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70
370화. 얼굴 (4)
유리가 깨어나고 어수선했던 실내가 정리된 후.
아린이 유리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고 있는 모습을 뚱한 눈으로 바라보는 군터.
한쪽 볼이 퉁퉁 부은 그가 약간 새는 발음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라.”
“뭘?”
“너, 진즉 일어나 있었지?”
군터가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뭘 말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그와 같은 반응에 군터는 확신을 품었다.
저 새끼, 진즉에 일어나 있던 게 분명하다고.
군터의 주먹이 절로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사이 솜씨 좋게 유리의 몸에 붕대를 감은 아린.
“다 했다!”
그녀가 밝은 얼굴로 손을 뗐다.
이에 유리는 가볍게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네.’
관통상을 입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금방 회복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유리가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모두가 궁금해하는 걸 군터가 물어 왔다.
이에 유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야. 보이는 것처럼 니들이 없는 사이에 한바탕했고, 상황이 제법 위험해서 죽은 척을 좀 한 거지.”
“음…….”
군터가 작게 침음했다.
유리가 위협을 느낄 정도의 상대라니.
그자가 누구던 간에 범상치 않은 자인 건 확실했다.
“상대가 누구였냐?”
“몰라.”
유리가 고개를 내젓자 군터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랑 싸웠다고? 대체 이번에는 무슨 시비를 걸었기에?”
“내가 먼저 시비 안 걸었는데?”
“…….”
“진짜다, 이 새끼들아!”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내지른 유리는 찌릿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를 본 군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시비를 먼저 걸었든 안 걸었든… 어쨌든 간에 멀쩡하니 됐다.”
“어째 말하는 모양새가 이대로 상황을 마무리하자는 걸로 들린다?”
“그럼? 뭘 해야 하는 거냐?”
“야, 이 새끼야, 넌 친구가 처맞고 왔는데 복수를 해 줄 생각은 안 하냐!”
“그 친구가 너라면?”
“거, 더럽게 정 없는 새끼.”
툴툴거리던 유리.
그러다 돌연 그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뭐, 애초에 니들한테 복수는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내 복수는 내가 할 거였으니까. 그리고 복수를 떠나서 그 새끼는 반드시 찾아내야 해.”
“어째서?”
그런 아린의 되물음에 유리가 덤덤히 답했다.
하지만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그 내용은 경악스러웠다.
“그 새끼가 영감탱이의 검을 가져갔거든.”
“…뭐?”
“지, 진짜?!”
“배고프다?!”
시큰둥하던 군터는 물론이거니와 질문을 한 아린까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영감탱이의 검.
이는 요한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유리를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그걸 가져갔다니?!
유리가 이토록 짙은 살기를 폴폴 흘리는 것도 다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군터가 이제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게 언제냐?”
“어제.”
“다행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군. 그런데 그자는 어떻게 찾으려는 거지? 아까는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그 물음에 유리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 누군지는 몰라도 그 새끼 얼굴은 똑똑히 봐 뒀으니까.”
그러면서 유리는 종이와 펜을 요구했다.
이에 군터가 어디서 종이와 펜을 구해 와 건네자 유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쓱쓱 그림을 그려 나갔다.
그로부터 잠시 뒤.
“바로 이 새끼야.”
유리는 친구들을 향해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이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대단하군.”
“배고프다!”
“와… 유린 그림도 잘 그리네?”
펜을 잡고 집중한 지 불과 20여분.
그런데 유리가 보여 준 종이 위에는 생동감 넘치는 얼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돈을 주고 전문 화가를 고용했다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빼어난 초상화.
감탄하는 친구들의 반응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 그림 그리는 사람 밑에 잠시 조수로 있었거든.”
“설마 유명한 화가였냐?”
“유명했지.”
“호오?”
“위작을 기똥차게 그렸거든. 그쪽 방면에서는 도플갱어의 손이라 불리던 인간이었지.”
“…….”
…어째 이 새끼는 정상적인 일을 할 생각이 없었던 걸까?
세 사람은 유리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리가 그린 그림이 정말로 대단한 수준인 건 사실이었기에 군터는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초상화 속 인문을 중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대단한 미남.
