에서는 매우 혁신적이라 생각될 정도의 제안이었다.
그 근거도 딱히 흠을 잡을 데가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가주 중 헌트가의 가주가 물었다.
“그러다 산적들의 세력이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면?”
“제거해야죠. 말했잖아요,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의 필요악이라고. 꾸준히 감시하고 관리하다가, 제어할 수 없다 싶으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지워 버려야죠, 그리고 새로운 산적들로 그 빈자리를 채우면 됩니다.”
“그렇군. 명답일세!”
유리의 답에 헌트가의 가주는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버그가의 가주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3개의 표 중 두 개의 찬성표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유리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때 이어진 알론 가주의 질문.
“그래서, 지금 이게 그대가 원하는 보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겐가? 지금까지는 그저 우리 하이브에 일방적으로 좋은 이야기인 듯싶소만?”
“안 그래도 그 보상을 이제 말하려고 했습니다.”
“말해 보시게.”
“제가 원하는 보상은…….”
다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유리가 덤덤히 말했다.
“향후 산적들이 모으게 될 재화의 절반입니다.”
“……?!”
모두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유리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 재화를 3대 가문에서 주기적으로 수금… 아니, 수거한 뒤 보관해 주시죠. 제가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게! 이게 제가 원하는 이번 의뢰의 보상입니다.”
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
‘이 새끼가?!’
제리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유리가 한 말의 진의를 정확히 깨닫고 경악했다.
‘우리 하이브를… 자기 저금통으로 삼을 셈이구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