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88
388화. 베오그라드 전쟁 (3)
아론 슈미트의 한마디에 가주들이 지레 겁을 먹은 건 전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조, 좋지 않다.’
‘…피를 볼지도 모르겠군.’
아론이 베오그라드의 서쪽을 집어삼키며 걸어온 길이 ‘혈로(血路)’라 칭하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대항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그 가문을 철저하게 분쇄해 자신이 나아갈 혈로에 흩뿌렸고.
오로지 완벽하게 꼬리를 만 자만 자신의 세력으로 포용해 온 아론 슈미트.
그가 만약 조금만 자비를 보였다면 이 회의장에 앉아 있는 이들이 지금의 몇 배에 달했을 거다.
이는 다소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그 단호한 행보 덕분에 아론은 불과 4개월 만에 베오그라드 서쪽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그 과정을 바로 지척에서 보아 온 가주들은 아론의 심기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주들이 눈치만 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자 아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게 할 말들이 없는 모양이로군.”
옅은 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아론의 가까운 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 예상보다 저들의 단합이 너무 빠른 탓에…….”
원래 계획대로라면 슈미트의 연합은 이미 강의 동쪽까지 진출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울리 지클리가 발 빠르게 연합을 모아 강의 동쪽에 전선을 구축해 버리면서 그들의 전진이 막혀 버린 것이다.
심지어 베오그라드의 3강 4중 5약이라 불리던 명가 중 2강 3중이 지클리 연합에 속해 있었다.
1강 중 하나인 싱 가문이 침묵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베오그라드 중 실속 있는 명가는 저 반대편에 몰려 있는 셈.
생각보다 너무 빠른 저들의 대처에 슈미트 연합이 당황한 사이, 지클리 연합은 용병까지 고용하며 더욱더 견고하게 전선을 쌓아 갔다.
아론 슈미트의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에 맨 처음 입을 연 이가 변명을 덧붙였다.
“이건 무언가 이상합니다. 그 콧대 높기로 유명한 2강과 3중이 저리 빨리 단합을 이루다니요!”
“맞습니다! 이건 다른 누군가가 저들을 도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
제대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라… 싱 가문을 말하는 것이더냐?”
그런 아론의 되물음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움직였을지도 모릅니다!”
“싱 가문의 조언이라면 저 콧대 높은 2강의 가문들도 고개를 숙이고 따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싱 가문은 대륙 전체를 뒤져 보아도 그 역사와 저력을 견줄 만한 가문이 열을 넘지 않을 정도의 수준 높은 명가였다.
베오그라드의 3강이라 불리며 같은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다른 두 가문과의 격차는 어른과 아이 수준이었다.
하여 동쪽 연합이 빠르게 구축되는 데 싱 가문이 개입했다고, 충분히 그리 여길 만했다.
베오그라드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막강했으니까.
한데 놀랍게도 그러한 분위기에 동조하는 건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가주들뿐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가주들은 입을 다물고 부정적인 내색을 비쳤다.
심지어 아론마저 젊은 가주들의 여론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다.”
“예?”
“싱 가문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계획과 변수에서 그들은 배제해라.”
“예?! 하지만…….”
쉽사리 납득하지 못하는 가주들을 보고 아론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그저 똑똑한 병신일 뿐이다.”
“예?”
“대륙의 유구한 역사 속에 무수히 많은 전란이 일어났다. 과연 그 싸움의 역사서에 적힌 싱 가문의 이름이 몇이나 될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많지 않겠습니까?”
은환의 현자라 불리며 수많은 분야에서 활약하는 천재들.
그 활동 분야에 전술과 전략이 포함돼 있는 건 당연지사.
하여 군사(軍師)라는 직책에 늘 1순위 영입 대상으로 거론되는 게 바로 싱 가문의 인재들이었다.
그러니 전란의 역사서에 싱 가문의 이름이 셀 수도 없이 자주 언급될 수준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전무(全無).”
“……?!”
“그 똑똑한 병신들은 절대로 전란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노려야 하는 게 적군의 머리이지 않더냐?”
“아!”
그제야 좌중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시대든 군사의 재목으로 손꼽히는 싱 가문.