‘나이는 대략 스물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군.’
초상화 속 상대의 나이를 짐작하던 군터는 턱을 쓸었다.
‘…유리가 이자에게 당했다고?’
그렇다고 치기에는 나이가 상당히 젊어 보이지 않은가.
물론 유리의 몸 상태가 좋지 못했기에 섣불리 속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리가 그 죽은 척을 사용했다는 건 몸을 내빼기 어려울 정도로 큰 위기였다는 뜻인데…….’
아무리 약해진 상태의 유리라고 해도.
그에게 그 정도 위기를 느끼게 몰아붙일 만한 존재가 20대 초의 동년배 중에 존재할까?
‘그건 나는 물론이거니와 아린과 뽀삐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유리와 비슷한 나이 중 사실상 최상급의 실력을 지닌 군터.
그가 떠나기 전에 본 유리라면, 녀석을 이길 수는 있을지언정 죽일 수 있을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세상은 넓구나.’
세상 대부분의 인재가 모인 요람.
하지만 요람은 그저 조금 특별하고, 깊은 우물이었을 뿐이었다.
아직 세상 밖에는 요람이 담지 않은 인재들이 있던 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군터가 유리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 초상화를 들고 탐문이라도 하려는 거냐?”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다만…….”
유리가 그리 말끝을 흐린 순간.
“어?”
초상화를 들고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아린에게서 갑자기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사람……?”
마치 무언가를 알아낸 듯한 말투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아는 사람인가?”
군터의 물음에 아린은 한참을 더 초상화를 들여다보다가 그제야 확신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릴 때 봐서 긴가민가했는데, 그때 본 얼굴이 맞는 거 같아!”
아린의 이야기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때 본 얼굴이 이 얼굴이 맞다는 건 건… 그때도 이 얼굴이었다는 소린데? 지금 내가 이해한 게 맞냐?”
“응, 맞아! 그거야!”
“네가 말한 어릴 때가 몇 년 전인데?”
“내가 일곱, 여덟 살 때니까… 대충 13년 전쯤?”
“그럼 이 새낀 대체 몇 살이라는 거냐?”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아마도…….”
살짝 고민하던 아린이 내놓은 답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최소 50살은 넘었을걸? 더 될 수도 있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얼굴이… 50대라고?”
“음… 60대일 수도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놀랍다는 눈을 끔뻑인 유리가 중얼거렸다.
“엘리온이라도 마신 건가?”
과거 율리아가 그토록 탐을 내던 노화 방지의 비약 엘리온.
그거라면 아린의 말이 설명되기는 했다.
하지만 아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저 사람 가문의 내력이라고 했어.”
“가문의 내력?”
“응, 저 가문의 직계들은 대부분 장수하기로 유명하거든? 그런데 그보다 더 유명한 건 이 가문의 직계들은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잘 늙지 않는다는 거야.”
“이야… 뭐, 그런 축복받은 혈통이 다 있냐?”
아린의 설명에 유리가 감탄하는 사이 군터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불쑥 소리쳤다.
“불로의 이스카리오!”
“이스카리오?”
“아린의 설명대로 잘 늙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가문의 이름이다. 정말 오랜 역사를 지닌 명가로도 알려져 있고.”
그런 군터의 이야기에 아린이 설명을 덧붙였다.
“맞아, 이스카리오 가문은 역사가 엄청 깊다고 들었어. 그리고 깊은 역사만큼 힘도 막강해서, 엔라이트 제국 시절부터 황가 다음으로 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가문이야. 지금도 엔라이트 행정구의 이인자나 다름없을걸?”
그 설명에 유리가 눈을 빛냈다.
“호오, 그래? 그런데 아린 너… 생각보다 잘 알고 있네?”
“응? 내가 얘기 안 했나?”
“뭘?”
“나 엔라이트 행정구 출신이야.”
“처음 듣는데?”
“그럼 처음 말하는 건가 보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유리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린의 이야기를 흘려 넘겼다.
그토록 유명한 가문을 엔라이트 행정구 출신이 모를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것보다 유리에게 중요한 관심사는 따로 있었기에 대충 넘어간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새끼가 누군데?”
더욱 증폭되는 유리의 살기.
장난이라도 쳤다가는 그 살기가 자신을 향할 거 같아서 아린은 냉큼 답했다.
“블레어 이스카리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자일 거야.”
그녀의 이야기에 군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레어 이스카리오? 그럼 이자가 이스카리오 가문의 대공자란 뜻이냐?!”
“응, 맞아.”
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군터의 고개가 이번에는 유리를 향했다.
“너… 우리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이런 자와 얽히게 된 거냐?”
자신들이 옆을 비운 시간은 고작 사흘 남짓.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면 평생 만나기도 힘든 이런 거물급 인사와 얽힐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함이 가득한 군터의 시선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안 했어. 그냥 어쩌다 보니 우연히 봐 버렸거든.”
“무얼 봤다는 거지?”
“추악한 비밀.”
나직하게 깔린 중저음과 함께 유리의 기억이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
하루 전.
모든 사건은 극심한 허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꼬르르르르륵-!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에 슬며시 눈을 뜬 유리.
그러자 환한 시야에 잡힌 건 언제 청소를 한 것인지 모를 더러운 천장과 거미줄이었다.
거미가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 치는 날벌레를 꽁꽁 싸매는 것을 본 유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배고파.”
세 친구들이 떠나가고, 단 한 걸음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널브러져 있던 유리.
그간 그가 한 일이라고는 잠을 자는 것과 심상 공간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뜻.
“쟤도 먹고살려고 저렇게 열심인데…….”
저 작은 거미조차 저리 열심히 먹이 활동을 하는데 자신이 이리 널브러져 있을 수는 없는 일.
거미를 보고 동기 부여를 받은 유리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괜찮네.”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회복에만 집중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처음 여관에 도착했을 때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원래 몸 상태의 한 30%는 되겠어.’
그 정도면 걷는 건 물론이거니와 뛰고도 남을 수준.
하여 유리는 재빨리 짐을 챙긴 뒤, 싸구려 여관을 벗어나 도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무려 이틀 만에 하는 식사.
무얼 먹어도 맛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제대로 맛있는 걸 먹어야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리는 발품을 팔며 음식점들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 성에 차는 식당을 찾지 못한 그의 발길이 외진 골목을 향했다.
‘자고로 이런 도시는 골목의 오래된 음식점이 진짜 맛집인 법이지.’
물류 유통이 활발한 곳이기에 강가를 주변으로 음식점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인부나 여객선을 이용하는 손님들을 노리고 장사를 하기 위함.
그런데 그런 강가를 벗어나 외진 골목에서 오랫동안 음식 장사를 이어 오고 있다?
이는 그 외진 곳까지 손님이 찾아갈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무언가는 당연히 음식의 맛일 테고.’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끝에 유리는 사람이 붐비는 낡은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망설이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간 유리.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늦은 오후에 식당으로 들어갔던 유리는 완전히 해가 진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짙은 만족감이 서려 있었으니.
“역시 맛집이었네.”
양념에 바짝 졸인 돼지고기가 주력 메뉴인 식당.
이곳에서의 식사는 허기짐을 참아 가며 발품을 판 게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든든하게 찬 배를 두드리던 유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볼을 긁적였다.
“…여기가 어디냐?”
안 그래도 배고픔에 살짝 넋을 놓아 버린 탓에 골목 깊숙이 들어왔는데.
거기에 해까지 완전히 져 버렸으니 여관이 있는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유리는 태연했다.
“배도 꺼뜨릴 겸 천천히 걷지 뭐.”
여관에 발이 달려 도망갈 것도 아니고.
누가 훔쳐 갈 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늦게 여관에 돌아가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유리는 밤공기를 만끽하며 유유자적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 밤하늘을 구경하는 건 덤.
‘아직 3월인데 날이 많이 풀렸네?’
생각보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은 거 같다고.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하며 골목을 누비던 그 순간.
우우우웅-.
“응?”
어디선가 들려온 선명한 울림에 유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