만약 그때마다 그들이 전쟁에 개입했다면.
그리고 그때마다 수많은 적대 세력이 싱 가문을 노려 왔다면, 어쩌면 싱 가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싱 가문은 모든 계획에서 배제하라는 거다. 그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어떤 전란에도 끼어들지 않을 작자들이니.”
“아아! 예, 알겠습니다!”
가볍게 상황을 정리한 아론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손을 놓고 있을 작정이냐.”
“음…….”
“허음…….”
다시 이야기가 본론으로 넘어오자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한 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탁자의 가장 끝 쪽에 자리한 50대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쏠린 것을 느낀 그녀가 발언을 이어 나갔다.
“현재 놈들의 신경은 아론 님이 계신 이곳에 쏠려 있는 상태입니다.”
“프흐흐, 정녕 저들의 신경이 쏠려 있는 게 내가 맞느냐?”
“…….”
“아니겠지. 언제 그분께서 저 산에서 뛰쳐나올지 몰라 그걸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는 걸 테지.”
자신의 말에 아무도 반박을 하지 못하자 아론은 피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됐고, 그래서 그 계획이란 게 뭐냐?”
“놈들의 뒤를 노리는 겁니다.”
“뒤?”
“일단 저들의 신경이 이곳에 쏠렸을 때, 정예 병력을 중앙 산맥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더욱 저희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들이 산군… 그분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는 만큼 중앙 산맥으로 향한 병력이 어떤 의도인지 예의 주시할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아론의 얼굴에 살짝 미묘한 빛이 스치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순식간에 미묘한 내색을 지워 버린 아론이 물었다.
“…그래서?”
“이후 저희 본진이 전면전을 치를 것처럼 움직여 저들에게 혼란을 주는 사이, 정예 병력은 중앙 산맥을 따라 남하한 후, 데일 강을 통해 놈들 진영의 후방으로 접근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군.”
“시간은 조금 걸릴지 몰라도 성공만 한다면 저들의 보급을 끊는 것은 물론이고, 저들의 배후에 비수를 꽂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흠…….”
아론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듣기에도 제법 괜찮은 작전이었다.
성공한다면 팽팽한 전선의 분위기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예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한 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아론이 던진 물음에 좌중은 잠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답을 냈다.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작전입니다.”
대부분이 비슷한 말을 하였기에 아론은 곧장 결론을 내렸다.
“좋군, 이번 작전은 입안을 한 그대가 책임지고 성공시켜라. 성공만 한다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예!”
아론의 명령에 중년 여인이 당차게 답했다.
***
베오그라드 지클리 연합, 용병군 막사 부지.
얼마 전까지 평화로웠던 그곳에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으니.
“우, 우악!”
“끄악!”
비명이 난무하고, 사람이 허공으로 휙휙- 솟구쳤다.
동시에 들려온 경쾌한 소리.
빠악-!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어김없이 사람이 위로 솟구쳤다.
“오, 오지 마!”
“나, 난 별말 안 했어! 저 새끼가 제일 뭐라고 했지!”
“나도 아니야!”
시퍼렇게 겁에 질린 채,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뒷걸음질 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유리 일행을 둘러싸고 시비를 걸었던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런 용병들을 허공으로 날려 버리고 있는 건 군터였다.
빠악-!
“꿱!”
군터가 검집째 휘두른 칼에 맞고 튕겨 올라, 공중에서 대략 5바퀴쯤 도는 용병을 본 유리는 짧게 감탄했다.
“맑고 고운 소리네.”
오독오독-.
누워서 건량을 씹어 대는 그의 분위기는 주변의 난잡한 상황과 달리 너무도 평온했다.
그리고 평온한 건 유리뿐만이 아니었다.
톡!
“또 들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리가 입을 벌리면 거기로 건량을 던져 넣고 실실거리는 아린이나.
“배고프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량을 뺏어 먹는 뽀삐나.
그 누구도 군터가 벌이는 일에 관심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흘러.
빠악-! 빠아아악-!
“컥! 왜… 왜 나만… 두 대……!”
“난… 가출한 도련님이 아니다.”
“……?”
혼자 2대를 맞은 용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기절하는 것으로 주변 정리가 끝이 났다.
이후 다시 찾아온 적막.
아니, 시비를 건 용병들이 나타나기 전보다 더욱 고요한 적막이 용병군 부지에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몸을 일으킨 유리가 흙을 털며 말했다.
“자, 실컷 구경했으면 이젠 구경한 값을 치러야겠지?”
그리 말하며 유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이 피운 소란을 듣고 몰려온 수많은 용병.
막사와 막사 사이사이 뭉쳐 있는 그들 중, 유리는 몇몇을 집어냈다.
“거기 애꾸눈 아줌마랑, 쩌어어 뒤에 턱수염 세 갈래로 꼰 아저씨, 그리고 그쪽에 대머리 아저씨, 아, 저짝에 입 찢어진 아저씨도! 재밌는 구경 했으면 셈을 치르는 게 도리 아니겠어?”
수많은 용병 중 유리가 자신을 지목해 내자 네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사이에서 감탄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웬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몇이 객기 부리러 왔나 싶었더니만, 그게 아닌 모양이군.”
“이번에는 제법 쓸 만한 놈들이 들어왔어.”
“쓸 만? 저게 쓸 만한 수준이면 우리 용병단 애들은 내다 버려야 할 쓰레기인데?”
“킁!”
3명의 사내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릴 때 외눈의 중년 여인이 유리에게 물었다.
“그래, 구경한 값은 치러야겠지. 무얼 원하나?”
그리 질문을 던진 그녀의 독안(獨眼)에 흥미로운 기색이 서렸다.
마치 시험을 하는 듯한 눈빛에 유리는 피식거리며 답했다.
“정보.”
유리의 말에 중년 여인의 입꼬리가 사르르 올라가고.
“따라 들어와라.”
그녀가 인근의 거대한 막사로 먼저 들어갔다.
그녀뿐 아니라 투덕거리던 다른 세 사내도 여인을 따라 막사로 들어섰다.
그걸 본 아린과 군터, 뽀삐가 유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뭐야, 뭐야?”
“배고프다?”
“아는 사람이냐?”
연달아 쏟아진 질문에 유리가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긴 개뿔, 오늘 처음 봤구만.”
“진짜? 그럼 누군데 저 사람들?”
“여기서 가장 말빨 잘 먹히는 대장들.”
“……?!”
깜짝 놀란 친구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시선을 보내자 유리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딱 보면 알잖아?”
그리 답한 유리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
너른 탁자를 두고 다섯 사람이 둘러앉았다.
유리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남자 셋은 공인 4단, 군터와 비슷비슷한 수준. 가장 강한 건…….’
유리의 시선이 애꾸눈의 여인에게 닿았다.
‘저 여자군.’
유리가 파악한 그녀의 수준은 공인 5단급.
그것도 완숙에 접어든 상태였다.
아마도 계기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공인 6단을 넘볼 수 있으리라.
‘이들 수준이라면 최소 중형에서 대형급 용병단 정도는 이끌고 있을 거다.’
유리가 그렇게 견적을 내는 사이, 대머리 사내가 유리와 그 뒤에 선 친구들을 보며 물었다.
“그래, 너흰 어디 소속이지?”
“소월 용병단입니다.”
군터의 답에 용병들이 미간을 좁혔다.
“소월 용병단?”
“흠, 그런 용병단이 있던가?”
“최소 베오그라드 내에서는 못 들어 본 용병단이군.”
사내들이 저마다 중얼거릴 때 독안의 여인은 확신에 찬 어조가 물었다.
“요람을 수료한 기념으로 용병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거냐?”
그녀의 발언은 막사 안에 꽤 큰 파장을 일으켰으니.
“요, 요람?! 저 녀석들이 요람 출신이라고?”
“허! 하긴, 저 나이에 저만한 실력을 갖추려면…….”
“쯧, 나도 감을 잃었나 보군. 당연히 그걸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용병 사내들은 요람 출신이란 말에 술렁였고.
“흠?”
“어?”
“배고프다?”
소월 용병단원들은 단번에 자신들의 정체를 꿰뚫은 여인의 통찰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호오?’
유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애꾸눈 여인의 독안을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것 봐라?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겠는데?’
오